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방문할 관람객이 5천만 명에 이를 걸로 보입니다. 이들을 실어 나를 새 기차역을 만들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프랑스 정부는 4월 14일~11월 12일 만국박람회 기간 중에 국내외 방문객이 5천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서 방문객을 실어 나를 기차 운행 횟수를 늘리기로 하고 새로운 기차역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만국박람회 장소 가까운 곳에 역을 만들어 관람객들이 손쉽게 행사장에 갈 수 있게 하자는 뜻이었다.
새 기차역 건설 부지로 선택된 곳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센강 건너편 오르세 궁전이 있던 콰이 오르세 지역이었다. 18세기 초 이 지역에서 개발이 시작될 때 자문 역할을 한 사람이 파리 남서쪽 오르세 출신의 상인이었던 오르세 경이었기 때문에 그이름을 행정구역명에 붙인 것이었다.
나폴레옹 황제의 지시에 따라 1838년에 완공된 오르세 궁전은 원래 대법원 감사위원회와 국가위원회 사무실로 이용됐다. 그런데 1871년 이른바 ‘파리 코뮌’ 병사들의 방화 때문에 완전히 소실돼 버렸다. 프랑스 정부가 이곳을 새 기차역 건설 부지로 골랐을 때에는 잡초만 우거진 공터였다.
프랑스 정부는 오르세역을 설계할 건축가를 세 명 골랐다. 뤼시엥 마니, 에밀 베나르, 빅터 랄루였다. 오르세역 공사의 첫 삽은 1898년에 떴다. 완공일은 만국박람회가 진행 중이던 1900년 5월 28일이었다. 당초 예정보다 조금 늦었지만, 불과 2년 만에 역 하나를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이뤄진 것이었다.
오르세역의 길이는 175m, 폭은 75m에 이르렀다. 중앙 홀은 길이 140m, 폭 40m, 높이 32m였다. 오르세역을 짓는 데에는 에펠탑보다 더 많은 철근 12t이 사용됐다. 유리는 3만 5천㎥가 들어갔다. 이렇게 많은 유리를 쓴 것은 역 내부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오르세역은 완공하자마자 폭발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사상 최초의 전기 기차역이었고, 기차역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설계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역을 일부러 찾아간 에두아르드 데타이유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역을 보고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야! 정말 대단한 걸! 기차역보다는 미술관으로 바꾸는 게 더 낫겠어!”
반면 오르세역은 100% 철근 구조물이어서 일부에서는 외관이 흉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건축 총책임자였던 랄루는 이러한 비판을 감안해 역 앞에 호텔을 지어 역을 가리기로 했다. 그는 역 남서쪽에 객실 370실 규모의 호텔을 건설했다. 호텔은 파리를 찾는 국내외 여행객은 물론 각종 행사에 참가하는 지역 주민, 정치인에게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호텔 인기는 시들었고 결국 1973년 문을 닫고 말았다.
오르세역이 개장할 때만 하더라도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큰 건물을 지을 때 벽에 대형시계를 설치하는 게 유행이었다. 당연히 오르세역에도 대형시계가 설치됐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세 개였다. 두 개는 북쪽 외벽에 설치됐다. 하나는 센강을, 다른 하나는 튈르리 정원을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마지막 하나는 역 안에 설치됐다. 시계 3개는 오르세역이 우여곡절을 겪는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도 째각거리고 있다.
오르세역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기차 운행을 잠시 중단했다. 대신 이곳은 전쟁포로에게 보내는 우편물을 다루는 우편집중국 역할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귀환포로가 갈 곳이 없어 애를 먹자 정부는 오르세역을 이들의 임시숙소로 사용됐다. 오르세역 한쪽에는 이곳이 귀환포로 임시숙소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있다.
오르세역이 들어서고 40년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었다. 역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철도 기술의 급격한 발전 때문이었다. 역 플랫폼이 첨단기술을 갖춘 철도를 운행하기에는 너무 짧은 게 문제였다.
