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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r 31. 2024

‘빨간 남자’와 튈르리 궁전


1.


“쿵쿵!”


발자국 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복도에서 누군가 몹시 화난 듯이 걸어왔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침실 한가운데 놓인 차 테이블에 앉아 그 소리를 들으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팔다리만 그런 게 아니라 심지어 눈썹과 입술도 떨렸다.


“쾅!”


누군가 침실 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왔다. 카트린은 깜짝 놀라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남편인 앙리 2세가 서 있었다. 그는 방금 프랑스 국왕 즉위식을 마치고 부인이자 왕후인 카트린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국정에 간섭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오. 외국인 아낙네가 정치에 끼어들어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앙리 2세는 혼자서 화를 내고 혼자서 고함을 지른 뒤 방에서 나가버렸다. 카트린은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녀의 손과 발은 여전히 떨렸다. 이날은 1547년 3월 31일 앙리 2세 즉위식 당일이었다. 


카트린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불우하게 자랐다. 로마 교황청과 피렌체 국정을 장악한 메디치 가문의 주선 때문에 그녀는 열다섯 살 때 동갑나기인 앙리 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앙리 2세는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나이가 스물세 살이나 많은 어릴 적 유모 다이앤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슈농소 성을 선물했고, 국정을 함께 논의했다.


“아버지는 외교 때문에 메디치 출신인 카트린을 며느리로 받아들인 거야. 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자야.”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카트린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내 아들이 왕 자리에 오르면 꼭 수모를 씻고 말 거야.’


세월을 기다리던 카트린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남편이 마상 창 대결에 나섰다가 패하면서 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즉위 1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덕분에(?) 그녀의 세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4세, 앙리 3세가 차례로 왕이 됐다.


2.


카트린은 어릴 때 즉위한 세 아들을 대신해 연거푸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정치 경험과 영향력이 부족해 귀족들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화가 난 그녀는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카트린은 믿을 만한 심복을 시켜 실력이 좋은 킬러를 고용했다. 어둠의 세계에서 ‘장 레코샤’로 불리는 사내였다. ‘껍질 벗기는 전문가 장’이라는 뜻이었다. 칼을 놀리는 솜씨가 워낙 뛰어나 낮에는 소나 말을 잡는 백정으로, 밤에는 사람을 잡는 암살자로 일했다. 


“자네가 처리해야 할 목록을 주겠네. 일이 잘 해결되면 후한 포상금을 내릴 것이야. 뒤처리까지 깨끗이 잘하게.”


카트린은 장 레코샤에게 귀족 이름이 빼곡히 적힌 명단을 전달했다. 일부는 정치인이었고, 일부는 종교인이었다. 지식인의 이름도 일부 들어 있었다. 장 레코샤는 다음날부터 맡은 임무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워낙 신출귀몰하게 일을 잘 처리하는 킬러여서 그녀가 부여한 일을 소문 없이 하나씩 깔끔하게 처리했다. 파리에서 카트린에 반대하고 국왕을 협박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자 남은 귀족은 바르르 떨게 됐다. 


그런데 카트린이 생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일이 일어났다. 장 레코샤의 마음이었다. 그는 낮에 도살장에서 소를 도축하다 동료들로부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요새 여러 귀족이 연거푸 행방불명됐다더군. 암살당해 비밀장소에 묻혔을 거라는 거야.”

“어둠의 세계에서 빼어난 솜씨를 가진 사내가 일을 했다더라고. 배후에 카트린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게 사실로 드러나면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될 텐데.”


장 레코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튈르리 궁전으로 달려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킬러가 찾아오자 카트린은 당황했다.


“주신 명단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모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수고했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잘해줬어.”

“그런데 말입니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군. 뭔가?”

“이상한 소문이 나 돌더군요. 제가 암살한 사람들이 왕을 궁지로 몰아넣은 정적이라는 게 사람들의 이야기이더군요.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행방불명됐다고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잘 알고 있지요.”

“….”

“원래 제 입이 무겁기는 하지만 이번 일은 보통 사안이 아닌 걸로 보이네요. 입을 꼭 다물고 있으려면 다른 게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카트린은 그제야 장 레코샤의 속셈을 알아 차렸다. 그는 협박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게. 며칠 내로 사람을 보내 다시 부르겠네.”


돈으로 장 레코샤의 입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성격으로 미뤄보건대 앞으로 계속 떠들고 다닐 게 분명하다는 게 카트린의 판단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막아야 했다. 그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을 불렀다. 큰아들 프랑수아 2세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기사 뇌빌이었다. 


“장 레코샤를 없애 주게.”


