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네아스는 트로이 함락 17년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이름을 아스카니오스로 바꾼 에우리레온이 뒤를 이어 라틴 인을 다스렸다. 이때 트로이 인은 포위를 당해 궁지에 몰려 있었다. 티레니아 군은 매일 세를 불리고 있었다. 라틴 인은 라비니움에 갇힌 사람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아스카니오스는 적에게 아주 우호적이고 합리적인 협상을 제안했다. 적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스카니오스는 적이 원하는 조건에 따라 전쟁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티레니아 인은 이렇게 요구했다.
“해마다 라틴 인이 생산하는 모든 포도를 티레니아에 바치시오.”
라틴 인은 이런 조건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들은 아스카니오스의 조언에 따라 포도를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기로 했다.
“서로 열정과 용기를 가지시오. 이 위험한 모험을 도와달라고 신에게 기도합시다.”
아스카니오스와 라틴 인은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 도시에서 출격했다. 그들은 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적의 진지를 공격했다. 적이 나머지 병력을 보호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세워놓은 곳이었다. 당연히 아주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티레니아 군에서 최정예병이 메젠티우스의 아들 라우소스의 지휘에 따라 지키고 있었다.
라틴 인은 들키지 않고 공격했기 때문에 진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평원에 숙영지를 쳐놓고 있던 적의 본진은 요새에서 비치는 이상한 불빛과 죽어가는 동료들의 비명을 듣고는 그곳에서 벗어나 산악지역으로 달아나버렸다.
티레니아 군이 달아나는 도중에 큰 혼란과 소동이 있었다. 밤에 병사들이 움직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무질서하게, 대오가 흐트러진 상태에서 철수했다.
라틴 인은 적 요새를 기습으로 빼앗은 뒤 나머지 적 병사들은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뒤를 쫓아가 살육전을 벌였다. 적 병사 중 어느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곤경에 빠져있는지 아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혼란과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일부는 벼랑으로 떨어져 죽었고, 다른 일부는 달아날 곳이 없는 협곡에 갇혀 포로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적 병사 대부분은 어둠 속에서 동료도 알아볼 수 없어 서로를 적이라고 오해했다. 그래서 티레니아 군의 가장 큰 손실은 서로를 죽인 데에서 발생했다.
메젠티우스는 부하 몇 명과 함께 겨우 언덕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아들의 운명과 잃어버린 병사의 수는 물론 그가 갇힌 곳의 상황을 알게 되자 라비니움에 평화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다. 아스카니오스가 라틴 인에게 행운을 아끼라고 조언한 덕분에 메젠티우스는 휴전 협정을 맺어 살아남은 병력과 함께 귀향할 수 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라틴 인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서로 교류하는 친구가 됐다.
라비니움을 세운 지 30년째 되던 해에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오스는 아버지에게 주어진 신탁에 따라 다른 도시를 지었다. 이곳에 더 나은 거처를 얻기를 원하는 라비니움과 다른 라틴 도시 의 주민 모두를 이주시켰다.
“새로 건설한 도시를 알바라고 부르도록 하겠소.”
알바는 그리스 어로 ‘하얗다’는 뜻이다. 이곳은 도시의 모양을 설명하는 별명을 덧붙임으로써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도시와 구별된다. 지금 이곳의 이름은 두 단어로 돼 있는데 바로 알바 롱가다. ‘길고 하얀 도시’라는 뜻이다.
로마의 3대 왕인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이후 이 도시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알바는 패권을 놓고 로마와 다투다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는 고향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알바 시민들은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이 사건은 먼 훗날 벌어진 사건이다.
다시 도시를 만들던 때로 돌아가자. 알바는 산과 호수 근처에, 두 곳 사이의 공간에 지어진 도시였다. 산과 호수는 성벽 역할을 했고, 도시가 쉽게 점령당하지 않게 만들었다. 산은 매우 험하고 높았고, 호수는 깊고 넓었다. 수문이 열리면 물은 평원으로 흘렀다. 알바 주민들은 원하는 만큼 물 공급량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도시 아래에는 보기만 해도 놀랍고, 이탈리아 어느 지역보다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와인은 물론 온갖 종류의 과일을 생산하는 평원이 있다. 이곳의 와인은 알바 와인이라고 불린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팔레르눔 와인만 제외하고는 어느 와인보다 달고 품질이 우수하다.
