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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07. 2024

구스타프 에펠 인생 투자 1889년 파리 에펠탑

1700년대 말 프랑스에서 ‘프랑스산업박람회’로 알려진 대형 전시회가 처음 열렸다. 주로 프랑스 산업과 생산품을 소개하는 행사였다. 중세 시대부터 유럽 곳곳에서 열렸던 이동시장을 확대한 행사였다. 전시회는 이후 프랑스에서 꾸준히 열렸지만 큰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 특히 1878년 행사는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런 와중에 1851년 영국 런던에서 ‘대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형태의 전시회가 열렸다. 전 세계에서 생산한 제품을 모두 소개하는 초대형 행사였는데, 메인행사장이던 ‘크리스탈 궁전’에 무려 600만 명이 방문하는 큰 성과가 이뤄졌다. 이 행사 소식을 들은 프랑스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정부는 1889년에 다시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이번에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 100주년 기념을 주제로 삼아 런던을 능가하는 초대형 박람회를 개최하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유니버설 엑스포’, 즉 ‘세계박람회’였다. 행사 일정은 1889년 5~9월로 정해졌고 개최 장소는 역시 파리로 확정됐다.


프랑스 정부는 런던 크리스탈 궁전에서 열린 대박람회처럼 관중 동원 규모나 재정적인 측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었다. 그런데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유럽 많은 나라는 여전히 군주제였는데 왕과 왕비를 포함해 많은 귀족의 머리를 벤 혁명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영국을 포함해 일부 국가는 공개적으로 불참을 선언했다. 이 탓에 프랑스 정부는 참여국가 및 참여기업을 고르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파리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는 행사를 성대하고 이색적으로 치를 계획안을 세웠다. 적자를 보지 않으려면 관람객 수백만 명을 끌어 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프랑스 기술, 디자인, 요리, 예술 수준을 전 세계에 과시함으로써 프랑스 경제를 부흥시킬 필요도 있었다. 행사 개최 목적은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경제였다.


조직위원회는 관람객이 구경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고 한 번 보면 또 보고 싶은 명물, 즉 시그니처 구조물을 만들기로 했다.  1886년 구조물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공모전 요지는 ‘높이 300m 타워 모양 건축물 설계안을 내라’는 것이었다. 공모전 참가작은 700여 점이었다. 높이 300m 분수를 내놓은 건축가도 있었다. 무더운 여름에 주변을 시원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300m 단두대를 제시한 건축가도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을 상징하는 데다 매우 인상적이라는 게 제안 이유였다.


타워형 건축물은 사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1876년 센테니얼박람회를 연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도 타워형 구조물 아이디어가 나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조직위원회 위원인 구스타프 에펠이 타워형 건축물 아이디어를 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철골 다리, 철로, 크레인, 승강기를 전문으로 하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기업가이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에펠은 공모전이 발표되기도 전에 이미 설계안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타워형 건축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에펠 회사에서 일하던 두 엔지니어였으니 넓게 도면 에펠의 아이디어라고 볼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초대형 금속 타워를 그려 에펠에게 보여줬는데 에펠은 돈을 주고 두 사람의 아이디어를 사들여 설계안을 완성한 것이었다.


1886년 5월 12일 에펠의 설계안, 이른바 에펠탑이 공모전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에펠은 “조직위원회가 총공사 600만 파운드 중 4분의 1인 150만 파운드만 내면 나머지 4분의 3인 450만 파운드는 내가 내겠다”고 제안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대신 조직위원회는 에펠에게 20년간 에펠탑, 전망대, 식당 독점운영권을 주기로 했다.


에펠은 에펠탑이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사비 대부분을 부담하는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는 에펠탑 개장 1년 만에 공사비를 100%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부자로 성장했다.


하지만 에펠탑은 지식인들로부터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높이 300m 에펠탑 선정 소식이 전해지자 발표되자 작가 모파상을 포함해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다. 그들은 ‘300인 위원회’라는 반대 모임을 만들어 에펠탑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300인 위원회’는 ‘에펠탑은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공장 굴뚝처럼 파리를 내려다보게 될 것이다. 에펠탑은 야만적일 정도로 거대한 몸집으로 노틀담성당, 생샤펠 성당, 루브르박물관, 앵발리드, 개선문을 압도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들은 또 ‘우리의 자랑인 모든 기념물은 모욕당할 것이고, 모든 건축물은 난장이가 될 것이다. 흉물스러운 에펠탑 때문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천재가 넘쳐났던 파리 하늘 위에서 앞으로 20년간 이 끔찍한 기둥의 그림자를 보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에펠은 꿈쩍하지 않았고 결국은 최후에 웃는 사람이 됐다. 에펠은 2년 2개월 5일간 노동자 500명과 철강 조각 1만 8000개를 투입한 공사를 진행해 에펠탑을 완성했다. 에펠탑 준공식이 열린 것은 1889년 3월 31일이었다. 에펠은 준공식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면서 “나는 지금까지 인간이 건설한 건축물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에 조국의 국기를 거는 엄청나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했다”고 선언했다.


