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의 조상은 누구였을까?(5)

사투르누스와 헤라클레스

by leo


시간이 흐르면서 이탈루스라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 이 땅은 이탈리아라고 불리게 됐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는 그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주 현명하고 훌륭한 왕자였다. 이웃을 말로 설득하거나 무력으로 복종시켜 나폴리 만과 스킬레키움 만 사이의 영토를 지배했다. 이곳이 이탈루스의 이름을 따 이탈리아로 불린 첫 지역이었다. 이탈루스는 처음 이 지역과 다른 여러 곳을 차지한 뒤 이웃나라도 욕심을 냈고, 여러 도시를 복속시켰다.’


안티오코스는 ‘이탈루스는 태생적으로 오이노트리아의 후손이었다’고 설명한다. 레스보스의 헬라니코스는 다르게 설명한다.


‘헤라클레스가 게리온의 소떼를 아르고스로 몰고 이탈리아를 지나올 때 소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 해안 지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소는 사이에 있는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로 헤엄쳐 건너갔다. 헤라클레스는 그 소를 찾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소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스 어를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을 할 줄은 모르던 섬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해 소를 설명했다. 그들은 소를 비툴루스라고 불렀다. 헤라클레스는 나중에 이 일을 기념해 소를 찾으러 돌아다녔던 그 땅을 비툴리아라고 불렀다.’


다른 그리스 지명이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이름이 현재 형태로 바뀐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티오코스의 말처럼 이 지역이 이탈루스의 이름에서 지명을 따 온 것인지, 아니면 헬라니코스의 설명처럼 소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탈리아라는 이름이 헤라클레스 시대 또는 조금 더 이른 시기에 나온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 이전에는 그리스 사람들은 이곳을 헤스페리아, 아우소니아라고 불렀고, 토착민은 사투르니아라고 불렀다.


유피테르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사투르누스가 이 지역의 왕이었고, 그의 통치기에 모든 계절마다 생산이 넘쳐나 모든 사람이 축복받은 삶을 즐겼다는 지역 주민들의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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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설의 우화적 성격을 제외하더라도, 인류가 생겨난 이후 최고의 즐거움을 얻게 된 나라의 장점을 살펴보면, 인류가 땅에서 솟아난 것이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든 간에 인류에게 이 나라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한 크기의 두 나라를 비교할 경우 이탈리아는 최고의 나라다. 유럽에서뿐만 아니라 세계를 통틀어서도 그렇다.


사람들이 이집트, 리비아, 바빌론이나 그밖에 비옥한 나라를 생각하면서 나를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나는 땅에서 솟아나는 부를 한 가지 산물에만 한정짓지는 않는다. 농사짓기에 좋은 땅만 있고 다른 쓸모 있는 재산은 없거나 드문 곳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자급자족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수입품 의존도가 가장 낮은 나라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비옥함과 다양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탈리아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을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농업국가가 흔히 그렇든 나무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산림국가처럼 나무를 키우기 좋은 반면 곡물을 키울 씨를 뿌리기는 좋지 않고 곡물 생산량이 아주 부족한 경우도 있고, 나무와 곡식은 풍부하지만 가축을 키울 목초지는 갖고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 곡식 생산량도 많고 나무도 풍부하며 목초지도 너른 땅이지만 사람이 살기 좋지 않는 지역도 있다. 이탈리아는 즐거움이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것이 흘러넘친다.


강물이 아니라 강우로 적셔지는 농업국가에 여름, 겨울, 가을에 세 차례 추수를 하는 캄파니아의 평원은 무엇을 주는가? 메사피 족과 다우니 족((아드리아해 연안에 살던 아이퓌기의 두 부족)와 사비니 족의 농장은 과연 어느 곳보다 열등한가? 포도 재배에 가장 좋은 토양을 갖고 있어 일손을 덜 들이고도 최고의 포도를 최대한 생산하는 티레니아 인이나 알바 인, 팔레리이 인의 포도밭은 또 어떠한가?


