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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25. 2024

독일 장군의 변심, 에펠탑 살리다




센강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느긋하게 흘렀다. 물새들은 끼룩끼룩 울음소리를 내며 강을 따라 날았다. 샤이요 궁에서 내려다보는 에펠탑의 전경은 여느 때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인파로 북적였을 전망대에는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트로카데로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던 파리지앵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였다. 트럭 세 대가 큰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트럭들은 이에나 다리를 건너 에펠탑 바로 밑에서 멈췄다. 짐칸에서 병사 수십 명이 뛰어내리더니 빠른 속도로 대오를 갖췄다. 잠시 후 지붕이 없는 작은 지프차 한 대가 천천히 다리를 건너왔다. 차에는 훈장 여러 개가 달린 빳빳한 제복을 착용한 장군이 타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군은 상의를 단정하게 정리한 뒤 병사들 앞으로 걸어갔다. 


“하일 히틀러!”


병사들은 힘찬 목소리로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인적이 끊긴 에펠탑 아래에 줄지어 선 병사들은 다름 아닌 독일군이었다. 이들은 1940년 프랑스군의 저항을 물리친 뒤 보무도 당당하게 파리를 점령한 독일군 선발대였다. 병사들 앞에 선 장군은 파리 점령의 선봉에 선 빌헬름 카이텔 장군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한 번 죽 둘러본 뒤 연설을 시작했다.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고생이 많았다. 여러분이 죽음을 각오하고 열심히 싸운 덕에 제3제국은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다.”

“와~. 우리는 승리했다. 이제 파리는 독일의 것이다.”


카이텔 장군이 ‘파리 점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부동자세로 섰던 병사들은 일제히 두 손을 치켜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손가락으로 입을 모아 휘파람을 부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는 자부심과 함께 힘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한꺼번에 흘렀다. 카이텔 장군은 가볍게 미소를 지은 뒤 손을 들었다. 병사들은 입을 다물고 다시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는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에펠탑 꼭대기에 제3제국 국기를 내걸어야 한다. 그 영광스러운 임무를 여러분이 맡게 됐다.”


카이텔 장군은 말을 잠시 멈춘 뒤 가슴 안쪽으로 손을 넣어 나치 깃발을 꺼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장교에게 깃발을 건넸다.


“지금부터 디트리히 대령의 지시에 따라 에펠탑에 제3제국 국기를 거는 임무를 수행하라. 다른 병사들은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반격에 대비해 주변에서 경계 근무를 서도록 한다.”


디트리히 대령은 곧바로 부하 여러 명을 데리고 에펠탑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맨 꼭대기 층으로 이어지는 승강기 단추를 눌렀다. 1층 승강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다시 단추를 눌렀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승강기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살펴보도록 해라.”


병사들은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전기시설을 살피러 갔고, 다른 일부는 승강기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나머지는 반대편을 조사하러 달려갔다.


“대령님, 케이블이 끊어졌습니다.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승강기를 사용할 수 없도록 고의로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수리가 가능한가?”

“우리가 가진 장비로는 수리가 어렵습니다. 케이블은 영국이나 미국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나?”

“등산하듯이 에펠탑을 기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지.”


디트리히 대령은 평소 등산을 즐겼던 몇몇 병사를 선발했다. 그리고는 에펠탑 철 구조물을 타고 올라가 나치 깃발을 게양하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몇 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그날 오후 늦게야 깃발을 에펠탑에 걸 수 있었다. 



2.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한 달이 지났다. 트럭 10여 대가 다시 이에나 다리를 건너오더니 에펠탑 아래에 멈춰 섰다. 그 뒤를 따라 10여 대에 이르는 지프차 행렬이 몰려왔다. 

여섯 번째 지프차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사내가 내렸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코 밑에는 독특한 네모 모양의 콧수염이 달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총통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에펠탑 주변에 모인 병사들은 일제히 손을 앞으로 치켜 올렸다.


“하일 히틀러!”


히틀러도 손을 들어 병사들에게 답례했다. 그는 손을 내린 뒤 에펠탑 밑으로 걸어갔다. 프랑스가 기술의 승리라고 그토록 자랑하던 에펠탑이 이제 그의 손 안에 들어왔다. 히틀러는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카이텔 장군, 에펠탑 맨 꼭대기 전망대로 올라가보고 싶군.”


히틀러는 뒤에서 따라오던 장군에게 말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패전국이 된 독일을 무척이나 무시했던 나라였다. 그는 이런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발아래에 두고 내려다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총통 각하. 에펠탑에는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프랑스군이 도망가면서 승강기를 망가뜨리는 바람에 어느 누구도 정상에 오를 수 없게 됐습니다. 부품이 없어 수리도 불가능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철 구조물을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껄껄. 그 자존심 강한 프랑스 사람들이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승강기 케이블을 부수면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을까? 내가 에펠탑에 올라가서 파리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모습은 상상하기도 싫었던 게지. 굳이 올라갈 필요는 없다. 나는 프랑스를 점령한 것이지, 에펠탑을 점령한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다시 지프차에 올라타 샹젤리제 거리가 시작하는 개선문으로 직행했다. 


