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700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여왕의 침실’이다. 이 방은 루이 16세의 왕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개인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면 여러 시녀의 도움을 받아 꽉 조이는 코르셋을 입고, 가면처럼 짙은 화장품을 바르고, 짙은 냄새를 풍기는 향수를 뿌렸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지나친 사치 탓에 ‘결핍 부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는 일상생활에서의 화려한 패션을 넘어 침대에까지 이어졌다. 1783년에 나온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에 대한 역사적 소고』라는 소책자가 그 내용을 전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생에는 항상 방탕과 혼란이 따라다녔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 모두를 좋아했다. 루이 16세에게 충실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놀려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종종 침실에서 연애편지를 썼다. 물론 루이 16세에게 쓴 것은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녀가 여러 젊은 공작부인과 동성애라는 소문도 적지 않게 나돌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의 하이라이트는 스웨덴 출신인 악셀 폰 페르센 백작과의 관계였다. 베르사유 궁전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글이 있을 정도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은 의혹의 주제였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소문을 지속시킬 만큼 많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두 사람은 1774년 10대였을 때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 5년 뒤 페르센 백작은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했다.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았다.
‘나는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녀에게 의지할 수 없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기로 한 거야.’
2016년 『나는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해요』라는 책을 쓴 역사학자 에벌린 파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비밀 편지에 집중한다. 많은 편지 중 상당수는 암호로 적혔거나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혔다. 페르센은 1791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쓴 편지에서 사랑을 고백했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나의 신이여!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살고 존재합니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나의 유일한 위안이랍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2년 편지에서 역시 사랑의 답을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당신을 미친 듯 사랑해요. 단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존재한 순간이 없었다는 말을 당신에게 하지 않을 수 없군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죽기 직전 페르센 백작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콩시에르주리에 갇혔을 때였고,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편지는 그녀가 죽고 18개월 후에야 백작에게 전달됐다. 편지는 딱 한 줄이었다.
‘안녕! 나의 가슴은 언제나 당신 것이에요.’
이처럼 간절한 사연을 담은 편지들이 남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진실한 관계가 무엇이었는지를 놓고 엇갈린 주장을 한다. 일부는 ‘플라토닉 러브’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정으로 서로 사랑했다’고 반박한다. 어떤 학자들은 ‘두 사람이 사랑했지만 성적 관계를 가지지는 못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랑스 역사학자 패니 코산디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잘라 말했다.
“많은 사람이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데 여왕의 침실에서 외부인과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에벌린 파는 책에서 코산디와 다르게 주장한다.
‘여왕의 네 아이 중 소피와 루이 샤를은 왕이 아니라 페르센 백작이 아버지였다. 마리 앙투아네트 침실에 있는 비밀의 방 덕분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따돌린 채 둘은 아무도 모르게 만날 수 있었다.’
에벌린 파는 페르센 백작의 친구인 퀸틴 크라퍼드가 프랑스 왕족의 탈출을 도와달라면서 영국의 윌리엄 피트 총리와 그렌빌 외무장관에게 쓴 편지를 보여준다.
‘저는 페르센을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명예롭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웨덴 사람이며 여왕이 가장 아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현재 왕세자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스캔들의 두 번째 인물은 랑발 대공부인과 폴리냑 공작부인이었다. 그녀와 두 여인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 이상 사이였다는 게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에 퍼졌던 소문이었다.
랑발 대공부인은 결혼 직후 남편이 성병으로 죽는 바람에 미망인이 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절친한 사이가 된 랑발을 가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당연히 궁에서 오래 근무했던 다른 궁녀들은 불만을 갖게 됐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방을 ‘몽셔 콰르(mon cher cœur)’, 영어로는 ‘마이 디어 하트(my dear hear)’라고 불렀다. 여자 친구 사이의 호칭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낯간지러운 표현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 파견됐던 오스트리아 대사는 고국에 보낸 편지에 둘의 이야기를 적었다.
‘여왕은 지속적으로 랑발 대공부인을 침실로 불러들인다. 나는 가끔 여왕에게 ‘랑발 부인에 대한 친절과 호의가 때로는 지나치다’고 충고한다.’
어떤 이들은 ‘두 사람이 보였던 스킨십이 18세기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랑발 대공부인이 동성애였다는 소문을 일축한다.
랑발 대공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폴리냑 공작부인에게 밀려났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공작부인을 1775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 계속 호의적 감정을 표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공작부인의 로맨틱한 관계는 2012년 브누와 자코 감독이 만든 영화 ‘페어웰, 마이 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다이앤 크루거)는 시녀 시도나에게 토로한다.
“여자에게 마음이 끌려 본 적이 있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괴로울 정도로. 몇 시간이고 그 모습을 상상해. 그 갸름한 턱과, 그 부드러운 피부와, 빛나는 눈빛을.”
물론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공작부인의 성적 관계를 애매모호하게 표현한다. 대신 둘의 친밀한 우정에 집중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다른 스캔들의 주인공은 남편인 루이 16세의 동생 샤를 6세였다. 그녀가 시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루이 16세는 청년 시절부터 성기능 장애로 고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연히 부부 관계는 아주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7년이 지나도록 합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적으로 굶주렸다고 분석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성적 갈증을 남편의 동생에게서 풀었다는 게 스캔들의 내용이었다.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를 놓고 의견은 두 가지로 갈라진다. 책, 블로그 포스트, 영화 등을 보면 일부에서는 그녀를 무자비하고 방탕한 탕녀로 묘사한다. 반면 반대쪽에는 순결하고 비극적이고 아주 깊숙이 오해받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진 것은 프랑스대혁명 때였다. 대혁명 발발 직전 혁명세력은 각종 소책자나 연극 등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적절한 성관계를 가졌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대혁명이 터지고 왕가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에는 소문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온라인 도서관에는 랑발 대공부인의 팔에 안겨 누운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만화 등을 보관돼 있다. 물론 프랑스대혁명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소책자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도덕적으로 파산한 인물로 그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고 분석한다.
베르사유궁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에는 비밀의 문이 있다. 이 문은 1789년 10월 5일 저녁 수천 명의 폭도가 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전으로 밀려왔을 때 극적으로 활용됐다. 폭도 대표 수십 명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침실로 쳐들어갔을 때 그녀는 비밀의 문을 통해 달아날 수 있었다.
2년 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달아나다 국경지역인 바렌에서 붙잡혔다. 다시 2년 뒤 그녀는 혁명광장, 지금은 콩코르드 광장으로 불리는 곳에서 단두대, 즉 기요틴에 목을 내밀었다. 만약 그녀가 비밀의 문을 통해 달아난 뒤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면 그녀의 운명과 스캔들 내용은 지금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역사는 장난꾸러기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