경작에 사용하는 땅 외에 양이나 염소를 위해 목초지로 사용하느라 갈지 않고 남겨 놓은 땅도 흔히 볼 수 있다. 말과 소가 풀을 뜯기에 좋은 땅은 정말 넓고 훌륭하다. 아주 넓은 습지와 목초지의 풀은 물론이거니와 이슬에 젖어 물기가 많은 숲속 빈터의 풀은 여름이나 겨울에 가축이 마음 놓고 풀을 뜯게 함으로써 늘 좋은 몸 유지하게 만들어 준다.


이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멋진 장면은 바위투성이인 산이나 협곡, 농사에 이용하지 않는 언덕에서 자라는 숲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배나 다른 목적의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질 좋은 목재를 풍부하게 공급받는다. 이런 재료들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반도 전체를 따라 흐르는 여러 강 덕분에 땅이 생산하는 모든 물건을 비싸지 않게 수송하거나 교환할 수 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온천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즐거운 목욕의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만성질병에 훌륭한 치료약이 되기도 한다. 각종 종류의 광물이나 사냥할 수 있는 야생동물도 많고, 생선도 풍부하다. 여기에 경이로움을 자아내는 다른 자연의 생산품도 무수하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기후다. 계절마다 아주 온화해서 과도하게 춥거나 덥지 않아 전혀 해를 주지 않으며 곡식이나 과일이 자라기에 적당하고 동물의 몸에도 매우 유익하다.



따라서 고대인이 이 나라를 사투르누스에게 신성하게 바쳐진 곳으로 생각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사투르누스를-그리스 인은 그를 크로노스라고, 로마 인은 사투르누스라고 불렀다-인간에게 모든 행복을 주는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고대인은 이름 그대로 그를 전 우주를 포용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 나라를 보편적인 풍요와 인간이 갈망하는 모든 매력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봤다. 또 이곳을 신은 물론 신에게 잘 어울리는 인간도 가장 살기 좋은 땅이라고 평가했다. 그들은 산과 숲은 판 신에게, 목초지와 초원은 님프에게, 해안과 섬은 바다의 신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곳은 각각 어울리는 신이나 신성한 존재에 바쳤다.


고대인은 사투르누스에게 인신공양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카르타고에도 그런 전통이 있었고 갈리아나 다른 서쪽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런 풍습이 남아 있다. 헤라클레스는 인신공양 풍습을 없애기 위해 사투르누스 언덕에 제단을 만들고 순수한 불길 위에 오염되지 않은 제물을 바치는 희생제례를 처음 거행했다. 이어 사람들이 전통 희생제례를 방기한 데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헤라클레스는 그들에게 신들의 분노를 달래는 방법을 가르쳤다. 손과 다리가 구부러지는 인간을 닮은 인형을 만들어 인간과 똑같은 옷을 입힌 뒤 인간 대신 테베레 강에 던지게 한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미신적 두려움을 제거하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헤라클레스가 만든 인형 던지기 의식을 로마인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매년 3월 춘분에 이 의식을 거행하는데, 이를 이데스라고 부른다. 이 말은 ‘이 달의 한 가운데’라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사제인 제사장 폰티피케스와 신성한 불을 지키는 성처녀인 베스탈, 법무관, 그리고 이날 행사에 참가할 법적 자격을 가진 여러 저명한 시민은 법에 따라 예비 희생물을 바친 뒤 신성한 다리에서 테베레 강으로 사람과 똑같이 만든 인형 30개를 던진다. 이런 행사를 아르게이라고 부른다.


로마 인이 그리스 및 자신들의 방식에 따라 거행하는 희생제례 및 다른 의례와 관련해서 다른 책에서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다. 지금은 헤라클레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한 일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헤라클레스와 관련한 이야기 중에서 일부는 전설이고, 다른 일부는 진실에 가깝다. 그의 도착을 일러주는 전설은 이렇다.


