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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06. 2024

빅토르 위고와 노트르담 대성당의 운명

1.


봄답지 않게 우중충한 날씨였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여러 날 동안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아직 부족한 모양이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는 사람의 마음은 물론 발걸음까지 무겁게 만들었다. 1829년 5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한 젊은 사내가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라탱 지구를 지나 시테 섬으로 이어지는 오 두블르 다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깔끔한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안에는 밝은 색 조끼를 걸치고 있는 멋진 청년이었다. 그는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의 벤치에 앉아 속으로 탄식하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예술의 폐허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구나! 누가 두 줄의 조상들을 없애 버렸나? 누가 장미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저 싸늘한 흰 유리를 끼워놓았나?’

 

한탄을 늘어놓은 청년은 다름 아닌 빅토르 위고였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는 파리 문단에서 제법 실력 있는 젊은 시인으로 조금씩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위고는 벤치에서 일어나 대성당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벽 한쪽에 누군가 새긴 글씨가 보였다. 

 

‘아냉키(Ἀνάγκη). 누가 여기에 ‘운명’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를 써 놨을까?’

 

글씨를 한참이나 쓰다듬던 위고의 두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래, 맞아. 이건 운명이야! 이 글자를 본 자체가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야!’

 

위고는 빠른 걸음으로 시내로 향했다. 그는 작은 건물로 서둘러 들어갔다. 책을 펴낼 기회를 여러 차례 제공한 출판사 사장 고셀린의 사무실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소재로 소설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책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그곳의 재건을 촉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산업혁명 시대에 허물어진 프랑스의 윤리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2. 


당시 유럽에는 산업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프랑스는 급격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기를 지나고 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는 파리지앵들은 두 명 이상만 모이면 조국의 과거와 미래, 도시의 현실을 토로하고 개탄하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노트르담 대성당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1163년 착공해 1345년 완공한 이곳은 엄청나게 망가진 상태였다. 세상의 한쪽 모퉁이로 밀려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돼 있었다. 파리 사람들은 역사의 보물을 개‧보수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악하거나 약탈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조상의 선물을 망친 대표적 인물은 18세기 초 국왕 루이 14세였다. 그는 어두운 성당 내부를 더 밝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걷어내고 투명한 유리를 바꿔 끼웠다.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하려고 기둥 한 개를 뜯어내기도 했다. 제단과 다른 구역을 갈라놓도록 세워둔 칸막이는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로 부숴버렸다.

 

1789년 발발한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사정이 더 나빴다. 혁명세력은 다른 성당, 교회와 마찬가지로 노트르담에서도 파괴 행위를 일삼았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을 묘사한 석상 수십 개의 머리를 잘라 버렸다. 역사에 무지한 이들이 역대 왕의 석상으로 오해하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주교의 궁전은 불태워 버렸다. 꼭대기에 있던 첨탑이 폭풍에 훼손되자 보기 싫다면서 없애버리기도 했다. 지붕 공사에 사용한 납은 총알 제조에 쓴다며 뜯어갔고, 청동 종은 대포 포탄을 만든다면서 녹여 버렸다.

 

혁명세력은 1802년 철수했고 가톨릭이 관리권을 다시 인수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기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건물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졌다. 일부 성직자 말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위고는 나중에 반가톨릭으로 돌아섰지만, 당시만 해도 독실한 신도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도였다. 게다가 중세 역사, 문화에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년 전 중세 건축물의 보존을 촉구하는 『파괴자들에게 전쟁을』이라는 소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위고는 중세를 아주 단순한 시대로 보았다. 순수한 신앙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였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중세 건축물은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프랑스의 고결한 문화를 상징하고, 찬란한 역사를 대변하는 건축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위고는 곧바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중에 일이 밀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소설은 1831년 초 발간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그의 대표작인 『파리의 노트르담』이었다. 우리나라와 다른 여러 나라에는 『노트르담의 곱추』로도 알려진 바로 그 책이다. 

 

이십대 후반이었던 젊은 작가의 소설은 프랑스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바람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책은 영어, 독일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돼 팔렸다. 그가 의도했던 대로 노트르담을 향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커졌다. 신도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루 수천 명이 성당을 찾아갔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예술역사학자인 스티븐 머레이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평가했다.

 

“파리지앵들은 노트르담 대성당과 오랫동안 직접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위고가 펴낸 책은 이 같은 관심의 물결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위고가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곱추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이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지고지순한 휴머니즘’만이 아니었다. 그는 소설의 무대가 된 아름다운 성소에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쓴 소설 서문이 이를 입증한다. 


