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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19. 2024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앙부아즈 성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15~16세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67년 동안 살면서 예술가, 미학자이자 실용적 기술자로서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실용적 작품 중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혁신적이고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작은 도시 빈치에서 태어났다. 다빈치라는 이름은 ‘빈치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는 피렌체에서 명성을 얻은 뒤 밀라노, 로마 등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런데 뜻밖에 그의 무덤은 피렌체나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 파리 외곽 앙부아즈에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도대체 왜 이탈리아 사람인 그의 무덤이 고국에서 1200km나 떨어진 그곳에 있는 것일까?


피렌체, 밀라노를 오가며 예술 활동에 전념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13년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던 교황 레오 10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향했다. 그는 매달 금화 33듀캇을 급료로 받으면서 교황의 명령에 따라 작품을 만들었다. 
 

교황 자리에 오를 때 불과 38세였던 레오 10세는 예술을 사랑했고 예술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과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가 수행하는 온갖 과학, 의학 연구를 신성 모독이라고 봤으며,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낭비라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의 많은 적이 다빈치를 궁지로 몰아넣기까지 했다. 힘든 현실에 지친 그는 로마를 떠나고 싶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충이 끝난 계기는 묘하게도 전쟁이었다. 그가 고통에 시달리던 1516년 유럽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와 피사를 점령하고 피렌체까지 공격했다. 그는 레오 10세를 볼로냐로 불러 정전 회담을 열었다. 마침 이 자리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참석했다.


원래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무척 반갑게 맞이했다.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레오나르도가 레오 10세 밑에서 곤욕을 치른다는 사실을 알던 그는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레오나르도 선생, 고국이지만 굳이 이탈리아에 연연할 필요가 있을까요? 프랑스로 오십시오. 선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굳이 예술 활동에 매달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프랑스에 오시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에 관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식도 풍부했던 프랑수아 1세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그는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64세이던 1516년 일부 제자와 함께 바티칸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먼 이국으로 달려온 예술가에게 프랑수아 1세가 부여한 직책은 ‘왕의 제1 궁정화가이자 기술자, 건축가’였다. 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금화 총 10만 스쿠디를 연금으로 지급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넉넉하게 쓰고도 흘러넘칠 만한 금액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부아즈에 있는 클로 뤼세에 거처를 정했다. 그곳의 침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왕이 살던 앙부아즈 성이 보였다. 프랑수아 1세는 루아르 강 유역의 궁정과 주변에 있는 여러 성을 자주 찾아갔는데, 앙부아즈 성은 그중에서 가장 즐겨 머물렀던 곳이다. 앙부아즈 성 아래로는 루아르 강이 도도하게 흐르고, 성채에는 늘 깃발이 펄럭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지안 지아코모 카프로티 다 오레노, 살라이, 프란세스코 멜치 등 여러 제자를 클로 뤼세로 부르기도 했다. 또 작업 중이던 ‘모나리자’와 ‘세례자 요한’ 같은 대작도 가지고 갔다. ‘모나리자’가 로마가 아니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프랑스에서 이전만큼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프랑스에 건너간 지 1년여 만인 1517년 오른팔 마비 증세를 보인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모나리자’가 미완성 상태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는 여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수시로 클로 뤼세를 찾아가 밤새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담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신 공학, 건축 같은 분야에서는 계속 작업을 이어나갔다. 프랑수아 1세는 그에게 로모란틴에 새 성을 하나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레오나르도는 1517년 새 성과 분수를 갖춘 정원, 복잡한 구조의 운하를 설계했다. 새 성은 아쉽게도 완공되지 못했는데, 그가 만든 설계도는 샹부르 성과 블로아 성 같은 다른 장소에서 발견됐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왕을 위해 움직이는 사자 인형을 만들어 주었다. 이벤트 기획자로서의 능력도 발휘했다. 1518년 6월 19일 앙부아즈에서 열린 로렌초 디 피에트르 데 메디치와 마들렌 데 라 투르 도베르뉴의 결혼식을 직접 기획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건강이 악화된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1519년 4월 23일 유언장을 만들었다. 앙부아즈 성에 있는 성 플로랑텡 교회에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내용을 담고, 유산을 물려받을 하인들의 이름도 기록다. 그는 결국 그해 5월 2일 심장발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전설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이 전설은 이후 여러 화가에 의해 그림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유언장 내용대로 1519년 8월 12일 성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가 죽고 20년 뒤 프랑수아 1세는 금 세공인이자 건축가인 벤베누토 셀레니에게 다빈치가 그립다고 말했다. 


“이 세상에서 레오나르도만큼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어. 그림, 건축, 조각에서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이기도 했지.”


사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해가 어디 묻혔는지는 조금 불명확하다. 18~19세기 프랑스의 불안한 상황이 이유였다.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성 플로랑탱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고, 1808년에는 나폴레옹 황제의 지시로 완전히 철거돼 버렸다. 그곳에 묻혔던 그의 유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세기 정도가 흐른 1863년 옛 성 플로랑탱 교회 터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해로 추정되는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작가이자 프랑스 지방 박물관 감사관이었던 알센 우세가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따라 앙부아즈 성의 옛 플로랑탱 교회 부지에 파묻힌 다빈치의 유해 수색 작업을 벌인 덕분이었다. 


우세는 완벽한 형태의 큰 두개골과 구리반지를 낀 오른손가락, 하얀색 머리카락 그리고 ‘EO’ ‘AR’ ‘DUS’ ‘VINC’라고 적힌 돌 조각을 발견했다. 두개골에는 이가 여덟 개 정도 남았는데, 60대 후반 노인의 상태와 비슷했다. 근처에서 출토된 은 방패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은 프랑수아 1세가 그려졌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을 동안에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우세는 반지와 머리카락을 몰래 빼돌린 뒤 두개골과 돌 조각, 은 방패 등을 나폴레옹 3세에게 가져갔다. 유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것이라는 과학적이고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왕은 1874년 뼈 조각을 앙부아즈 성 안의 성 위베르 예배당으로 옮겼다. 옛 성 플로랑탱 교회 앞에는 그의 흉상을 세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은 이후 그의 유산은 여러 제자에게 나눠졌다. 멜치는 책, 그림 도구와 일부 그림을 물려받았다. 살라이는 밀라노의 저택에 있는 정원 절반을 상속했다. 흥미로운 점은 1525년 살라이가 ‘모나리자’ ‘세례자 요한’ 같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일부를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어떻게 그림을 확보하게 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수아 1세는 살라이로부터 ‘모나리자’를 매입해 퐁텐블루 성에 있는 궁전에 보관했다. 이후 루이 16세가 ‘모나리자’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옮겼고, 프랑스대혁명 이후 혁명군은 그림을 루브르 박물관에 걸었다.


앙부아즈는 루아르 계곡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파리에서 기차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고속열차로는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클로 뤼체는 1년 내내 관광객에게 개방된다. 관광객들은 저택뿐만 아니라 그의 창의력을 보여주는 전시실도 둘러볼 수 있다. 저택에 있는 침실과 식당에는 ‘모나리자’와 ‘세례자 요한’ 복사본 그림이 걸려 이곳이 그의 집이었음을 알려준다. 


앙부아즈 성도 1년 내내 개방된다. 이곳에서는 당연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묻힌 허버트 예배당과 정원에 있는 레오나르도 흉상을 둘러봐야 한다. 클로 뤼체와 앙부아즈 성을 다 둘러볼 수 있는 복합 표를 사면 입장료를 아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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