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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13. 2024

바스티유 광장에 낯선 바람이 스치거든


프랑스대혁명 무렵 파리에 장 다잔빌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당시의 대부분 귀족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에게 친절하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었다. 부모의 엄청난 부를 활용해 바스티유 지역에 사는 가난한 어린이를 학교에 보내주거나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장은 매일 빈민가인 바스티유 지역을 찾아갔다. 배고픈 어린이에게는 먹을 것을, 헐벗은 어린이에게는 옷을 주었다.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어린이에게는 학비를 보태주고, 갓난아기에게는 인형이나 장난감을 선물했다.


장은 피에르와 마리라는 두 부랑아 남매도 도와주었다. 피에르와 마리의 어머니는 병에 걸렸지만, 돈이 없어 의사를 부를 수 없어 곧 죽을 처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은 두 아이에게 돈을 줘 의사를 부르고 약을 사게 했다. 매일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두 아이는 이후 장을 형,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녔다. 그들은 장을 정말 사랑하게 됐고, 매일 그를 만나는 시간을 기다리게 됐다.


 어느 날 장의 아버지는 아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를 알게 됐다. 장은 아버지에게 활동을 숨겼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하인 중 한 명이 주인에게 일러바친 것이었다.


“주인 어르신, 작은 나리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아시는지요? 어르신이 벌어온 돈을 바스티유 감옥 근처에 사는 부랑인들에게 줄 음식과 옷을 사는 데 다 탕진하고 있답니다요.”

아버지는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아들을 방에 가둬 버렸다. 하인들에게는 아들이 몰래 못 나가게 잘 지키라고 지시했다.


“다시는 바스티유에 가지 말거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너를 집에서 쫓아내고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


장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바스티유에서 기다리고 있을 피에르, 마리는 물론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바스티유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갑자기 모습을 감춘 장을 그리워하게 됐다. 왜 그가 나타나지 않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장은 한 달 가까이 집에 갇혀 있었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바스티유에 가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하인들이 바쁜 일을 하느라 잠시 문 앞에서 사라진 틈을 타 그는 결국 집을 빠져나갔다.


장은 파리 시내에서 심상치 않은 폭동의 기운이 감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귀족 복장을 하고 다니다가는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낡은 코트를 입고, 큰 후드 모자가 달린 아주 더러운 망토를 둘러 가난한 서민으로 변장한 채 바스티유로 갔다.


“피에르, 마리! 다들 잘 있었니? 내가 돌아왔단다. 너희를 다시 보니 정말 반갑구나.”


장은 아이들에게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의 머리가 큰 후드에 덮인 탓에 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장은 후드와 망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환한 미소를 피에르, 마리 등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장이다, 장이 돌아왔다. 사랑하는 장 아저씨가 우리들에게 다시 돌아왔어!”


바스티유의 아이들은 다시 돌아온 ‘우리의 친구’를 반갑게 맞이했다. 장과 아이들은 서로 껴안기도 하고, 뺨에 입을 맞추기도 하면서 한 달여 만의 재회를 매우 기뻐했다.


장이 바스티유에 다시 돌아간 날은 1789년 7월 14일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당해 프랑스대혁명의 횃불이 밝혀진 날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혁명세력은 감옥을 지키던 군인들을 모두 죽이고 갇혔던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바스티유를 부수기 시작했다.


“세상을 뒤집어라. 우리도 사람이다. 복수는 우리의 것이다.”


파리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국민 대다수는 빈곤에 찌들어 굶어죽어 가는데 귀족은 호화스러운 생활을 즐기면서 온갖 특혜를 다 누리는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한 사람들의 봉기였다. 죽창을 든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학살했다.


“저기 젊은 귀족 놈이 하나 있다. 저 놈도 잡아라!”


폭도 중 한 명이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장을 발견했다. 다른 폭도들이 달려와 그를 붙잡았다. 그들은 양쪽에서 장의 팔을 붙잡고 두 다리를 들어 꼼짝 못하게 한 뒤 끌고 갔다.


