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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08. 2024

계몽사상가 볼테르와 파리 팡테옹


1.


1762년 3월이었다. 스위스 접경지역에 살던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집에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볼테르는 4년 전 평생 살았던 파리를 떠나 시골에 이사를 가서 조용히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평범한 국민들이 기본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고통 받는 현실을 목도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평민을 도와주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때 마침 처음 보는 손님이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낯선 이는 눈물을 흘리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볼테르 선생님, 제발 칼라스 가족을 도와주십시오.”


볼테르는 손님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접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제게 차근하고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구려.”


손님이 차를 마시며 풀어낸 칼라스 가족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다.


2.


1년 전이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필라체 거리에 개신교를 믿는 칼라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분위기는 어두웠다. 큰 아들 안토니와 종교 문제 때문에 말다툼을 한 것이었다. 안토니오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힌 게 원인이었다.


“정말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하겠니?”

“죽도록 공부해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데 변호사 자격증을 받을 수 없답니다. 그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습니까?


당시 프랑스 정부는 개신교도, 즉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했다. 그들은 공무원, 변호사, 의사가 될 수 없었다. 안토니오는 법률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툴루즈 시청 관계자는 자격증 발급을 거부했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변호사 자격증을 줄 수 없소.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받을 수 있지요.”


안토니오는 괴로웠다. 그는 독실한 프로테스탄트였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개종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에 부닥치자 그의 마음은 크게 흔들렸다.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인이 되지 못하면 평생 막일이나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종교가 제 앞길을 가로막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안토니오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못이 되는 말을 쏟아냈다. 아들의 개종을 말리던 칼라스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단, 개종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집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안토니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머니는 어깨가 축 처진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안토니오는 한참이 지나도 2층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여보, 안토니오를 다시 불러 설득해보세요. 저 아이도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어요.”


아내는 남편에게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칼라스는 함께 식사를 하던 아들의 친구와 함께 안토니오를 데리러 1층으로 내려갔다. 


“안토니오, 안토니오! 이게 무슨 짓이냐?”


1층으로 내려간 칼라스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깜짝 놀란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은 아래로 달려갔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오가 거실 한쪽 문에 목을 매 자살한 것이었다.


“안토니오! 내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어떻게 이런 일이.”

안토니오의 어머니는 대성통곡했다. 다른 형제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인근 주택에 살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고 창문 너머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칼라스는 서둘러 의사를 불렀다. 그도 프로테스탄트였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의 목숨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의사는 없었다. 


칼라스는 아들의 사망 원인에 대해 의사와 입을 맞췄다. 당시 사회에서는 자살을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으로도 자살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제 아들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랍니다. 이렇게 세상을 떠날 줄은 우리도 몰랐습니다.”


칼라스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툴루즈 시청의 관리가 달려왔다. 그는 혹시 타살의 흔적은 없는지 살폈다. 아무리 둘러봐도 안토니오가 칼에 찔리는 등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사서에 ‘자연사’라고 적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안토니오의 목에 남은 희미한 밧줄 흔적이 보였다. 그는 기록에는 남기지 않았지만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칼라스 가족에게 씻지 못할 슬픔을 안긴 안토니오의 자살은 이렇게 해서 정리가 됐다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안토니오가 자살하고 며칠 뒤 아침이었다.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칼라스 씨, 당신 아들의 죽음과 관련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군요. 우리랑 같이 가셔야 되겠습니다.”


칼라스는 걱정하는 아내와 아들들을 남겨두고 그들을 따라갔다. 경찰서에는 벌써 그의 이웃들이 와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경찰국장은 그를 독방으로 데리고 갔다. 


“칼라스 씨, 당신 아들의 시체에서 이상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목 졸린 자국이 있더군요. 어떻게 된 일이죠?”


칼라스는 더 이상 아들의 자살을 숨길 수 없게 됐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다가는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사실 제 아들은 자살했습니다.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는데 프로테스탄트라서 자격증을 받을 수 없게 됐다며 괴로워했답니다. 개종을 하겠다기에 저와 다투었지요. 그러다 갑자기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목을 맸습니다.”


