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이즈 공주와 개선문
창밖에는 폭설이 내렸다.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왕궁 주변의 나무들은 무거운 눈 더미에 짓눌려 끄응 하며 신음을 내뱉었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면서 눈이 내리는 날도 잦아졌다.
마리 루이즈 공주는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세상을 온통 하얗게 수놓은 눈을 바라보았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오르면서 따뜻한 불기운을 방안에 퍼뜨렸다. 공주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은은한 로즈마리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그녀는 차를 무척 사랑했다. 특히 로즈마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녀의 이름과 비슷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공주님. 메테르니히 총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즈가 가장 아끼는 시녀 모디나였다. 그녀는 얼굴에 근심을 가득 담은 채 공주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공주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잠시 후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 속도,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소리가 총리임을 알게 해주었다. 그는 언제나 차분하면서 정확한 사람이었다.
“편안하게 쉬고 계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루이즈는 의자에서 일어나 총리 쪽으로 걸어갔다. 총리는 고개를 약간 숙여 예의를 표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어라 딱히 묘사할 만한 표정이라는 게 없었다. 평생을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어떻게 보면 냉혹하다고 할 정도로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공주는 이 사람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을까 생각했다.
“결론은 내려졌나요?”
“예, 방금 합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공주님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와 결혼시키기로 했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저는 주어진 의무가 시키는 일만 소망하기로 했어요.”
“감사합니다.”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의 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가 증조모였고, 프랑스대혁명 도중 참수 당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모할머니였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에 시달렸다. 오스트리아군은 전투할 때마다 프랑스군에게 연전연패했다. 이 와중에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공주와 결혼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된다면 오스트리아는 사돈지간이 되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여 매우 피곤한 상태가 될 터였다. 위기에 몰린 오스트리아가 선택한 방법은 정략결혼이었다. 메테르니히 총리는 나폴레옹과 러시아 공주의 결혼 협상이 늦어진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전격적으로 프랑스에 루이즈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제안을 받아든 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로 등극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는 게 유리하다고 봤다. 또 그는 첫 부인 조세핀과의 사이에 아들을 갖지 못했다. 아직 기반이 약한 프랑스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아들을 빨리 낳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서로 뜻이 맞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여러 차례 협상을 거친 끝에 마침내 1810년 2월 7일 결혼 계약에 합의했다.
루이즈와 나폴레옹의 첫 결혼식은 3월 11일 빈의 아우구스티너 키르헤(아우구스티너 성당)에서 열렸다. 프랑스에 있던 나폴레옹은 참석하지 않았고, 공주의 삼촌인 카를 공작이 옆자리에 섰다. 화려한 결혼식을 마친 그녀는 부모와 눈물의 이별식을 치렀다.
루이즈를 태운 마차는 많은 프랑스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로 향했다. 마차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파리 북동쪽에 있는 코피앵이었다. 나폴레옹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 공주를 기다렸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폴레옹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폴레옹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힘든 여행을 하느라 고생 많았소. 여기서 며칠 쉰 뒤 나와 함께 파리로 가도록 합시다.”
“초상화에서만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미남이시군요.”
“생각보다 미남이라? 하하. 그것 참 기분 좋은 말이오. 공주는 남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이 탁월하시군요.”
두 사람은 4월 1일 파리에서 10㎞ 떨어진 작은 도시 새클루의 새클루 성당에서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이로써 프랑스의 황후가 된 루이즈는 다음날 남편 나폴레옹과 함께 화려한 마차를 타고 파리로 향했다. 황실 기병대가 맨 앞에 서서 길을 안내했고, 무장 군인들이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함께 탄 마차는 다른 마차들과 함께 그 뒤를 이었다. 장군들은 말을 타고 황제 부부가 탄 마차 곁을 호위하며 달렸다.
마차는 샹젤리제 거리 입구에 들어섰다. 황제 부부의 행진을 지켜보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거리를 메웠다. 그곳에서는 건축물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제 막 기초 공사를 마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나폴레옹은 마차 의자 밑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황후, 이것을 좀 보시오.”
“무엇입니까?”
나폴레옹이 상자에서 꺼내 보여준 것은 나무로 만든 아치 모형이었다. 작지만 웅장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이곳에는 개선문을 짓고 있다오. 내가 여러 해 전 오스털리츠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대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요. 이것은 지금 공사 중인 개선문의 모형이지요. 앞으로 전쟁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올 때마다 이곳을 지나 파리로 입성할 생각이오. 개선문은 프랑스의 영원한 영광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될 거요.”
루이즈는 나무 모형을 다시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귀엽게 보이던 게 갑자기 징그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개선문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오스트리아 청년과 형제자녀를 잃은 수많은 가족의 눈물로 건설하는 것이로구나.’
루이즈는 마차의 작은 창밖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에만 해도 맑았던 날씨는 지금은 잔뜩 흐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남편이 살아서는 개선문을 지나 승리의 개선식을 여는 일이 없게 해주세요.’
