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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20. 2024

루이 15세와 콩코르드 광장


뎅그랑~ 뎅그랑~


1744년 8월 프랑스 전국의 모든 성당에서 동시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당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들이 하느님에게 기원하는 내용은 똑같았다. 


“국왕 전하를 살려주시옵소서. 깊은 질병을 극복하고 일어나 프랑스를 다시 빛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시 프랑스 국왕은 루이 15세였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살던 그는 두 달 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대를 직접 이끌고 전쟁터로 나갔다. 하지만 제대로 싸움을 해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난데없이 심각한 질병에 걸려 목숨이 위태롭게 된 것이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서둘러 귀국해 베르사유 궁전 예배당 신부를 불렀다.


“내가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면속해 주시게. 이대로 죽으면 천국에 가기 쉽지 않으니, 자네가 나를 도와주게나.”


신부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전쟁에 나서면서 데려갔던 애첩을 포기하십시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왕의 요청이라도 거절하겠습니다.”


국왕은 가장 아끼는 애첩을 버려야 한다는 게 아쉬웠지만 목숨을 건지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리다.”


신부는 그제야 왕의 면속을 선언하고 주변에 모인 신하들에게 제안을 내놓았다.


“국왕 전하의 쾌차를 기원하면서 전 국민이 성당에 모여 기도를 드립시다.”


모든 성당의 종이 울려 퍼지고 국민들이 일제히 기도를 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온 프랑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의 병은 잘 낫지 않았다. 그때 프랑스 최고 조각가였던 에듬 부샤르동이 왕을 문병하러 베르사유 궁전을 찾아갔다. 


“전하, 어서 쾌차하십시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면 아름다운 기마상을 조각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루이 15세는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온 국민이 전국적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다 부샤르동까지 찾아와 기마상을 선물하겠다고 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신부에게 약속했다.


“하느님이 병에서 낫게 해주신다면 파리의 수호성인인 성 쥬느비에브를 모실 대성당을 지어 바치도록 하겠소.”


전 국민의 정성이 통했던 것인지, 아니면 부샤르동의 기마상 약속이 훌륭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왕의 대성당 건축 약속이 하느님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인지 루이 15세는 며칠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죽을 것이라던 의사들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병에서 완쾌한 것이었다.


“전하가 다시 일어나셨다.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프랑스를 살려주셨다. 루이 15세 만세, 프랑스 만세!”


루이 15세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만세를 불렀다. 길거리로 뛰쳐나와 왕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우편배달부들은 프랑스 곳곳에 편지를 전해주면서 동시에 국왕이 살아났다는 소식도 같이 퍼뜨렸다. 이들을 붙잡고 감격의 키스를 퍼붓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루이 15세가 쾌차하고 며칠 뒤 부르샤동이 왕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러 다시 찾아갔다. 


“제가 이전에 약속드렸던 대로 전하를 상징하는 기마상을 만들어 루브르궁전 입구에 가져다놓았습니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적당한 장소에 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루이 15세는 루브르궁전과 튈르리궁전 인근 공터를 광장으로 바꿔 부르샤동이 만든 기마상을 설치하기로 했다. 공터는 파리 시민들이 배추, 상추 같은 채소를 키워 팔던 시장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히던 앙주 자크 가브리엘에게 광장 설계와 공사를 맡겼다.


가브리엘은 땅을 고를 때 나온 흙을 공터 한가운데에 쌓아 언덕을 조성한 뒤 그 위에 팔각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피라미드의 여덟 면은 루이 15세의 여덟 가지 덕목인 인자, 부유, 근면, 절제, 정의, 근학, 지혜, 시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각 모퉁이에는 작은 정자와 조각상을 세웠고 각 면에는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서 만나게 했다. 그리고 부르샤동의 기마상을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가브리엘은 이곳에 ‘루이 15세 광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루이 15세 광장이 완공되고 26년 뒤인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세력은 광장으로 몰려가 피라미드 언덕을 무너뜨리고 기마상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부서진 기마상 중에서 팔뚝 부분만 겨우 살아남아 지금은 파리역사박물관에 보관됐다. 혁명세력은 광장의 이름을 ‘자유 광장’으로 바꾸었다. 기마상을 철거한 자리에는 석고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을 세웠다. 석고 여신상도 나중에 부서져 없어지고 말았다. 


광장의 이름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1795년 ‘5인위원회’ 시절에는 ‘콩코르드 광장’이 됐다가 1815년 부르봉 왕조 복원 이후인 루이 18세 때에는 다시 ‘루이 15세 광장’으로 환원됐고, 그 뒤를 이은 샤를 10세는 이곳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려 세상을 떠난 형 루이 16세를 기리는 뜻에서 ‘루이 16세 광장’으로 바꿨다. 광장은 1830년 7월 혁명 때 다시 ‘콩코르드 광장’으로 개칭돼 지금까지 이어지게 됐다. 


루이 15세 기마상이 섰던 콩코르드 광장 한가운데에는 3300년 된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원래는 이집트의 룩소르 사원 앞에 서 있던 것이었는데, 프랑스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해 준 데 감사하는 뜻으로 이집트 정부가 선물한 것이다.  이집트 정부는 당초 오벨리스크 두 개를 기증했지만 프랑스는 둘 다 가져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겨우 하나만 실어와 콩코르드 광장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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