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지역기차를 타고 27㎞ 정도 달리면 인구 8천여 명의 소도시 오베르 쉬르 와즈에 닿는다. 역에 내리면 ‘정말 아담하고 차분한 동네구나’라는 느낌이 미풍처럼 뺨을 스친다. 역 앞 거리에 빵집과 슈퍼마켓, 식당이 몇 개 있지만 사람이 사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산한 동네다.
오베르 쉬르 와즈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여러 미술가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9세기에 예술가들이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폴 세잔, 샤를 프랑소아 도비니, 카밀리 피사로, 장-밥티스트-카밀 코로, 빈센트 반 고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중 오베르 쉬르 와즈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고흐이다.
1890년, 병을 앓고 있던 고흐는 의사 폴 가셰 박사가 살고 있던 오베르 쉬르 와즈로 이사했다. 피사로가 고흐에게 가셰 박사를 소개했다고 한다. 아마추어 미술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는 다른 미술가도 여러 명 치료한 의사였다.
고흐는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구스타프 라부가 운영하는 라부 여관에 묵었다. 한 달에 3프랑 50센트를 주기로 하고 두 평짜리 다락방을 빌렸다. 한 평 크기의 다락방엔 햇빛조차 몸을 비비꼬아야 겨우 들어올 수 있을 만큼 작은 창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지금도 벽 한쪽에는 ‘언젠가 나도 카페에서 개인 전시회를 열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고흐의 편지가 붙어 있다.
고흐는 이곳에서 죽기 전까지 70일 동안 살았다. 그는 하숙집 앞의 시청건물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아드렌느, 가셰 박사, 가셰의 정원 등을 소재로 70여 점에 이르는 그림과 비슷한 숫자의 드로잉을 그렸다.
고흐는 처음에는 오베르에서의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해보다 훨씬 조용하고 편안해요. 머릿속의 불안감도 상당히 가라 앉았구요’라고 적었다.
가셰 박사에게서는 처음에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가셰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나보다 더 아픈 것처럼 보여. 마치 맹인이 다른 맹인을 인도하다가 같이 구덩이에 빠지는 꼴이 될지도 몰라’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흐는 가셰 박사와 친해졌다. 그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 내용에 이런 게 있다. ‘가셰 박사는 제게 동정심을 많이 보여줘요. 원하면 언제든 그의 집을 찾아갈 수 있어요. 그는 아내를 잃은 뒤로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죠. 자식들로는 19세 딸과 16세 아들이 있어요.’
고흐는 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적었다. ‘내일 아침에 그림을 그리러 가셰의 집에 갈 거야. 그리고 같이 식사를 같이 할 예정이야. 나중에 그림을 보러 내 방에 오기로 했지. 내가 나의 그림에 실망하는 것처럼 그는 시골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실망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 직업을 한 번 바꿔보자고.’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그중 가셰 박사가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닥터 가셰의 초상화’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고흐와 테오가 세상을 떠난 이후인 1898년 테오의 부인은 300프랑을 받고 그림을 팔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건너간 ‘닥터 가셰의 초상화’는 1990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매물로 나왔다. 이때 한 일본인이 8250만 달러(약 820여 억 원)에 그림을 샀는데, 수년 뒤 영국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9천만 달러에 매입했다.
고흐의 건강은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도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는 1890년 5월 21일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내가 병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지금도 방금 전부터 통증에 시달리고 있어’라고 적었다. 7월 10일 편지에서는 ‘좋은 기분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러나 내 인생은 뿌리부터 위협받고 있는 것 같아. 발걸음은 너무 불안해’라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고흐가 아팠던 원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했다. 의사 150명 이상이 그의 질병의 뿌리를 찾기 위해 연이어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이 내놓은 진단은 대략 30가지였다. 정신분열병, 조울증, 매독, 물감 중독, 간질, 포르필린증 등이 그것이었다. 포르필린증은 피부가 빛에 민감해지고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혈액병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여기에다 영양결핍, 과로, 불면, 알코올 중독 등이 겹쳤을 것으로 봤다.
고흐는 1890년 7월 27일 권총자살을 시도했다. 장소는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림을 그렸던 밀밭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마구간이라 말하기도 한다. 총알은 심장을 관통하지 못하고 갈비뼈를 맞고 튕겨 위장에 박히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았다.
