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네아스, 이탈리아에 가다(1)

트로이 함락과 아이네아스의 탈출

by leo



헤라클레스가 떠난 이후 두 번째 세대에, 로마인들의 설명에 따르면 약 55년 후에 원주민의 왕은 파우누스의 아들로 통하지만 실제로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인 라티누스였다. 그는 재위 35년째를 맞고 있었다.


함락 당한 트로이에서 달아난 아이네아스와 함께 트로이 인들이 라우렌툼에 상륙했다. 그곳은 티레니아 해를 마주보고 있는 원주민의 영토였다. 테베레 강 하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으로부터 거주할 땅과 그밖에 필요한 것을 지원받은 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언덕에 마을을 세우고는 라비니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마 뒤 트로이 인은 옛 이름을 바꾸고는 원주민과 함께 라틴 인이라고 불리게 됐다. 라티누스 왕의 이름에서 따온 부족명이었다. 그들은 라비니움을 떠나 다른 거주민을 합류시킨 뒤 더 큰 도시를 건설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알바라고 불리게 됐다. 그때부터 그들은 여러 도시를 창건했다. 이른바 라틴 인의 도시였다. 여러 도시 중 상당수에는 오늘날까지도 사람이 살고 있다.


트로이 함락으로부터 열여섯 세대가 지난 뒤 알바 인은 팔란티움과 사투르니아에 식민지단을 보냈다. 펠로폰네소스 인과 아르카디아 인이 첫 정착지를 만들어 살던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당시의 유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알바 인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팔란티움을 성벽으로 에워쌌다. 이때부터 이곳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 도시에는 당시 식민지단 지도자이며 아이네아스의 17대 후손인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는 명칭을 붙였다.



트로이의 함락


아이네아스의 이탈리아 도착과 관련해 일부 역사학자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는 여러 그리스, 로마 작가의 이야기를 비교해서 피상적인 설명 이상을 전하고 싶다.


트로이가 호메로스의 설명대로 목마라는 책략으로 또는 안테노르의 배신으로 아니면 다른 이유로 아카이아 인에 함락됐을 때, 트로이 인과 동맹 도시 시민 대부분은 깜짝 놀랐고 침대에서 살해됐다. 이 비극은 한밤중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대비책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네아스는 물론 그가 다르다노스와 오프리니움에서 일리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데려온 병사들, 또 그리스 병사들이 도시의 아래 지역부터 공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극을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됐던 많은 사람은 모두 페르가무스 성채로 달아났다.


이 성채는 아주 튼튼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에 트로이 인은 조상 대대로 물려온 각종 성스러운 물건과 귀중품을 이곳에 보관해 두었다. 트로이군에서 선발한 최정예 병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아크로폴리스에 거점을 확보하려고 쳐들어온 그리스 병사들을 이곳에서 물리쳤다. 또 트로이의 좁은 골목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시로 기습공격을 감행해 적군을 해치우고 달아날 곳을 찾는 많은 시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포로로 붙잡히지 않고 피할 수 있었다.


아이네아스는 이미 적군의 수중에 들어간 도시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채를 포기하고 달아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민들은 물론 조상 대대로 전해온 성물과 귀중품을 모두 옮기기로 했다. 먼저 여자와 어린이, 노인, 그리고 달아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다른 사람을 이다 산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먼저 성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네아스는 병사들 중에서 일부를 떼어내 이렇게 지시했다.


“피신하는 주민들이 안전하게 큰 어려움 없이 이동할 수 있게 경호하라. 이다 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라.”


아이네아스는 가장 용감한 나머지 병사들과 함께 성채에 남아 적군이 성채 공격에만 신경 쓰게끔 유도했다. 이 덕분에 먼저 나간 사람들이 피신하는 데 큰 위기를 겪지 않게 했다. 그리스 군은 성채를 차지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도시에서 달아나는 사람을 쫓아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네오프톨레무스(아킬레우스의 아들)가 트로이의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하자 그리스 군은 모든 병력을 페르가무스 성채로 투입했다. 아이네아스는 마침내 성채를 떠나기로 했다. 그는 문을 열고 나머지 주민과 병사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게 했다. 가장 좋은 전차에는 아버지와 트로이의 신, 그리고 아내와 아이들을 태웠다. 이밖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전차에 실었다.


