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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Nov 10. 2020

3. 로마의 건국(1)

건국 시기와 창건자를 둘러싼 의문



로마 건국의 시기와 창건자를 놓고 큰 견해 차이가 있다. 나는 이 주제를 놓고 보편적 합의가 이뤄진 듯이 단순히 피상적 설명만 늘어놓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고대 작가인 게르기스의 케팔론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는 트로이 전쟁으로부터 두 세대 이후에 건립됐다. 트로이에서 아이네아스와 함께 달아난 사람들이 세웠다. 그들은 건국자의 이름을 로물루스라고 불렀다. 그는 식민지단의 지도자였으며, 아이네아스 아들 중의 하나였다. 아이네아스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아스카니우스, 에우리에온, 로물루스, 레무스였다.’


데마고라스, 아가틸루스 등 많은 역사학자는 로마 건국 시기와 창건자가 식민지단 지도자였다는 점에 동의한다. 아르고스 여사제 역사의 저자인 헬라니쿠스는 다르게 말한다. 시게움의 다마스테스와 다른 역사학자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아이네아스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몰로소이 섬에서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의 건국자가 됐다. 트로이 여자 로메의 이름을 따 도시를 로마라고 불렀다. 이 여자는 방랑 생활에 너무 지친 나머지 다른 여자들을 부추겨 여러 배에 불을 질렀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이렇게 설명한다.


‘아카이아 인 중 일부가 배를 타고 트로이에서 귀향하던 도중 카페 말레아에서 급회전하다 전복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동안 경로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파도에 휩쓸려 다녔다. 바다의 여러 곳을 헤매다 마침내 티레니아 해 인근에 있던 라티니움이라고 불리는 오스키 족의 땅에 도착했다. 땅을 보고 기뻤던 그들은 배를 정박시키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에 다시 항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밤중에 배에서 불이 나 항해를 할 수 없게 됐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정박한 땅에서 살게 됐다. 이 운명은 트로이에서 포로로 데려가던 포로 여성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녀가 배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아카이아에 도착하면 노예로 팔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시라쿠사의 참주 아가토클레스에 대한 책을 썼던 칼리아스는 다른 설명을 내놓는다.


‘로메는 여러 트로이 인과 함께 이탈리아에 왔던 트로이 여성이었다. 그녀는 원주민 왕 라티누스와 결혼해 세 아들 로무스, 로물루스, 텔레고누스를 두었다, … 도시를 세우고는 그곳에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다.’




역사학자 크세나고라스의 생각은 이러하다. 


‘오디세우스와 키르케는 세 아들 로무스, 안테이아스, 아르데이아스를 두었다. 이들은 세 도시를 세우고는 그곳에 자신들의 이름을 붙였다.’


칼키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이렇게 적었다.


‘로마의 건국자는 로무스다. 일부 사람들에 따르면 로무스는 아스카니오스의 아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에마티온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로마는 로무스에 의해 건국됐다. 그는 이탈루스와 라티누스의 딸 리우카리아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로마의 건국자로 다른 사람을 지목하는 그리스 역사학자를 더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장황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로마 역사학자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고대 로마 역사학자는 한두 명이 아니다. 이들은 각각 신성한 동판에 보존돼 있는 고대 설명에서 자료를 얻었다. 


이들 중 일부는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아이네아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설명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아이네아스의 딸이 낳은 두 아들이었다. 아이네아스는 원주민과 협정을 체결한 뒤에 두 형제를 원주민 왕 라티누스에게 인질로 건넸다. 라티누스는 이들을 환대한 뒤 훌륭한 관직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자 후손 없이 죽었을 때 그들에게 왕국의 일부 지역을 떼어줘 다스리게 했다.’ 


다른 역사학자의 주장도 있다.


‘아이네아스가 죽은 뒤 라틴 인의 통치권을 계승한 아스카니오스는 나라와 병력을 셋으로 나눠 두 부분을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주었다. 그는 알바와 다른 도시를 건설했고, 레무스는 증조할아버지 카피스의 이름을 딴 도시 카푸아, 할아버지 안키세스의 이름을 딴 안키사, 아버지의 이름을 딴 아이네이아와 자신의 이름을 붙인 로마를 각각 만들었다. 로마는 한 동안 버려졌다가 알바인이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지도자로 삼아 파견한 다른 식민지단에 의해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로마에는 두 개의 거주지가 있었다. 하나는 트로이 전쟁 이후에 세워진 작은 거주지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거주지를 세우고 열다섯 세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다. 