고흐는 그날 아침 식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대개 오후 해질 무렵이면 집에 돌아왔지만 이날은 제때 귀가하지 않았다. 그는 오후 9시께 비 맞은 망아지마냥 초라한 행색으로 돌아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라부의 딸 아들렌 라부가 봤다. 아들렌은 고흐의 그때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흐 씨는 허리를 굽힌 채 걸어 들어왔어요. 배를 부여잡고 있었죠. 홀을 가로질러 계단을 통해 방으로 올라가더군요. 저는 너무 놀라 아버지를 깨웠어요. 고흐 씨가 이상하니 한 번 가보라고 말씀드렸답니다. 아버지는 신음소리가 들린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빨리 위로 올라가셨어요. 고흐 씨는 턱을 무릎에 댄 채 침대에 앉아 계셨어요. 아버지는 ‘무슨 일이냐, 어디 아프냐’고 물었죠. 고흐 씨는 셔츠를 걷어 올리더니 심장 부근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보여주더군요. 아버지는 ‘오, 불쌍한 사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라고 울부짖으셨어요. 고흐 씨는 ‘자살을 시도했다’라고 말했답니다.”
곧바로 의사 두 명이 차례로 와서 고흐를 진찰했지만, 그들은 수술을 해서 총알을 빼낼 실력이 없었다. 그래서 제대로 치료도 않고 고흐를 내버려둔 채 그냥 가버렸다.
이튿날 고흐의 자살 기도 소식을 들은 경찰관 두 명이 라부 여관에 찾아왔다. 그들은 아주 거칠게 고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자 고흐는 화를 냈다. “내 몸은 내 것이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권리가 있소. 누구도 비난하지 마시오. 자살하려고 한 것은 바로 나니까.”
자살 기도 소식을 들은 동생 테오도 달려왔다. 그가 도착한 직후 잠시 동안 고흐의 상태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그러나 곧바로 상황이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틀 뒤 고흐는 결국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총에 맞은 지 29시간 뒤였다. 테오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슬픔은 영원하리라’였어’라고 전했다.
고흐는 다음날 오베르 쉬르 와즈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장례식에는 테오 외에 고흐의 친구, 동료화가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장례 미사는 별도로 진행되지 않았다. 목사가 자살을 이유로 장례 미사 집전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은 노란 꽃으로 덮였다. 장례식에 참가했던 한 지인은 고흐의 관을 해바라기라고 묘사했다. ‘노란 해바라기, 노란 다알리아, 그리고 다른 모든 노란 꽃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그가 가장 좋아했던 색이죠.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예술 작품에도 깃들어 있기를, 그렇게 바랐던 색이랍니다.’
고흐의 죽음과 관련해서 2011년 새로운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스티븐 나이프,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가 쓴 <반 고흐, 인생>이라는 전기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그들은 20년 전 <잭슨 폴락, 미국의 영웅>이라는 책을 써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들이었다.
두 사람은 책에서 ‘고흐는 자살하지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두 소년과 술을 마시다 그들이 갖고 있던 고장 난 총이 오작동하는 바람에 사고로 총알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 ‘고흐는 두 소년이 자신에게 죽음을 선물했다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찾아온 경찰관들에게 ‘누구도 비난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들이 고흐의 자살에 대해 책을 쓴 것은 ‘총으로 자살을 시도해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1㎞ 이상을 걸어 숙소로 돌아갔을까’라는 의문이 동기였다고 한다. 이 책을 바탕으로 미국 CBS 방송의 ‘60분’이라는 프로그램도 고흐의 자살 의혹을 다뤘다.
2009년에는 독일 역사학자 한스 카우프만, 리타 발데간스가 <반 고흐의 귀, 폴 고갱과 침묵의 동의>라는 책에서 ‘고흐는 1888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의 귀를 자른 사람은 고흐와 방을 같이 쓰던 폴 고갱이었다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고흐의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당시 경찰 조사와 목격자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고갱은 술에 취해 거리에서 고흐와 싸우던 중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서 ‘고흐는 고갱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 그의 무덤을 덮은 노란색 꽃잎들이 모두 질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았던 동생 테오도 네덜란드에서 형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유해는 1914년 형이 묻혀 있는 오베르 쉬르 와즈 공동묘지로 이장돼 형 옆에 나란히 묻혔다. 고흐가 그렸던 ‘오베르 쉬르 와즈의 교회’와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실제 현장을 지나면 고흐 형제가 묻힌 공동묘지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