그리스 군은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하는 데 정신이 팔려 주민들이 도시에서 달아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고 말았다. 아이네아스와 일행은 주민들을 데리고 이다 산에 집결했다. 일리움에서 이상한 불길이 솟는 것을 보고 무방비 상태이던 트로이를 미리 탈출했던 다르다노스와 그 일행도 아이네아스에 합류했다.


엘리스무스와 아에게트수스는 이미 배를 마련해 벌써 떠난 상태였다. 또 오프리니움 주민 전체와 다른 트로이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아이네아스를 따라 나섰다. 아주 짧은 시간에 아이네아스 일행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트로이 함락을 피해 아이네아스만 바라보고 이다 산에 모인 사람들은 처음에는 적군이 곧 배를 타고 떠나면 곧 귀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리스 군은 도시와 인근 지역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노예로 붙잡은 뒤 성채를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이어 이다 산에 모인 아이네아스 일행을 제거하기 위해 공격에 나설 준비를 했다. 아이네아스는 그리스 군에 사절을 보냈다.


“우리는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그리스 군은 회의를 연 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기로 했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정해진 기간 내에 모든 귀중품을 챙겨 트로이를 떠나야 한다. 이다 산의 성채는 그리스 군에 넘겨준다. 그리스 군은 그리스의 지배권이 미치는 육로 및 해로를 통해 아이네아스 일행이 안전하게 떠날 수 있게 허용한다.”



트로이를 떠나다


아이네아스는 이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다.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그는 큰아들 아스카니오스를 아스키나오스 호수가 있는 다스킬리움 지역에 보냈다. 그는 과거 이 지역을 다스려달라고 지역주민들로부터 초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호수에는 그의 이름이 붙게 됐다.


아스카니오스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헥토르(트로이의 왕자)의 아들 스카만드리오스와 다른 후손이 네오프톨레모스로부터 그리스에서 고향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는 귀향했기 때문이었다. 아스카니오스는 그들을 옛 왕국에 돌려보내기 위해 트로이로 갔다. 아스카니오스와 관련해서는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배가 준비되자 아이네아스는 나머지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여러 신의 형상을 배에 싣고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가장 가까운 반도로 갔다. 당시 그곳은 유럽 바로 앞에 있었으며 팔레네라고 불렸다. 이 지역에는 크루사이아 인으로 불리는 트라키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트로이의 동맹이었으며 트로이 전쟁 때 다른 도시보다 더 열정적으로 트로이를 도왔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아이네아스의 탈출과 관련해서 가장 믿을 만한 설명이다. 헬라니코스는 이 이야기를 『트로이카』에 담고 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여러 학자가 다른 설명을 한다. 하지만 앞의 이야기보다는 개연성이 낮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라오쿤』에서 아이네아스 이야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가 함락되기 직전에 아버지 안키세스의 지시에 따라 가족을 이다 산으로 모두 이주시켰다. 안키세스는 아프로디테의 경고를 기억해내고, 라오콘 가문에 일어난 저주로부터 다가올 도시의 파괴를 추론했던 것이다. 하지만 크산토스의 메네크레트사는 ‘아이네아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에 도시를 배반해 그리스 인에게 넘겼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아킬레스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렇게 이어진다.


‘아카이아 인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군대의 머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느꼈다. 그들은 장례 축제를 거행한 뒤 아이네아스의 도움으로 일리움이 함락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전쟁에 나섰다. 아이네아스는 알렉산드로스부터 망신을 당하고 특혜를 박탈당한 뒤 프리아모스 왕을 전복시켰다. 이런 일을 마무리한 뒤 그는 아카이아 인이 됐다.’

다른 작가들은 다르게 설명한다.