도시를 건설하는 동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에서 가져와 라비니움에 안치했던 신들의 여러 조각상이 있었다. 이 조각상들을 모시기 위한 신전이 알바롱가에 지어졌다. 라비니움에 있던 조각상들은 신전으로 옮겨졌다. 다음날 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조심스럽게 문을 모두 닫아놓았고 신전을 둘러싼 벽과 지붕은 전혀 손상된 데가 없었는데, 조각상들이 위치를 바꿔 옛 받침대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축원과 희생제례를 거친 뒤 조각상들은 똑같은 방법을 거친 뒤 원래 놓였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뒤 사람들은 걱정하게 됐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물려온 신들과 떨어져서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버려진 옛 거주지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마침내 이들은 이런 어려움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방책을 강구해 냈다. 신들의 조각상들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동시에 일부 사람을 알바에서 라비니움으로 돌아가게 해 조각상들을 돌보며 살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라비니움에 간 사람들은 모두 600명이었다. 그들은 모든 가족을 데리고 돌아갔다. 아이게스투스는 그들의 지도자가 됐다.
로마인은 이 신들을 페나테스(가정의 신)라고 부른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 이름을 그리스어로 파트루이라고 번역한다. 다른 역사학자는 게네트리오이, 크테시오리, 미키오이, 헤르케이오이 등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들은 여러 신이 가진 각각의 특성에서 이런 이름을 떠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어쨌든 비슷한 개념을 표현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신들의 모습과 관련해서 역사학자 티마이오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성물들은 라비니움의 성소에 보관됐다. 모두 철이나 청동으로 만든 지팡이나 트로이 산 도자기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법으로 볼 수 없게 돼 있는 물건들일 경우 그것을 본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들어서도 안 되고, 묘사해서도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법에 허용된 것 이상으로 질문하거나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 물건들을 직접 봐서 안다. 또 이것들과 관련해서 글을 남긴다고 해서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이 물건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신전에서 볼 수 있다. 아주 작은 성소인 카리나이로 가는 길에 있는 신전이다.
이 신전은 주변의 높은 건물들 때문에 어두운데 현지어로는 벨리아라고 불린다. 이 신전에는 트로이 신들의 조각상들이 놓여 있다. 그들을 보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조각상들에는 페나테스임을 알려주는 명문이 붙여져 있다.
조각상은 창을 들고 의자에 앉은 두 청년이다. 고대 장인의 작품이다. 나는 고대 신전에서 이 신들의 다른 조각상을 많이 봤다. 모두 군복을 입은 두 청년의 모습으로 표현돼 있었다. 이 조각상을 보는 것은 물론 듣고 쓰는 것도 허용된다. 사모트라케의 역사를 쓴 칼리스트라토스와 고대 전설 등을 많이 수집한 사티로스는 물론 시인 아르크티노스는 여기에 대해 설명을 남겨놓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주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팔라스의 딸 키르세는 다르다노스와 결혼했을 때 지참금으로 아테나의 선물을 가지고 왔다. 즉 팔라디아와 신들의 성스러운 상징이었다. 그녀는 이 성물들의 신비에 대해 교육을 받아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 인이 홍수를 피해 펠레폰네소스를 떠나 트라키아의 섬에 정착했을 때, 다르다노스는 신들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설했다. 신들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사모트라케에서 거행되는 비밀의식을 거행했다.
다르다노스는 디어 많은 사람을 아시아로 인도했다. 그는 트라키아의 섬에 남은 사람들에게 신들을 위한 성스러운 의례와 비밀의식을 전해준 뒤 팔라디아와 여러 신의 형상을 꾸렸다. 그는 어디에 정착해야 할지 신탁을 구했을 때 성물의 보호와 관련된 답을 들었다.
‘네가 건설하는 마을에서 조상 전래의 신에게 기도를 올려라
그들을 보호하고, 희생물을 바치고 합창으로 찬미하라
너에게 수여된 제우스 신의 딸의 선물을 물에 담그라
어떤 해도 입지 않도록 보호하라
이 성물들이 그 땅에 남아 있는 한
그 도시는 영원히 번성하리라.‘
다르다노스는 이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창건한 도시에 조각상들을 안치했다. 나중에 일리움이 건설됐을 때 조각상들은 후손들에 의해 그곳으로 옮겨졌다. 힐리움 사람들은 성채에 신전과 성소를 지은 뒤 최대한 신경 써서 그들을 보호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조각상들은 하늘에서 보낸 선물이자 도시의 안녕을 지키는 약속이야.’
