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1984년 3월이었다. 미국 워싱턴 컨스티튜션 에비뉴에 있는 워싱턴국립박물관 주변에 평소와는 달리 많은 경찰이 배치돼 있었다. 미국을 공식 방문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크 랑 장관, 박물관의 동쪽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야. 전체적인 구성을 보니 나중에 추가로 건설한 모양이군. 누가 이걸 설계했을까? 그 사람에게 루브르 박물관 입구를 맡기면 좋을 것 같군.”
미테랑 대통령은 워싱턴국립박물관의 동쪽 건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다리꼴 모양 부지를 두 개의 삼각형으로 나눠 지은 것이었다. 그는 장관에게 건축가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워싱턴국립박물관 동쪽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당시 60대 중반의 중국계 미국인인 이오밍페이였다. 그는 홍콩에서 태어나 상하이에서 자랐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그는 존 F 케네디 도서관, 댈러스 시청 등의 건축물을 설계해 미국에서는 저명한 스타급 건축가로 이름을 얻었다.
사회당 소속이었던 미테랑 대통령은 당시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파리를 변모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바스티유의 오페라극장, 라데팡스의 그랑다르슈 등이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거기에는 루브르 박물관의 고질적인 문제인 출입구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오밍페이를 직접 만나 루브르 박물관 출입구 건축 사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오밍페이 선생, 잘 아시겠지만 루브르 박물관은 파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입니다. 하지만 출입구가 불편해 관광객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선생께서 이 일을 잘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오밍페이는 미국에서 이미 충분한 경력을 가진 건축가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엄청난 비판에 시달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유리 피라미드를 만들겠습니다. 고대 로마 폼페이 빌라의 안마당인 아트리움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차역이나 국제공항의 중앙 홀을 연상하셔도 됩니다. 가운데로 모인 관광객들은 지하통로를 통해 다양한 목적지로 흩어지도록 할 겁니다.”
이오밍페이는 루브르 박물관 새 출입구 설계안을 발표했다. 마름모 모양 유리 603개와 삼각형 유리 70개, 강철을 사용해 삼각형인 피라미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예상한 높이는 21.6m, 바닥 면적은 1천㎡였다.
이오밍페이의 제안이 나오자마자 프랑스에서는 난리가 나고 말았다. 싸구려 유리로 루브르 박물관과 파리의 이미지를 망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파리의 건축 평론가들은 유리 피라미드를 “피부 깊숙이 박힌 암 세포”라고 질타했다. 프랑스의 일간지 ‘르피가로』’ ‘야만적인’ 건축설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당시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었던 앙드레 쇼바드는 “이오밍페이의 비전이 나타내는 건축학적 위험”에 항의하면서 사임했다. 그가 거리를 걸어가면 파리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분노와 멸시의 시선을 던졌다.
이오밍페이는 프랑스 정부의 여러 관리들과 역사학자들을 만나 회의를 열었다. 그때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건축학적 기술과 미적 감각이 아니라, 아주 고도의 인내력과 유머 감각이었다. ‘프랑스역사유적위원회’를 만난 적도 있었다. 회의는 개막하자마자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 그는 유리 피라미드의 계획과 개념을 설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온갖 비난과 욕설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의 한 역사학자는 회의장에 들어서는 그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이것 봐, 중국인 영감, 여기는 미국 댈러스가 아니란 말이야!”
이오밍페이는 1993년 ‘건축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런 경력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시 문화부장관은 나중에 언론 인터뷰에서 분노를 털어놓았다.
“아이디어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폭력성에 깜짝 놀랐습니다. 프랑스 사회는 극심한 이념 대결을 겪고 있습니다. 이오밍페이의 유리 피라미드가 비판을 받은 것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오밍페이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 파리에서 목격했던 엄청난 멸시와 모욕, 반감을 충격적으로 회고했다.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습니다. 반중국적인 인종차별 분위기마저 느꼈습니다. 유리 피라미드 작업을 끝낸 이후에는 어떤 작업도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오밍페이가 만든 유리 피라미드는 1989년 문을 열었다. 개장을 앞두고 언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파리 시민 가운데 90%가 루브르의 새 출입구를 ‘엉터리’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수많은 건축 전문가는 물론이거니와 루브르 박물관을 보기 위해 파리 여행을 가는 수백만 관광객의 찬사를 받는 건축물이 됐다. 이오밍페이가 이곳을 만들 때 예상했던 연간 루브르 박물관 예상 방문객은 200만 명이었다. 2016년 루브르 박물관 방문객은 900만 명을 넘었다. 무려 4.5배나 많은 숫자지만 새로 만든 출입구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다.
이오밍페이와 함께 2년간 공동 작업에 참여한 프랑스 건축가 장 뤽 마르티네스는 유리 피라미드를 극찬했다.
“이곳은 루브르의 현대적 상징이 됐습니다. 관광객들이 박물관을 방문할 때 가장 좋아하는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사모트라케의 니케 등과 같은 수준의 아이콘이 된 겁니다.”
예술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유리 피라미드를 “엄청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이오밍페이를 맹비난했던 ‘르피가로’는 준공 10주년 기념일에 작성한 기사에서는 “천재성이 돋보이는 부속 건축물”이라고 태도를 바꿨다.
실제로 유리 피라미드는 매우 독특한 구조물이다. 로비는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으로 가득 차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여름에는 에어컨 냉방이 부족해 조금 덥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매우 훌륭한 건축물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