‘아이네아스는 그때 우연히 트로이 배가 정박해 있던 항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아모스는 그에게 군사적 임무를 주어 프리기아로 보냈다.’


아이네아스가 떠난 뒤 일어난 일들은 역사학자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안겨준다. 일부 역사가는 ‘그가 트라키아로 간 뒤 그곳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으로는 게르기스의 케팔론이나 팔레네에 대한 글을 쓴 헤게스피오스를 들 수 있다. 둘 모두 고대에 아주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주장도 있다. 아르카디아의 작가 아리아토스가 내놓은 것이다.


‘아이네아스는 트라키아를 떠나 아르카디아로 갔다. 거기서 오르코메노라는 아르카디아 이름으로 살았다. 그곳은 내륙이었지만 습지나 강변이었기 때문에 ‘섬‘이라는 뜻인 네소스로 불렸다. 아이네아스와 트로이 인은 카피야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 이름은 트로이 인 카피스에게서도 딴 것이었다.’


아이네아스가 아카이아에 왔지만 그곳에서 죽지는 않고 이탈리아로 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다수 있다. 아르카디아의 아가틸로스는 이런 스토리를 비가에 담아 노래했다.


‘아르카디와 네소스에 온 뒤

안테모네와 코도네와의 사랑의 결과물인 두 딸을 남겼다

헤스페리아 땅에 서둘러 간 뒤

그곳에서 남자 후손을 얻었다

이름하여 로물루스였다’


많은 로마인은 아이네아스와 트로이 인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희생제례와 축제에서 거행하는 여러 의례, 시빌 예언서, 피티안 신탁, 그리고 많은 일에 그 증거가 남아 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것들을 역사를 꾸미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이네아스 일행이 상륙한 여러 해안에는 오늘날까지 아주 눈에 띄는 기념물이 많아 남아 있다. 그 증거는 수없이 많지만 간단히 몇 개만 설명하겠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먼저 트라키아에 갔다. 그들은 팔레네로 불리는 반도에 상륙했다. 그곳에는 크루사이아 인으로 불리는 야만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네아스 일행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여러 장소 중에서 한 곳에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과 아이네이아라는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했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너무 지쳐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는 사람이나 자발적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이 도시에 남겨두기로 했다. 잔류하기로 한 이들은 이 도시를 모국처럼 생각했다. 아이네이아는 알렉산드로스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시대까지 존재했지만 카산드로스 왕 시절에 파괴돼 버렸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새로 건설한 테살로니카로 이주했다.


팔레네에서 항해에 나선 트로이 인은 아니오스가 왕으로 있던 델로스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아이네아스 일행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다시 펠로폰네소스 인근에 있는 키테라 섬으로 갔다. 이곳에도 역시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다.


아이네아스 일행이 키테라에서 출항해 펠로폰네소스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을 항해하고 있을 때 아이네아스의 동료 중 한 명인 키나이토스가 숨을 거뒀다. 키나이토스는 인근의 곶에 묻혔다. 지금 이곳은 키나이티온이라고 불린다. 일행은 아르카디아 인과 친분 관계를 새롭게 다진 뒤 한동안 아르카디아에 머물렀다.


그들은 일부 사람을 그곳에 남겨둔 뒤 다시 자킨토스 섬으로 갔다. 자킨토스 사람들은 친척 관계라는 이유로 아이네아스 일행을 아주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인 엘렉트라에게는 아들 다르다노스가 있었다. 그는 바테이아와의 사이에 두 아들, 자킨토스와 에리크토니오스를 두었다. 자킨토스는 자킨토스 섬의 첫 거주민이었다. 에리크토니오스는 아이네아스의 조상이었다.


섬 주민들은 이런 친척관계를 기억한데다 원래 친절했던 사람들이었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섬에 한 동안 머물 수 있었다. 게다가 험한 날씨가 그들의 발걸음을 더 묶어 두었다. 그들은 이곳에도 아프로디테에게 신전을 지어 바친 뒤 희생물을 바쳤다.