하늘이 기도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녀를 실은 마차는 루브르 궁전을 향해 천천히 달려갔다.
2. 죽어서 개선한 나폴레옹
1840년 10월 8일. 아프리카 서부쪽 바다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의 숲에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철제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를 향해 걸었다. 앞서 가던 한 사내가 안을 확인한 뒤 뒤따라오던 다른 사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저하, 이곳입니다. 이 외로운 곳에 황제께서 누워 계십니다.”
묘지를 찾은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저하라 불린 이는 루이 필립 왕의 아들인 프랑소아 오를레앙 왕세자였다. 그는 나폴레옹의 유해를 수습해 프랑스로 모셔가기 위해 배 두 척에 수십 명의 정치인, 군인, 학자를 태우고 세인트 헬레나를 방문한 터였다.
나폴레옹은 18년 전 폭풍우가 몹시 불던 1822년 5월 5일 밤, 세인트 헬레나의 롱우드 하우스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파리의 센 강변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를 유배 보낸 영국 정부는 시신 송환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를레앙 왕세자는 모자를 벗고 묘지로 다가갔다. 다른 일행들은 뒤를 천천히 따랐다. 묘지 인근에는 끊임없이 물이 퐁퐁 솟아나는 샘물이 하나 있었다. 그는 샘물에 손을 담가 물을 떠서 마셨다.
“물맛이 좋군.”
“황제께서 생전에 이 샘물을 즐겨 드셨다고 합니다.”
“황제의 정기가 서린 물을 내가 마신 셈이로군.”
왕세자는 묘석 앞에 단정한 자세로 섰다. 다른 일행은 두세 걸음 뒤편에 나란히 섰다. 모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있었다. 왕세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자 일행들도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주변 숲에서 들리는 새 울음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왕세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유해는 15일 자정에 영국군이 발굴해주기로 했소. 로한 샤보 공작이 현장에 가서 발굴 작업을 제대로 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오. 황제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우리가 황제의 유해를 제대로 수습해오기를 기다리는 루이 필리프 전하와 모든 국민의 기대를 유념하도록 하시오.”
오를레앙 왕세자는 일행에게 나폴레옹 유해 발굴 작업 지시를 내린 뒤 배로 돌아갔다. 사실 그는 현장을 직접 지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인트 헬레나의 영국 총독 조지 미들모어는 직접 유해를 발굴해서 프랑스에 전해주겠다고 우겼다. 그는 미들모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오를레앙 왕세자는 그날 밤 프랑스에서 타고 온 배에 앉아 세인트 헬레나 항구를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밝지 않은 것으로 보아 기분이 착잡한 모양이었다. 선실 쪽에서 베르트랑 장군이 술잔을 두 개 들고 걸어왔다. 그는 왕세자에게 하나를 건넸다.
“기분이 착잡하신 모양이군요.”
“솔직히 수치스럽소. 우리가 직접 나폴레옹 황제의 유해를 수습하지도 못하다니 말이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 영국의 비위를 거스르면 황제의 유해를 프랑스로 가져가지 못할 처지니 말입니다.”
“지난 5월 런던에 있던 샤를 레뮈자 대사가 사정사정해서 황제 사후 18년 만에 영국 정부로부터 유해 송환 허가를 받았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영국이 이렇게 수모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소.”
“수치스럽지만 참아야 합니다. 나폴레옹 황제의 유해를 수습해가는 게 전하의 뜻이 아닙니까? 그래야 지금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전하가 어려움을 헤쳐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래야 저하가 나중에 국왕이 되실 수 있습니다.”
“저기 불빛이 보이는군요. 황제의 유해를 담은 관을 가져 오는 모양이오. 관을 배에 싣거든 지체하지 말고 당장 출항을 준비해서 한시라도 빨리 떠나도록 합시다. 세인트 헬레나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오. 황제의 유혼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구려.”
나폴레옹의 관을 실은 라벨풀 호는 사흘 뒤 프랑스를 향해 출항했다. 배가 프랑스의 셰르부르에 당도한 것은 두 달 뒤인 12월 8일이었다. 엿새 후에는 센 강에 도착했다.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의 장례식을 국장 대신 군장(軍葬)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혁명 세력으로 돌변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눼이유 다리에서 출발한 장례 마차의 최종 목적지는 앵발리드였다. 마차의 행진 경로는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정해졌다. 나폴레옹이 생전에 꼭 개선문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거행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서였다. 나폴레옹은 개선문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정작 개선문은 그가 죽은 뒤에 완공됐다. 프랑스 정부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루이즈에게 장례식 참여를 권유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나폴레옹의 시신을 실은 마차는 천천히 개선문을 지나갔다. 개선문 주변은 물론 샹젤리제 거리에는 수많은 파리 시민이 몰려 착잡한 표정으로 황제의 귀환을 지켜봤다. 일부 시민들은 30년 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공주를 전리품처럼 데리고 시내를 행진했던 장면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시신은 앵발리드에 영원히 안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