‘헤라클레스는 열두 과업 중에서 게리온의 소떼를 에리테이아에서 아르고스로 몰고 오라는 에우리테우스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을 거쳐 귀향하고 있었다. 그는 원주민의 땅인 팔란티움 근처도 지나게 됐다.


헤라클레스는 그곳에서 소떼에게 먹일 좋은 풀을 발견하고는 잠시 방목했다. 피곤에 지친 그는 풀밭에 드러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그때 그 지역의 도둑인 카쿠스가 우연히 주변을 지나다 지키는 사람 없이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보았다. 그는 소를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뒤늦게 헤라클레스가 풀밭에 누워 자는 모습을 보고는 들키지 않고 소떼를 데려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카쿠스는 소떼 중에서 일부만 골라 꼬리를 잡고 거꾸로 끌어 집으로 삼고 있던 동굴로 데려갔다. 이렇게 하면 그가 도둑질한 증거를 모두 지울 수도 있었다. 소가 끌려간 방향은 흔적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헤라클레스는 소 숫자를 세어보다가 몇 마리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소들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 잠시 당황했다. 그는 소들이 목초지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는 이곳저곳으로 찾으러 다녔다. 한참이나 소들을 찾지 못하던 그는 우연히 동굴 곁을 지나다 소 발자국을 보고는 주변을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쿠스는 문 앞에 서 있었다. 헤라클레스가 소를 본 적이 없냐고 묻자 그는 못 봤다고 발뺌했다. 헤라클레스가 동굴 안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자 카쿠스는 그럴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고 거부했다. 그는 헤라클레스의 무례한 행동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이웃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나머지 소떼를 동굴 근처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동굴 안에 끌려갔던 소들은 동료들의 음메 하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았다. 그들은 반가움에 음메 하고 큰소리로 울어 도둑의 소행을 헤라클레스에게 알렸다.


도둑질을 들킨 카쿠스는 당장 방어 자세를 잡고는 동료 목동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곤봉으로 내리쳐 그를 죽이고는 소들을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악당의 소굴로 악용되기에 좋은 장소라는 사실을 알고는 동굴을 허물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카쿠스는 바위와 흙더미에 묻혀 버렸다.


헤라클레스는 테베레 강에서 살인에 대한 정화의식을 거행한 뒤 유피트레 인벤토르(발견하는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세웠다. 이 제단은 지금도 로마의 포르타 트리게미나 근처에 남아 있다. 그는 소들을 되찾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하는 뜻으로 소 한 마리를 유피테르 신에게 바쳤다. 로마는 이 희생제례를 오늘날까지도 거행하고 있다. 헤라클레스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그리스 방식의 절차를 지키고 있다.


팔란티움에 살던 원주민과 아르카디아 인은 카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헤라클레스를 보게 됐다. 그들은 카쿠스를 없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오랜 동안 카쿠스의 강도질에 시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헤라클레스의 외모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에게서 무엇인가 신성한 기운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은 근처에 지천으로 자라던 올리브 가지를 꺾어 헤라클레스의 머리에 왕관처럼 씌웠다. 왕 에반드로스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헤라클레스를 손님으로 초대했다. 왕은 헤라클레스의 이름과 족보,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그는 물론 그의 나라와 영원히 친구가 되자고 요청했다.


에반드로스는 이미 오래 전에 어머니 테미스로부터 유피테르와 알크메나의 아들인 헤라클레스의 운명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미덕 덕분에 죽어야 하는 운명을 벗고 불멸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다. 왕은 나그네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마자 다른 모든 사람보다 먼저 헤라클레스에게 신의 영예를 선사하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서둘러 제단을 만들고는 멍에를 쓴 적이 없는 소 한 마리를 바쳤다. 그리고 헤라클레스에게 어머니로부터 들은 신탁을 일러주고는 첫 제례에 참가해달라고 부탁했다.


