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o Mar 09. 2024

망나니 샹송과 콩코르드 광장의 기요틴


1.


“사람의 목을 자르는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저는 다른 직업을 갖고 싶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답니다. 저로서는 아쉽지만 그때는 그런 직업이 필요했지요.”


프랑스대혁명 시절 샤를 앙리 샹송이라는 유명한 사형집행인이 있었다. 루이 16세 재위 기간에는 궁정 망나니로 활동했고, 대혁명 기간 중에는 혁명 망나니로 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40년 이상 사형을 집행하면서 루이 16세 등 3천 명 이상의 목을 베었다. 


샹송은 파리에서 샤를 장 밥티스트 샹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마들렌 트론송이었다. 그는 10남매 중에서 장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원래 대대로 사형집행인이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도 망나니였다. 남동생들도 나중에 망나니가 됐다. 


“아버지, 저는 공부를 해서 아버지와는 다른 직업을 갖고 싶어요.”


가문의 악업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샹송은 신분을 속이고 루엔에 있는 수도원 학교에 다녔다. 처음에는 평범한 학생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샹송의 아버지가 망나니라는 사실을 알아내 학교에 알렸다. 그는 결국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장은 샹송을 내보내면서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망나니의 아들은 망나니가 돼야 해.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는 없어.”


샹송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샹송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망나니로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을 고를 방법이 없었다. 그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했다. 


샹송은 음악을 좋아했고 재능도 많았다. 여가 시간에는 바이올린, 바이올론첼로를 연주하거나, 유명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었다. 때로는 오랜 친구인 독일인 악기제조상 토비아스 슈미트를 만나 음악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 지인은 그를 호평하는 이색적인 글을 남겼다.


‘샹송은 잘 생겼고 아는 게 많았다. 지적 능력이 뛰어났고 교육 수준도 높았다. 취미나 습관도 아주 우아했다. 옷도 정말 잘 입어 눈길을 끌었다. 이를 질시한 귀족들은 그에게 부유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푸른색 옷을 못 입게 했다.’


2. 


샹송은 망나니로 일할 때에는 제복을 착용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인 푸른색 반바지와 빨간 재킷을 입었다. 재킷에는 검은색 교수대와 사다리가 수 놓여 있었다. 핑크색 모자를 썼고 허리에는 칼을 찼다. 장식용이나 처형용이 아니라 개인 방어용이었다. 사형 집행 도중에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샹송은 나중에는 의복과 관련해 ‘백지 위임장’을 인정받았다. 이후에는 두 줄로 된 짙은 연두색 프록코트를 입었다. 여기에 하얀색 스카프를 매고 줄무늬가 새겨진 바지를 착용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긴 모자로 덮었다. 그는 은퇴할 무렵 의상 스타일을 다시 바꿨다. 우아한 짧은 재킷과 반바지를 착용했고, 비단 스타킹과 밝은 신발을 신었다. 머리에는 삼각형 모자를 썼다. 칼을 옆구리에 찼다.


샹송은 처음에는 제법 가벼운 도구로 사형을 집행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먼저 칼을 많이 사용하면 날이 상하는데 교체비가 엄청나게 비쌌다. 그 비용은 사형집행인이 부담해야 했다. 게다가 망나니는 조수를 둬야 했는데 인건비를 직접 지불했다. 처형에 필요한 물건도 직접 샀다. 그래서 망나니가 돈을 많이 버는 경우는 드물었다. 


샹송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입을 보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사형수가 목을 잘리는 순간 갖고 있던 모든 소지품을 ‘전리품’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대부분 옷이었지만 가끔 시계, 금반지 등 귀중품도 있었다. 머리카락도 그의 부수입이었다. 목을 자를 때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사형수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는 가발 제조업자에게 머리카락을 팔아 모자란 수입에 보탰다.


샹송은 스위스의 의사인 필리프 마티 쿠르티우스와도 거래했다. 돈을 받고 시신을 넘겨준 것이었다. 쿠르티우스는 의학을 배우는 학생들의 해부용 재료로 시신을 활용했다. 그는 시신을 본뜬 왁스인형을 만든 다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색칠한 미니어처를 제작해 교육용으로 사용했다.


작은 왁스인형은 큰 인기를 얻었다. 쿠르티우스는 이것을 사업에도 활용했다. 유명한 사람이나 악명 높은 사람을 본뜬 왁스인형을 만들어 돈을 받고 관람객들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조카딸인 마리 그로숄츠에게 왁스인형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나중에 ‘마담 투소’로 유명해진다.


3.


1792년 기요틴 박사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처형 기구인 #기요틴 즉 단두대를 개발했다. 시제품 시연회는 그해 4월 17일 비체트레 병원에서 열렸다. 단두대를 작동하는 일을 맡아야 하는 샹송도 그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시연회에서 처음에는 짚더미를 잘랐다. 나중에는 살아있는 양을, 마지막에는 시체를 갖고 실험했다.


“몇 가지 고쳐야할 게 있지만 손쉽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기계이군요.”