에펠탑이 대중에게 문을 연 것은 5주 후인 5월 15일이었다. 에펠탑은 세계박람회로 가는 아치형 입구 역할을 했는데, 타워를 보러 간 사람들은 지금껏 보지 못한 엄청난 높이에 벌어진 턱을 다물지 못했다.


에펠탑은 개장하는 날부터 대성공을 거뒀다. 에펠탑 제1호 방문객은 대영제국 왕실 가족과 버팔로 빌로 불렸던 기업가 겸 쇼맨이었던 윌리엄 F 코디였다. 에펠탑 개장 첫 주에는 승강기가 운영되지 않았는데도 유료 입장객 3만 명이 몰려 300m 높이 꼭대기까지 걸어갔다. 1주일 뒤에는 저택이 아니라 초대형 구조물 중에서는 세계 최초로 승강기가 설치됐다.


파리세계박람회 입장료는 1인당 40센티메였는데, 당시 꽤 고급스러운 점심식사 한 끼 가격이 10센티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싸지 않은 요금이었다. 에펠탑 입장료는 이보다 훨씬 비싸 박람회 입장료의 12.5배인 500센티메, 즉 5프랑이나 됐다. 파리세계박람회가 173일 만에 끝났을 때 에펠탑 방문객은 무려 200만 명에 이르렀다. 총수입은 단순히 계산해도 에펠이 투입한 공사비의 3배에 이르는 1000만 프랑이었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에펠탑에 올랐는데,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낮에는 시원한 파리 전경을 보려고, 밤에는 야경을 보려는 게 목적이었다. 에펠탑 전망대는 항공 여행 보편화 이전까지는 가장 높은 곳에서 땅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였는데, 그 멋진 풍경에 관람객은 놀라 쓰러질 지경이었다. 맑은 날이면 60km 떨어진 곳까지 볼 수 있었다.


에펠탑 1층에는 동시에 500명을 수용하는 식당이 네 곳 있었는데 매일 100% 예약 만료를 기록했다. 에펠탑 전망대에서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아 날려 보낼 수 있는 미니 낙하산이나 풍선을 팔았더니 이 또한 불티나게 팔렸다.


에펠탑 개장 6개월 후인 1889년 9월 미국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에펠탑에 올랐다. 그는 방명록에 ‘현대 건축의 모범이 될 엄청난 구조물을 만든 에펠 경에게 모든 위대한 공학도를 대신해 가장 위대한 존경과 찬사를 보냅니다. 토마스 에디슨’이라고 적었다.


에펠탑뿐 아니라 파리세계박람회도 대성공이었다. 총 참가국은 35개구, 총 참가기업은 6만 1000곳이었으며 총 관람객은 3200만 명이었다. 조직위원회는 준비 비용으로 쓴 4150만 프랑을 뽑고도 800만 프랑 흑자를 기록했다. 재정적인 분야뿐 아니라 대중교통 시스템 개선과 확충, 프랑스 경제의 명성 상승 같은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조직위원회는 세계박람회를 준비할 때 모든 건축물과 구조물을 20년간만 존치시키고 이후에는 철거할 방침이었다. 에펠탑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건축물, 구조물이 하나씩 철거되기 시작됐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프티팔레와 그랑팔레 등 일부만 남았다.


에펠은 매우 지혜로운 기업인이었다. 조직위원회가 에펠탑 철거를 준비하자 그는 프랑스군에 이색 제안을 내놓았다. 에펠탑을 무선 송신기로 활용하면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프랑스군은 그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20년이라는 시한부 생명이었던 에펠탑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에펠탑은 이후 41년간 ‘인간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라는 기록을 유지했지만 1930년 미국 뉴욕에 크라이슬러 빌딩이 생기는 바람에 영광의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에펠탑의 현재 높이는 330m에 이른다. 당초 높이 300m에 무선 송신기용 안테나 높이 30m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에펠탑 무게는 무려 1만 100t에 이른다. 에펠은 에펠탑 1층 측면에는 프랑스의 유명 과학자, 공학자, 수학자 72명의 이름이 60cm 크기 글자로 새겼다. 선정 기준은 에펠이 생각하기에 위대한 발견, 발명을 남겨 인류의 지식 확대에 기여한 인물 중에서 철자가 12개를 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에펠 마음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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