헤라클레스는 에반드로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소 여러 마리와 전리품 중에서 떼어낸 일부를 바친 뒤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축제를 즐겼다. 그는 또 이웃에 있는 리구리아 인과 다른 부족에게 속하는 넓은 영토에서 불법적인 사람들을 쫓아낸 뒤 그 영토를 왕에게 선물했다. 이 영토는 왕이 무척이나 다스리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을 처음 신으로 모신 이 주민들에게 해마다 멍에를 쓴 적이 없는 소 한 마리를 바치고 그리스 방식으로 희생제례를 거행함으로써 지금 베풀어준 영광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봉헌물이 항상 잘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려고 지역의 두 저명한 가문에 희생제례 절차를 가르쳤다.


그리스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두 가문은 포티티이 씨족과 피나리이 씨족이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후 오랫동안 배운 대로 희생제례를 집전했다. 포티티이 씨족은 희생제례를 집전하면서 번제 제물의 첫 부분을 가져갔지만, 피나리이 씨족은 내장을 맛보지 못했고 제례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을 맡았다. 피나리이 씨족은 희생제례가 치러지던 날 아침 일찍 도착하라고 지시를 받았지만 늦게 가는 바람에, 사람들이 내장을 다 먹어 치울 때까지 도착하지 못해 이런 불명예를 영원히 받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두 가문이 이 희생제례를 집전하지 않는다. 대신 공공자금으로 구매한 노예들이 제례를 거행한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됐고, 이런 변화에 대해 신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나중에 역사의 단계가 됐을 때 다시 설명하겠다.


헤라클레스가 헌금을 바친 제단을 오늘날 로마 인은 아라 막시마(대제단)라고 부른다. 이곳은 포룸 보아리움(소 시장) 근처에 있다. 이곳에서는 다른 행사는 거행되지 않는다. 이 제단은 상업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절대 바꿀 수 없는 맹세를 하거나 계약을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맹세나 계약을 한 뒤에는 귀중한 물건을 바치기도 한다. 하지만 건물만 놓고 보면 아라 막시마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탈리의 여러 곳에서 헤라클레스에게 바치는 구역이 설정되고 많은 제단도 건설됐다. 도시에도 세워졌고, 도시를 잇는 도로에도 만들어졌다. 헤라클레스를 모시지 않는 장소를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에 좀 더 가깝고 그의 행동을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인 견해는 이렇다.


헤라클레스는 동시대에 최고의 장군이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대서양 이쪽에 놓여 있는 모든 나라로 진군했다. 그는 시민이나 공동체에게 잔인하고 폭압적이고, 이웃 국가를 분노케 하면서 해를 주고, 야만적으로 사는 무리를 끌어모으고 불법적으로 나그네를 죽이는 독재를 모두 물리쳤다. 그는 대신 합법적인 군주정이나 질서 있는 정부를 세우고 인간적이고 우호적인 삶의 형태를 되살렸다.


더 나아가 서로를 못 믿고 어울리지 않던 야만족과 그리스 인을, 내륙의 거주민과 바닷가에 사는 사람을 융합시켰다. 그는 또한 버려진 지역에 도시를 세우고, 들판에 범람하는 강물의 흐름을 바꾸었고, 접근하기 힘든 산으로 가는 길을 뚫었고 모든 땅과 바다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열리도록 하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다.


헤라클레스는 이어 소떼가 아니라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갔다. 이 지역이 스페인에서 고향인 아르고스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이곳을 거쳐 감으로써 단순히 위대한 명예를 얻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대신 큰 군대의 대장으로서 스페인을 정복한 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복속시키고 다르시기 위해서였다. 수송선단이 부족했고 배를 띄우기에는 날씨가 나빴으며 이탈리아의 모든 부족이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던 탓에 그는 이곳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인구가 많고 매우 호전적이었던 리구리아 인은 다른 야만족과 함께 알프스 산맥 통로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헤라클레스가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것을 무력으로 방해하려고 애썼다. 그곳에서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스 군대는 싸우는 도중에 모든 투척 무기를 쏟아 부어야 했다. 여러 고대 시인 중에서 아이스킬로스가 『프로메테우스 데스모테스』에서 이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프로메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게리온으로 가는 모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예언하고 있다. 특히 리구리아 인과 아주 힘든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 시 내용은 이렇다.