가톨릭인 경찰국장은 프로테스탄트인 칼라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말을 믿기 어렵군요. 혹시 당신이 아들의 개종을 막으려고 목 졸라 살해한 것이 아니요?”


칼라스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같이 식사를 했던 가족과 안토니오의 친구들이 증인이라고 주장했다. 경찰국장은 그래도 믿지 않았다. 그는 칼라스를 바로 유치장에 가두고는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칼라스는 재판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판사는 경찰국장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라고 했다. 경찰국장은 당시 어디에서나 쓰던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바로 고문이었다. 쇠몽둥이로 칼라스를 흠씬 두들겨 팼고, 코와 입으로 물을 수십 주전자나 쏟아 붓는 물고문도 했다. 그는 죄를 자백하지 않았다. 할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스가 끝까지 자백하지 않은 데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지만 판사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칼라스는 억울하게 교수형을 당해 죽고 말았다. 1762년 3월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칼라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됐다. 그의 가족은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견디다 못한 막내아들은 스위스로 달아났다.


3. 


억울한 사연을 다 들은 볼테르는 곧바로 칼라스의 유족을 찾아갔다. 그의 아내, 아들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벌어졌던 자살 소동을 목격했던 이웃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도 들었다. 당시 볼테르는 모든 프랑스 국민의 존경을 받는 석학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를 싫어하는 가톨릭이면서도 칼라스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안토니오는 자살한 게 맞아요.” 


볼테르는 변호사를 섭외해 본격적인 구원 활동에 나섰다. 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을 다룬 소책자도 발간했다. 그는 많은 귀족에게 편지를 써서 칼라스의 누명을 벗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침묵이 그의 불행을 만든 것입니다.”


칼라스를 돕는 사람은 다름 아닌 볼테르였다. 그의 소식을 들은 프랑스 곳곳에서 기부금이 쇄도했다. 영국, 러시아, 폴란드 국왕도 돈을 보탰다. 파리에서 유명한 변호사들이 달려와 무료 법률 자문을 했다. 


볼테르의 노력 덕분에 3년 만인 1765년 칼라스 사건 상소가 이뤄졌다. 파리의 대법원은 칼라스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가족에게 3만 프랑을 보상하라는 판결도 덧붙여졌다.  당시 볼테르는 70세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토로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당신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볼테르가 억울한 평민들을 도운 첫 사건은 이처럼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그는 이후에도 평민들을 지원하는 일에 매진했다. 


4. 


프랑스대혁명을 주도한 혁명 영웅 미라보 백작이 1791년 세상을 떠났다. 제헌의회는 그를 어디에 묻을지 고민하게 됐다. 


“파리 수호성인 성 주느비에브를 모신 성당을 위인들의 무덤인 팡테옹으로 바꿉시다.”


제헌의회는 그해 4월 4일 미라보 백작을 팡테옹에 묻었다. 성당에 모셨던 성 주느비에브의 유해는 센 강에 던져버렸다. 미라보 백작 장례식을 치른 뒤 제헌의회는 프랑스대혁명의 정신적 지주였던 볼테르를 생각하게 됐다. 혁명 발생 12년 전인 1778년 5월 세상을 떠난 그는 샹파뉴의 한 수도원에 묻혔다. 제헌의회는 그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볼테르는 수많은 저술 활동을 통해 프랑스대혁명의 학술적,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칼라스 사건에서 보여줬듯 귀족, 제도에 억압받는 평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프랑스 최고의 인물입니다. 당연히 팡테옹에 묻혀야 합니다.”


볼테르의 유해 이장 행사는 미라보 백작 장례식이 열리고 한 달 뒤인 5월 30일에 열렸다.  그런데, 미라보 백작의 유해는 3년 뒤 팡테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가 국왕과 작당해 반혁명적인 행동을 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문에 뜻하지 않게 볼테르는 팡테옹에 묻힌 첫 인물이 됐다.


볼테르의 유해는 여전히 팡테옹 지하에 안치돼 있다. 그의 관 앞에는 대리석상이 있다. 직접 쓴 원고와 깃털 펜을 든는 모습이다. 그의 관이 있는 방 옆에는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묻혔다. 볼테르 이후 팡테옹에는 많은 프랑스 위인이 묻혔다.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마리 퀴리, 알렉상더 뒤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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