‘승자에게는 부서진 승강기보다는 개선문을 바라보며 샹젤리제에서 승리의 개선식을 펼치는 게 더 어울리지.’



3.


디트리히 폰 콜티츠 장군은 모리스 호텔의 창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튈르리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부모인 것 같은 두 남녀는 잔디밭에 앉아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콜티츠는 독일 바덴바덴에 있는 가족을 생각했다. 가족을 만난 것은 3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지금 창 밖에서 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처럼 당시 그의 아이들도 오랜만에 집에 온 아빠를 반기며 잔디밭에서 깡총깡총 뛰어다녔다. 파리로 오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눈물을 글썽이던 아내의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다.


“장군님, 베를린에서 긴급 전문이 날아왔습니다.”


언제 들어왔는지 부관 후베르투스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콜티츠 장군이 어디에 있든 늘 따라다닌 믿음직스러운 부하였다. 그의 손에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콜티츠는 전문을 천천히 읽었다.  


‘프랑스 파리를 초토화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인가? 연합군은 이미 독일의 수많은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있지 않나? 파리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되면, 철수에 앞서 에펠탑을 파괴해버리시오. 아울러 센 강의 다리들과 루브르 궁전 등 파리의 모든 것을 부숴버리시오.’


콜티츠는 전문을 들고 천천히 책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봤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태어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는 막내아들이 까르르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눈을 떴다. 앞에는 후베르투스가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드디어 명령이 내려왔어. 초토화를 지시하는군. 파리에서 철수하기에 앞서 파리를 잿더미로 만들라는 것이지. 이미 에펠탑 같은 파리의 주요 시설·유적·문화재와 각 다리에 폭탄은 설치해 두었으니 내가 폭파 지시만 내리면 끝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명령을 따르시겠습니까?”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


콜티츠는 1945년 초 파리 점령 독일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프러시아 시대 때부터 군인만 배출한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집안사람들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정신이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


콜티츠는 특히 파괴 본능이 강한 사람이었다. 1940년 네덜란드로 진격했을 때 적군에게 항복 기회를 주지도 않고 초토화 작전을 벌여 로테르담을 흔적도 없이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도시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자네, 시펜하트프 법을 들어봤나?”

“예,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그 법 내용은 이렇지. 독일군 장성, 장교, 병사가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탈영하거나 전투에서 이기지 못할 경우 그 가족들을 총살한다. 내가 만약 파리 초토화 명령을 어기면 바덴바덴에 있는 내 가족은 모두 총살형을 당하겠지?”

“….”

“후베르투스, 어떻게 할까?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인류 역사상 최악의 파괴 범죄를 저질러야 하나? 아니면 역사 속의 악인으로 남지 않으려고 가족이 총살당하게 내버려둬야 하나?”


콜티츠는 히틀러를 우상처럼 떠받들던 사람이었다. 히틀러도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콜티츠만큼은’이라고 할 만큼 그를 신뢰했다. 그런데 파리에 간 뒤 콜티츠의 마음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고 사람을 죽이거나 도시를 파괴하는 일을 본능처럼 여겼던 그였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는 파리를 초토화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콜티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해가 떨어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 방에 머물렀다. 주변은 캄캄했지만 불도 켜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파리와 가족, 두 단어만이 맴돌았다. 그는 자정이 다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후베르투스를 불렀다.


“후베르투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따라주겠나?”

“저는 영원한 장군님의 부하입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따르겠습니다.”

“고맙네, 후베르투스. 파리는 파괴하지 않기로 했네. 아무리 전쟁이라 하더라도 역사의 범죄자가 될 수는 없어. 지금부터 내가 지시하는 대로 하게. 파리를 돌아다니며 폭탄을 터뜨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하게. 베를린과 게슈타포에게는 폭파 작업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고 거짓 보고를 하면 돼. 며칠 뒤면 연합군이 파리로 들어올 거야. 그때까지만 게슈타포를 속이도록 하세.”

“가족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운명에 맡겨야지.”


후베르투스는 서둘러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그는 믿을 만한 병사 10여 명을 차에 태워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폭탄이 설치된 곳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병사들에게 폭탄을 절대 터뜨리지 말라는 지시를 거듭 내렸다. 폭탄 설치 장소가 워낙 많았던 탓에 그가 명령을 모두 하달하자 이미 아침 해가 조금씩 떠올랐다.  


며칠 뒤 연합군이 파리에 나타났다. 콜티츠는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병력과 무기 등에서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 끝까지 맞서봤자 독일군 병사들의 인명 피해만 커질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사령부로 몰려온 레지스탕스와 파리 시민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뒤늦게 달려온 부하들이 겨우 피신 길을 만든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콜티츠가 파리 초토화 명령을 거부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베를린의 히틀러에게 넘어갔다. 히틀러는 그의 가족을 군사법정에 세워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베를린에 있던 콜티츠의 친구들이 군사법정 개정을 고의적으로 지연시켰다. 그 사이 연합군이 진격을 거듭해 베를린을 점령한 덕분에 그의 가족은 총살형을 면할 수 있었다. 영국 런던 포로수용소에 붙잡혔던 콜티츠 장군은 2년 뒤 석방돼 그립던 가족과 눈물의 재회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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