‘당신은 리구리아 인에게서 불굴의 대접을 받게 될 거요

아무리 당신이 용감하더라도 어떤 허점도 찾아내지 못하고

그 싸움에서 당신의 투척 무기는 모두 실패할 게 운명이라오’


헤라클레스가 리구리아 인을 물리치고 알프스 통행로를 확보한 뒤 일부는 자발적으로 도시를 바쳤다. 그리스 출신이거나 무력을 가지지 않은 지역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이 지역의 대부분은 전쟁과 포위 때문에 세력이 무척 약해졌다.


전쟁에서 패한 사람 중에 로마 전설에 나오는 카쿠스가 있었다. 그는 미개인을 다스리던 상당히 야만적인 족장이었다. 그는 스스로 헤라클레스에게 맞섰다. 그는 성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웃에게는 해충 같은 존재였다.


헤라클레스가 평원에 숙영지를 차리고 잠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추종자들에게 산적처럼 꾸미게 한 뒤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그는 숙영지를 포위하고 아무도 지키지 않는 곳에서 많은 전리품을 챙겨 달아났다.


헤라클레스는 나중에 그의 성채를 공격한 뒤 카쿠스를 성채 안에서 살해했다. 성채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헤라클레스를 도와 카쿠스와의 싸움에 나섰던 사람들(이들 중에는 에반드로스, 파우누스를 앞세운 아르카디아 인도 있었다)은 인근 지역의 지배권을 각각 장악했다. 그곳에 남은 그리스 인은 해당 지역을 지키기 위해 남겨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헤라클레스가 에반드로스에게 보여준 여러 가지 조치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으로 정복한 도시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한참동안이나 원정에 데리고 다니면서 전투에서 그를 도와 열정적으로 싸우게 했고, 그들에게 여러 곳에서 얻은 재산을 나눠주거나 정복한 지역에 정착하도록 했다는 사실이었다. 헤라클레스가 이탈리아에서 위대한 명성을 얻은 것은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헤라클레스가 두 여자에게서 낳은 여러 아들을 지금 로마인이 사는 지역에 남겨두었다. 두 아들 중 하나는 에반드로스의 딸 라비니아에게서 얻은 팔라스였고, 다른 하나는 히페르보레아 지역에서 인질로 붙잡은 여자에게서 낳은 라티누스였다. 처음에는 그녀에게 무곤심했지만, 이탈리아를 지나던 도중 사랑에 빠져 아기를 낳았다. 헤라클레스는 아르고스로 떠날 준비를 할 때 그녀에게 원주민의 왕 파우누스와 결혼하라고 했다.


이런 이유로 라티누스는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파우누스의 아들이라고 알려졌던 것이다. 팔라스는 사춘기가 되기도 전에 죽었고, 라티누스는 아버지의 지위에 오른 뒤 원주민의 왕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남자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이웃 부족인 루툴리족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그의 왕국은 안키세스의 아들이자 그의 사위인 아이네아스에게 넘어갔다.’


이탈리아에서 모든 일을 뜻대로 정리하고 함대가 스페인에서 무사히 도착하자 헤라클레스는 여러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함대가 정박한 곳에 그의 이름을 딴 작은 도시(헤르쿨라네움)를 건설했다. 이곳은 지금 로마 인이 차지하고 있으며, 네아폴리스와 폼페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모든 이탈리아 인로부터 온갖 명예와 영광, 신적인 영광까지 얻은 뒤 시칠리아로 항해에 나섰다.


수비대로 뒤에 남아 이탈리아에 살게 된 사람들은 사투르누스 언덕 인근에 자리를 잡아 한동안 독립정부를 꾸리고 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생활 방식과 법률, 종교 의식을 원주민과 아르카디아 인에게 맞춰 바꾼 뒤 그들과 공동 정부를 꾸리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모두 똑같은 민족으로 보이게 됐다. 헤라클레스의 원정과 이탈리아에 남은 펠로폰네소스 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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