카트린은 왜 그를 죽여야 하는지 상세한 내용을 설명하지 않았다. 친구와 그의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돼 있었던 뇌빌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장 레코샤에게 내일 밤 자정 무렵 튈르리 궁전 정원 한쪽 모퉁이에 나오라고 하십시오. 그곳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뇌빌은 미리 튈르리 정원 한쪽의 오두막에 숨었다. 밤이 많이 깊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때 콧노래 소리가 들렸다. 튈르리 정원으로 올라는 카트린의 편지를 받고 두둑한 포상금을 챙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장 레코샤가 혼자 정원으로 걸어왔다. 그는 벤치에 앉아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뇌빌은 발소리를 죽여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목을 졸랐다. 장 레코샤는 발버둥을 쳤지만 건장한 체구에 오랫동안 군사훈련을 받아 팔뚝 힘이 센 뇌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뇌빌은 마지막에는 단검을 꺼내 장 레코샤의 가슴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벤치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장 레코샤는 온힘을 다 모아 죽기 직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너의 주인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뇌빌은 다른 칼로 그의 목을 잘랐다.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목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튈르리 정원 바닥을 흠뻑 적셨다.


며칠 뒤 뇌빌은 장 레코샤를 죽였던 장소에 다시 갔다. 그런데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튈르리 정원에서도 외진 장소여서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시신이 발견됐다면 튈르리 궁전에 난리가 났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튈르리 궁전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귀신이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목 잘린 유령이 피를 흘리면서 매일 밤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이야기였다. 귀신은 그냥 사람을 놀라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목을 졸라 죽인 뒤 잘라서 들고 간다는 것이었다. 실제 그렇게 살해된 채 발견된 시신은 한두 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귀신을 ‘홈 우즈(빨간 남자)’라고 불렀다. 


튈르리 궁전은 공포에 휩싸였다. 시종, 시녀는 물론 궁을 수시로 드나드는 귀족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밤이 되면 어느 누구도 건물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문과 창을 꼭 잠근 채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벌벌 떨기만 했다. 답답해진 카트린은 왕실 점술사를 불렀다.


“도대체 어떤 귀신이 튈르리 궁전에 나타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쫓아버릴 수 있나?”


모든 걸 알아낸 점술사의 대답은 분명했다.


“귀신은 파리의 유명한 백정이었던 장입니다. 자기가 왜 죽었는지는 잘 아는 사람이 이 궁전에 있다고 하는군요. 튈르리 궁전이 완전히 황폐화돼 아무도 살지 못하게 될 때까지 계속 정원에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힐 거라고 합니다. 아! 마지막 한 마디가 더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라고 사주한 사람은 생제르망 곁에서 죽게 될 거라고 저주하네요.”


두려움에 사로잡힌 카트린은 다음날 짐을 싸서 튈르리 궁전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1589년 블루아 성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침대 머리맡에서 그녀를 임종한 사람 중에 베네딕트 수도회 수사인 로랑 드 생제르망이 있었다. 점술사의 예언이 적중한 셈이었다. 


3.


튈르리 궁전의 귀신은 카트린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났다. 19세기 루이 16세가 프랑스대혁명의 단두대에 목을 내밀기 전날 ‘빨간 남자’가 왕 앞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혁명군이 튈르리 궁전으로 밀려오기 며칠 전인 1792년 8월 10일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났다는 소문도 있다. 나폴레옹 황제가 귀신과 대화했다는 전설도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나폴레옹 황제가 러시아 정벌에 나서기 전이었다. ‘빨간 남자’가 튈르리 궁전으로 황제를 찾아가 궁전 문지기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황제를 만나게 해 주시오.”

귀신을 보고 깜짝 놀란 문지기는 너무 무서웠지만 달아나는 대신 용감하게 거부했다.

“안 됩니다.”

귀신은 문지기를 옆으로 밀어제치고 계단을 미끄러지듯이 올라갔다. 그는 방문 앞에 서 있던 시종관에게 다시 부탁했다.

“이집트에서 만난 빨간 귀신이 다시 뵙기를 원한다고 전해주시오.”

전갈을 들은 나폴레옹은 귀신을 들어오게 했다. 둘은 방에서 비밀리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참 뒤 귀신은 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튈르리 정원에서 ‘빨간 남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1871년 5월 23일이었다. 한 신문 기자가 귀신을 직접 목격한 루브르 궁전 문지기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사로 쓴 게 남았다. 


‘루브르 궁전 문지기는 평소처럼 한손에 램프를 들고 순찰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갤러리를 돌다 ‘아폴론의 방’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머리를 숙이고 팔짱을 낀 채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도둑’을 놀라게 해 주려고 생각한 문지기는 몰래 침입자 뒤로 걸어갔다. 그가 어깨에 손을 대려는 순간 창문 앞에 서 있던 사람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지기는 다시 순찰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그랜드 갤러리’에서 똑같은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아폴론의 방’에서처럼 몰래 뒤로 다가갔지만 이번에도 사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문지기는 튈르리 궁전에 나타난다는 ‘빨간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숙소로 돌아가 다른 동료들을 데리고 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루브르 궁전 창 밖에서 빨간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됐다.’


루브르 궁전 문지기가 ‘빨간 남자’를 본 그날은 튈르리 궁전이 역사에서 사라지던 날이었다. 그날 파리 코뮌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사내 열두 명이 튈르리 궁전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른 것이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궁 전체로 번졌고, 48시간이나 궁을 활활 태웠다. 사람들은 그날 루브르궁전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사람은 오랜 은신처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괴로워한 ‘빨간 남자’였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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