여드레 뒤인 4월 25일 국민의회는 기요틴을 반역자에게 사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샹송이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음 목을 자른 사람은 니콜라스 자크 펠리티어라는 강도였다. 그를 사형시키는 데에는 준비과정까지 합쳐 1~2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말 효율적이고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사형 장면을 지켜본 관중의 반응은 달랐다.


“너무 재미가 없잖아. 사람이 죽어가면서 발버둥치는 모습이 얼마나 흥미로운데…. 기요틴을 없애고 다시 종전의 참수대를 설치해.”


기요틴의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져 죄수의 목을 자르면 떨어져 나온 머리는 바로 앞에 있는 바구니로 굴러 들어갔다. 사람들은 끔찍하게도 이것을 ‘가족 소풍 바구니’라고 불렀다. 조수는 잘린 머리를 들어 올려 단두대 앞에 모인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기요틴은 편리하고 효율적인 도구였다. 샹송은 하루에 100명까지 목을 자르기도 했다. 13분 사이에 열두 명의 목을 벨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한꺼번에 40~50명의 사형수가 단두대 앞에 끌려왔다. 그는 1~2분에 한 명씩 참수해 불과 1시간여 만에 일을 마무리했다. 한 역사 기록에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1793년 4월 6일~1795년 7월 29일 사이였다. 프랑스대혁명 공포의 절정기였다. 샹송과 그의 조수들은 어느 때에는 사흘 동안 300명의 목을 잘랐다. 6주 동안 1천300명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 기간 중에 무려 2천831명의 목이 소풍 바구니로 떨어졌다.’


기요틴의 뛰어난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샹송은 싫증을 느끼게 됐다. 일기장에 그런 심정을 남겼다. 


‘끔찍한 하루였다! 기요틴은 희생자 54명을 잡아먹었다. 이탈리아 극장 여배우인 마리아 그랜드메이슨, 하녀인 마리도 그 중 하나였다. 마리는 겨우 열여덟 살이었다. 너무 말라서 열네 살도 안 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다른 망나니 라리비에르의 손을 잡고 조수 데스모레츠를 보면서 울었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죠?’


데스모레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장난이 아닌데.’


라리비에르는 괴로워했다.


‘나는 안 할래. 어린애 목을 자르는 건 너무 잔인해.’


그래서 사형 집행에 차질이 생겼다. 마리가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 누군가 한 명 이상이 나타나서 ‘그녀를 살려주시오. 내가 대신 죽겠소’라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이전에 콩시에르주리에서 마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눈으로 호소했다.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거죠?’


하지만 마리는 죽었다. 오늘 아홉 번째 사형수였다. 그녀가 내 앞을 지나 단두대로 끌려갈 때 귀에서 들리는 환청과 싸워야 했다.


‘샹송, 기요틴을 부숴버려. 더 이상 애들을 죽이지 마.’ 


조수는 마리의 목을 단두대에 밀어 넣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다리는 떨렸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려고 했다. 조수는 나를 보더니 걱정했다.


‘몸이 좋지 않으시군요. 댁에 일찍 들어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처리할 게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집으로 갔다.’


4.


샹송이 처형한 사람 중에 최고위직은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샬럿 코르데이라는 여성도 있었다. 샬럿은 급진적인 자코뱅 지도자인 장 폴 마라를 암살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국민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샬럿의 목이 잘리자 조수 레그로스가 소풍 바구니에 든 그녀의 목을 꺼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졌다. 머리가 빙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포에 질린 그는 미소를 지은 머리를 마구 때렸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레그로스가 샬럿을 너무 싫어해서 죽은 뒤에 분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샹송은 물론 사람들은 그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감옥행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샹송은 1765년 결혼했다. 아들도 둘이나 낳았다. 앙리와 가브리엘이었다. 두 소년도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야 했다.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처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나중에 적당한 나이가 됐을 때 단두대에 올라가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불행히도 가브리엘은 1792년 단두대에서 잘린 목을 들고 가다 핏물에 미끄러져 넘어져 크게 다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나이가 든 샹송은 신장염으로 고생하다 사형집행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정부에 연금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샹송은 아내와 함께 시골로 내려가 정원을 가꾸면서 가난하게 살다 1806년 7월 4일 눈을 남았다. 


샹송은 상 로렌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몽마르트 공동묘지의 가족묘에 묻혔다. 그의 묘에는 아무런 글도 새겨지지 않은 평범한 상석이 놓였다. 심지어 이름도 적히지 않았다. 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이 무덤을 파헤쳐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한참 흘러서야 상석에 이름과 생년월일과 죽은 날짜가 새겨졌다. 


‘상석은 샹송의 아들과 가족이 놓았다. 육체적 사망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그는 왕을 죽여야 했던 일을 슬퍼하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샹송의 다른 아들인 앙리는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아 47년간 사람들의 목을 잘랐다. 나중에는 샹송의 손자인 또 다른 앙리가 할아버지의 일을 상속했다. 그는 샹송 가문에서 마지막 망나니였다. 그가 1847년 죽은 이후 후손들은 더 이상 사형집행인 일을 맡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계몽사상가 볼테르와 파리 팡테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