“오르세역은 기차역으로서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역 플랫폼 구간이 너무 짧은 데다 시설도 낡아 쓸모가 없습니다. 철거해서 다른 공간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파리 시청은 결국 오르세역의 기차역 역할을 중단시키기로 했다. 시청은 오르세역을 어떻게 재활용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제안이 접수됐다. 주차장으로 사용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사격장으로 활용하자는 이도 나왔다. 극장으로 탈바꿈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시청은 오랜 논의 끝에 1970년 최종 결론을 내렸다.
“역을 부숴 없애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이곳에 초대형 호텔을 짓겠습니다.”
파리 시청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자크 뒤아멜 문화부 장관이었다.
“오르세역은 귀중한 자산입니다. 정부의 역사적 기념물 예비리스트에 올려 보존해야 합니다. 다른 활용 방안을 찾도록 합시다.”
사실 뒤아멜 장관도 오르세역을 어떻게 재활용할지 방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역을 호텔로 바꿀지 말지를 놓고 파리 시청과 뒤아멜 장관은 물론 모든 프랑스 국민이 편을 갈라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때 오르세역의 운명을 바꿀 일이 생겼다. 뒤아멜 장관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일이었다. 루브르박물관, 퐁피두센터, 주드폼국립미술관 등이 넘쳐나는 전시품과 협소한 공간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소식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를 감안해 최종 결론을 내렸다.
“세 박물관, 미술관에 보관한 19세기 후반 예술작품들을 전시할 새 박물관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르세역을 철거하지 않고 리모델링해 새 박물관으로 활용하겠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978년 오르세역 리모델링 공모전을 열었다. 6개 업체에서 제안서를 냈는데, ACT 아키텍처라는 곳에서 낸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르노 바르동 등 젊은 건축가 3명이 공동 운영하는 회사였다. 공사는 이듬해 시작됐다.
1981년에는 이탈리아의 가에 아울렌티가 실내 장식, 가구 배치 등을 담당할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그녀의 작업은 프랑스에서 부정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마치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은 ‘오르세미술관은 장례식장, 무덤, 영묘, 공동묘지에 비유할 수 있다’고 힐난했다. 각종 건축물 건설 공사 때마다 비난을 쏟아붇는 것은 프랑스 언론과 문화계의 관행이었다.
여러 논란 속에 오르세미술관 리모델링 공사는 1986년 6월 마무리됐다. 개장식 날짜는 12월로 확정됐다. 남은 시간은 불과 여섯 달이었다. 다른 박물관, 미술관에서 인수받아 설치해야 할 작품은 그림, 조각 등 무려 2천500여 점이었다. 곳곳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전 작업에 필요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6개월 만에 모든 작업은 제대로 정리됐다. 오르세미술관 개장식은 당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예정대로 12월 1일에 열렸다. 모두 이색적으로 아름다운 새 미술관을 보고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오르세미술관이 대중에게 개방된 것은 그로부터 8일 뒤인 12월 6일이었다. 이날 새 미술관을 보러 몰린 사람은 무려 2만 명에 이르렀다.
오르세미술관은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그림을 많이 보유한 곳으로 유명하다. 각각 500점, 1100점이나 된다. 유명한 화가를 나열해 보면 모네, 르누아르, 고흐, 고갱, 쿠르베, 세잔, 피사로, 마네 등이다. 그래서 이곳은 ‘인상주의 박물관’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오르세미술관 주변에서는 구리로 만든 조각 6개를 볼 수 있다. 지구의 6대륙인 유럽, 아시아, 남미, 북미, 대양주,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조각이다. 원래 1878년에 열렸던 파리만국박람회 기간 중 트로카데로 궁전에 설치하려고 만든 것이었는데 행사가 끝난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고 말았다. 조각은 낭트에 폐기되다시피 내버려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르세미술관은 조각 6개를 구해오기로 결정했다. 미술관은 그림 한 점을 주는 대신 조각 6개를 받아왔다. 물론 결과는 오르세미술관의 ‘흑자’로 귀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