“안 돼요. 이 분은 귀족이지만 정말 착한 분이에요. 바스티유에 사는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과 약을 나눠주신 훌륭한 분이에요. 이 분을 잡아가면 안 돼요.”


피에르와 마리, 다른 아이들은 울부짖으며 장을 끌고 가는 폭도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분노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들의 눈에 아이들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귀족을 모두 죽이라’라고 속삭이는 악마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귀에 아이들의 호소는 들리지 않았다.   


혁명세력은 귀족들을 심판하기 위해 임시 재판소를 세웠다. 장도 재판정에 섰다. 그는 상황을 설명할 기회도 받지 못한 채 불과 10분 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장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사형선고를 내려야 할 귀족 수가 너무 많아 한 사람당 10분 이상 재판을 끌 시간적 여유가 도저히 없었던 것이었다. 피에르, 마리 등 바스티유의 어린이들이 재판소에 몰려가 “장 아저씨는 좋은 분”이라며 울부짖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은 다음날 콩코르드 광장 한복판에서 목을 잘릴 처지가 됐다. 피에르와 마리는 그날 밤 콩시에르주리에 갇힌 장을 만나러 갔다. 원래 궁전이었던 콩시에르주리는 프랑스대혁명 때에는 단두대에 설 사형수 등을 가둬두는 감옥으로 사용됐다.


“장 아저씨, 우리예요. 피에르와 마리!”


장은 채 반 평도 되지 않는 좁고 더러운 지하 감방에 갇혔다. 두 아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쇠창살 사이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에 망연자실했던 장은 반가운 목소리를 듣고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얼굴에서 슬픔과 반가움이 반반씩 담긴 미소가 피어났다.


“피에르, 마리! 너희들이 왔구나. 여기 오면 위험하니 내일부터는 오지 말도록 해라. 참, 어차피 내일이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 너희들이 올 일도 없겠구나. 허허.”


“아저씨, 우리는 아저씨를 사랑해요. 제발 다시는 우리 곁을 떠나지 마세요. 어떻게 해서든 아저씨가 풀려날 수 있도록 할게요.”


“얘들아, 울지 말거라. 내가 없더라도 너희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살아야 해. 나는 언제나 너희가슴에 함께 있을 거야. 너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언제든 바스티유로 돌아가도록 할게.”


장은 쇠창살 사이로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뺨을 어루만진 뒤 작별의 키스를 건넸다. 그의 두 눈에서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눈물이 쏟아졌다. 다음날 아침 장은 콩코르드 광장에 끌려가 도부수의 칼에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짧은 인생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프랑스대혁명이 끝나고 여러 해가 흘렀다. 피에르와 마리는 어른이 됐다. 그들은 장처럼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사회봉사자로 일했다. 둘은 해마다 장의 목이 잘린 날이면 바스티유로 갔다. ‘내 이름을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게’라던 장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었다.


“장 아저씨, 피에르와 마리가 왔어요. 어디 계세요?”


두 사람이 장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낯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천천히 둘의 주변을 휘감아 돌았다. 그리고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두 보석이 왔구나! 너희가 정말 자랑스럽다. 너희는 정말 고귀한 심장을 가진 아이들이야.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거야. 천국에서 매일 즐거운 날을 보낼 거야. 사랑하는 아이들아, 안녕~~!’


이제 바스티유 감옥은 사라졌다. 프랑스 파리에서 대혁명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해도 감옥을 볼 수는 없다. 흔적은 지하철 바스티유 역과 인근에 남아 있는 감옥의 초석뿐이다. 이곳에 바스티유 감옥이 있었다는 증표는 바스티유 광장 가운데의 기념비가 전부다.


나중에 바스티유 역과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 간다면 잠시 두 눈을 감고 장의 이름을 불러보라. 혹시 모른다. 낯선 바람이 여러분의 주변의 휘감아 돌면서 이렇게 대답할지도.


‘나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위해 언제나 여기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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