‘새로운 건축물이 세워질 때까지는 옛 건축물을 보존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국민적 건축물에 대한 사랑을 불어넣어줘야 한다. 이것은 바로 이 책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이며 내 일생의 주된 목적 중 하나이다.’

 

위고는 소설에서 대성당을 묘사하는 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여러 대목에서는 쇠락을 한탄하기도 한다. 스토리 전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그는 소설의 시대를 14세기로 설정했다. 노트르담이 전폭적 사랑을 받던 전성기였다. 당연히 매우 의도적이었다. 그는 소설 제3부 제1장에 이렇게 적었다. 

 

‘세월과 인간들이 동시에 이 존경할 만한 건축물에 가한 무수한 풍화와 훼손 앞에서 한숨을 쉬지 않고 분개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옛 성당에 가해진 파괴의 갖가지 흔적을 하나하나 살펴볼 겨를이 있다면, 세월의 몫은 하찮은 것이고, 최악의 몫은 인간의 몫, 특히 예술인들의 몫이다.’

 

3.


소설 출간 이후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자 프랑스 정부는 보존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1841년에는 ‘역사 유적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듬해에는 복원 사업 설계안 공모전을 열었다. 

 

위고의 소설이 출간되던 해에 책을 감동 깊게 읽은 청년이 있었다. 당시 10대였던 건축학도 외젠 비올레 르 뒥이었다. 그는 위고가 원했던 게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폭력적 사고와 방탕한 생활은 현대 사회의 무절제한 혼란에서 비롯한 거야! 위고 씨의 말처럼 노트르담 대성당을 옛날 모습대로 재건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종교적 신심을 불어넣는다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르 뒥은 위고처럼 프랑스의 ‘진짜’ 과거 모습을 되찾고 싶었고, 중세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독특한 건축가였다. 건축가로 출세하려면 꼭 들어가야 하는 유명한 예술대학인 ‘에콜 드 보자’에 입학하지도 않았다. 고전적 건축만 강조하는 학교 기풍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파리 근교의 여러 건축사무소를 돌아다니며 일했고, 틈나는 대로 중세시건축을 독학으로 공부했다. 

 

프랑스 정부가 공모전을 실시하자 당시 스물여덟 살이던 르 뒥은 주저하지 않고 설계안을 제출했다. 그는 이미 중세 건물 복원 전문가로 파리 건축학계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다른 건축가 장 바티스트 라슈와 함께 노트르담 대성당에 과거의 영광을 재연할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됐다.

 

르 뒥은 부서진 부분을 손보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곳에 담긴 신화적 과거를 되살려내겠다고 계획서에 적었다. 그는 중세 첨탑을 새로 디자인해 건설했고, 장미 스테인드글라스를 살려냈다. 갸르구이 석상을 성당에 설치하기도 했다. 외벽 꼭대기를 둘러싸고 있는 ‘괴물’들이다. 위고가 ‘비열한 웃음을 짓는 괴물들’이라고 묘사한 내용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복원작업은 중세의 모습과 그와 위고가 살던 ‘현대’, 즉 19세기의 모습을 융화시킨 것이었다. 

 

위고는 재건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첨탑을 새로 짓는 장면도, 석조물 표면의 오염을 처리하는 모습도, 훼손된 석상을 재건하는 작업도, 엉뚱하게 떨어져 나간 스테인드글라스를 원상회복하는 과정도, 갸르구이를 새로 조각하는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르 뒥이 주도한 복원공사는 1864년 마무리됐다. 그해 5월 31일에는 새 모습을 갖춘 대성당을 새로 봉헌하는 행사가 열렸다. 당연히 위고도 참가했다. 그는 파리의 새로운 상징적 건물로 거듭난 성소의 천장을 흐뭇한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성모 마리아가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의 창’ 사이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저에게 새 집을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


 한편 위고는 『파리의 노트르담』 서문에 특이한 표현을 남겼다. 


 ‘그 벽에 그 낱말을 쓴 사람은 사라졌다. 그 말도 성당 벽에서 사라졌다. 성당 자체도 머지않아 지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2019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슬픈 뉴스가 전해졌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에 휩싸였다는 소식이었다. 첨탑과 지붕이 붕괴돼 사실상 새로 짓다시피 해야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위고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운명을, 인간의 문명은 유한하고 불멸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견했던 것일까? 과연 그것은 아냉키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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