오늘날에도 자킨토스 섬 주민들은 이 희생제례를 엄숙하게 거행한다. 또 젊은이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데, 달리기 같은 종목으로 구성돼 있다. 아프로디테 신전까지 가장 먼저 달리는 선수에게는 상을 준다. 이 신전에는 나무로 만든 아이네아스와 아프로디테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자킨토스 섬을 떠나 망망대해를 한참 항해한 끝에 아르카디아 인이 점유하고 있던 이오니아 해의 로이카스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 아프로디테 신전을 건설했다. 이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아프로디테 아이네이아스 신전이라고 불린다.


섬을 떠난 일행은 이번에는 악티움으로 갔고, 암브라키아 만의 한 곶에 닻을 내렸다. 그들은 헤라클레스의 아들인 데카메노스의 아들 암브락스가 다스리는 도시인 암브라키아로 갔다. 그곳의 두 장소에는 아이네아스 일행이 왔음을 알려주는 유물이 아직 남아 있다.


악티움에는 아프로디테 아이네아스 신전이, 근처에는 위대한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이 세워졌다. 두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작은 극장 근처에는 아프로디테 신전과 아이네이아스 영웅 성소가 건설됐다. 이 성소에는 작은 나무 조각이 하나 있는데 아이네아스를 새긴 조각이라고 알려져 있다. ‘시녀’라는 뜻인 여사제 암피폴로이가 희생제례 때 바친 것이라고 한다.


안키세스는 암브라키아에서 출발해 해안을 따라 항해한 뒤 에피로스의 항구인 부트로툼에 도착했다. 그 사이 아이네아스는 가장 용감한 병사들을 데리고 이틀 동안 행진에 나서 도도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신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헬레노스(트로이의 왕자이자 예언자)와 함께 다니던 다른 트로이 일행을 만났다. 그는 식민지 이야기를 듣고 청동으로 만든 막사발 등 다양한 트로이 물건을 아폴로 신에게 바쳤다. 이 봉헌물 중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다. 거기에 새겨진 아주 오래된 명문은 누가 이것을 바쳤는지를 알려준다.


아이네아스는 발걸음을 돌려 총 나흘간 행진해 선단으로 돌아왔다. 부트로툼에 트로이 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곳에 있는 언덕이 아직도 트로이 언덕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트로이 인들은 이 언덕에서 거주지를 마련하고 살았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부트로툼에서 다시 해안을 따라 항해에 나서 안키세스의 항구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했다. 지금은 덜 중요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이곳에도 아프로디테 신전을 건설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트라키아 인 파트론과 그의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이오니아 해를 건넜다. 아이네아스 일행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뒤 파트론의 부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파트론과 일부 부하는 아이네아스에 매료돼 원정대에 남기로 했다.


일부 역사학자에 따르면 아이네아스 일행은 시칠리아의 알룬티움에 도착했다. 나중에 로마 인은 이런 여정을 기념하기 위해 코린트로부터 빼앗은 로이카스와 아낙토리움(암브라키아 만 인근의 도시)을 아카르나니아 인에게 선물했다. 아카르나니아 인이 오에니아다이 인을 고향에 돌려보내려고 했을 때 로마는 그렇게 하라고 허가했다. 또한 에키나데스 군도의 생산품을 아이톨리아 인과 함께 나눠 즐기게 했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같은 장소에 도착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배는 이아피기아 곶에 닻을 내리게 됐다. 살렌티노 곶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나머지 배는 미네르바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지은 곳에 닿았다.


아이네아스는 가장 먼저 낯선 땅에 발을 내디뎠다. 이곳은 여름에는 항구로 활용되는 곶이다. 그때부터 베누스의 항구로 불려 왔다. 아이네아스 일행은 해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해 해협까지 진출했다. 오른쪽에는 이탈리아가 있었다. 그들은 여러 곳에 도착의 흔적을 남겼다. 그 중에는 유노 신전에 있는 청동 술그릇이 있다. 이 그릇에는 옛 명문이 새겨져 있다. 유노 여신에게 그릇을 바친 사람이 아이네아스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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