트로이의 낮은 지역이 함락됐을 때 성채로 들어간 아이네아스는 성소에서 팔라디움과 신들의 형상을 꺼내 도시 밖으로 옮겼다. 나중에는 이탈리아로 가지고 왔다. 아르크티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제우스가 다르다노스에 준 팔라디움은 하나였다. 이것은 도시가 함락될 때까지 일리움의 성소에 숨겨져 있었다. 이후 복사본이 하나 만들어졌다. 원본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팔라디움을 훔치려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대중이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팔라디움 탈취 계획을 세운 아르카디아 인이 가져간 것은 복사본이었다.’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가져온 성물은 신들의 형상이었고, 사모트라케 인은 물론 모든 그리스 인은 최대한의 경배를 드린다. 전설로 널리 알려진 팔라디움은 베스타 신전에서 여사제가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비밀에 부쳐진 다른 성물도 있다. 하지만 트로이 인의 성물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고자 한다.
38년간 통치한 뒤 아스카니오스는 눈을 감았다. 그의 형제인 실비우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는 아이네아스가 죽은 뒤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산악지대에서 목동이 그를 키웠다고 한다.
아스카니오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라비니아는 박해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티레누스라는 사람에게 갔다. 그는 왕궁의 돼지를 키우던 사람이었다. 티레누스는 라티누스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만큼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티레누스는 그녀를 호젓한 숲으로 데리고 갔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볼 수 없게 한 뒤 직접 지은 집에서 그녀를 돌봤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도 티레누스가 직접 돌보았다. 숲의 이름을 따 아기의 이름도 실비우스라고 지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어로 힐라이오스였다고 주장한다.
티레누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라틴 인이 라비니아를 찾고 있으며 아스카니우스에 대해 그녀를 죽인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라비니아와 아들을 숲에서 데리고 나갔다. 이런 경험 덕분에 실비우스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모든 후손도 마찬가지였다.
실비우스는 아스카니오스가 죽은 뒤 아스카니오스의 장남인 이울루스와 대결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이 문제는 주민들의 투표로 결정됐다. 사람들은 실비우스의 어머니 라비니아가 왕국의 후계자였다는 사실 때문에 큰 영향을 받아 표를 던졌다.
이울루스는 통치권 대신 신성한 자리를 맡게 됐다. 생명을 지킴은 물론 안락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명예였다. 이런 특권은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후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들은 조상의 이름을 따서 율리우스 씨족이라고 불린다. 이 씨족은 최고이자 가장 저명한 귀족가문이 됐다. 그리고 많은 장군을 배출해냈다.
실비우스는 29년 동안 통치권을 행사하다가 아들 아이네아스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아이네아스는 다시 31년간 왕 자리를 지켰다. 그의 뒤를 이어 라티누스가 41년, 알바가 39년, 카피투스가 26년간, 카피스가 28년간 통치했다. 카피스의 뒤를 이어 다른 카피투스가 다시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어 티베리누스가 8년간 국왕으로 재임했다. 이 왕은 알불라 강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체는 강물에 떠내려갔다. 그래서 이 강에는 그의 이름을 붙여 테베레 강이라고 부르게 됐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아그리파는 41년간 통치했고, 독재자 유형인데다신에게 불경했던 할로키우스는 18년간 왕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의 능력을 무시했던 그는 번개는 물론 천둥을 닮은 소리를 만들어내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번개가 연거푸 그의 집을 때리고 폭우가 쏟아지는가 하면 알바가 자리 잡은 호수 수위가 이례적일 정도로 높아지는 바람에 그의 집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도 호수 주변 날씨가 맑고, 수위가 낮아지면 열주회랑은 물론 거주지의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아벤티누스가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됐는데,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에 지명이 붙여졌다. 그는 37년간 자리를 지켰고, 뒤를 이어 프로카가 23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이후 형 누미토르가 차지해야 할 나라를 빼앗은 아물리우스가 42년간 왕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아물리우스가 베스타 여사제의 두 아들인 로물루스, 레무스 형제에게 살해당한 뒤 그들의 외할아버지는 누미토르는 법적으로 그의 것이었던 왕 자리를 되찾았다. 트로이 함락으로부터 332년 이후인 누미토르의 재위 두 번째 해에 알바 인은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앞세워 식민지단을 파견해 로마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