더 먼 과거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 번째 로마를 발견할 수도 있다. 위에서 말한 두 로마보다 더 오래된 로마다. 아이네아스와 트로이 인이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세워진 로마다. 이 주장은 평범한 현대 역사학자가 내놓은 게 아니다. 시라쿠사의 안티오쿠스가 한 말이다.


‘이탈루스가 늙어 모르게스가 이탈리아를 다스리고 있을 때 영역은 타렌툼에서 포세도니아에 이르렀다. 당시 로마에서 추방당한 한 남자가 그에게 왔다. 이름은 세이켈루스였다.’


다른 시라쿠사 역사학자에 따르면 고대 로마는 트로이 전쟁 이전에 발견된다. 하지만 이 도시가 오늘날 로마와 같은 지역에 있던 도시인지, 다른 도시가 우연히 같은 이름으로 불린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로마의 건국과 관련해서 시칠리아의 티마이우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카르타고와 같은 시기에 로마가 건국됐다.’


그때는 첫 올림픽이 열리기 38년 전(BC 813년)이었다. 원로원 의원인 루키우스 킨키우스는 열두 번째 올림픽의 네 번째 해(BC 728년) 무렵이었다고 하고, 퀸투스 파비우스는 여덟 번째 올림픽의 첫 해(BC 747년)였다고 한다. 



포르키우스 카토는 그리스 식 계산법에 따라 시간을 내놓지는 않는다. 고대 역사의 날짜를 계산하는 데 어느 역사학자보다 신중했던 그는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432년 후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를 에라토스테네스(그리스의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의 『연대기』와 비교하면 일곱 번째 올림픽의 첫 해(BC 751년)가 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저작에는 흠이 없다는 사실을 로마의 연대기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의 연대기와 동일하게 됐는지를 제시한 다른 책에서 이미 설명했다.  


메갈로폴리스의 폴리비우스처럼 ‘로마는 일곱 번째 올림픽의 두 번째 해(BC 750년)에 건국됐다’고 믿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로마의 고위 사제단이 보관하고 있는 평판을 더 조사해보지 않고 믿음에 만족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래서 나에게 더 호소력을 있는 이유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 책에서 상세한 설명을 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결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만 설명할 생각이다. 그 문제는 이렇다.


갈리아 족의 침입으로 로마가 함락된 것은 아테네에서는 프리기온이 아크론으로 재임할 때였는데, 98번째 올림픽의 첫 해였다. 이 사실은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내용이다. 로마의 함락 이전 시간을 왕정 폐지 이후 첫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로 되돌리면 122년이라는 시간이 나온다. 


이 문제는 다른 방법, 특히 감사관의 기록으로도 입증됐다. 이 기록은 조상 때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것이며, 다시 아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후손에게 물려준다. 마치 가족의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이런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감사관 집안의 많은 저명인이 있다. 


기록을 보다가 로마 함락 한 해 전에 인구조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날짜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붙여져 있었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와 티투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가 집정관일 때, 왕정 폐지로부터 119년 이후에.’


갈리아 족의 침략이 이 인구 조사로부터 2년 뒤에 일어났기 때문에 120년이라는 시간이 완성되는 것이다. 만약 이 시간 사이에 서른 번의 올림픽이 있었다는 점을 발견한다면 첫 집정관은 68번째 올림픽의 첫 해에 행정관 업무를 시작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시간을 왕정 폐지로부터 로물루스 시대로 되돌린다면 244년이 된다. 이것은 일곱 왕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한 순서는 물론 재위 기간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는 37년간 통치했고, 그가 죽은 뒤 1년간은 왕이 없었다. 이어 백성이 선택한 누마 폼필리우스가 33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툴루스 호스틸리우스가 22년,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24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가 38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44년간 재위했다. 마지막으로 세르비우스를 죽인 독재자이며 정의를 무시했기 때문에 ‘거만한 왕’이라고 불린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25년간 왕 자리를 지켰다. 


일곱 왕의 재위 기간은 총 244년, 올림픽을 61차례 치른 세월이기 때문에 아테네의 카롭스가 10년 임기의 아크론 첫 해를 맞았던 일곱 번째 올림픽의 첫 해에 로물루스는 통치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설명이다. 로마를 세운 사람이 누구였고 어떻게 해서 식민지단을 이끌고 나오게 됐는지, 그리고 로마 정착과 관련한 다른 사항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언급했다. 여러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 그 내용을 설명한다. 따라서 가장 그럴 듯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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