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건축의 진주 클레멘티눔

by leo


카를로바 거리 입구의 왼쪽 모퉁이에는 입구가 아주 작은 하얀색 교회가 보인다. 프라하에서 가장 훌륭한 초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라는 평가를 받는 성 살바토르 교회다. 정면의 모습만 보면 그다지 중요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은 만만하게 생각할 곳이 아니다. 여기가 바로 클레멘티눔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클레멘티눔의 본격적인 역사는 16세기에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재임 1526~1564년) 덕분이었다. 그는 1526년 합스부르크 출신으로서는 처음 보헤미아 왕 자리를 차지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를 성공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기를 꺾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테스탄트를 폭력적으로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전쟁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 일을 비폭력적으로 진행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육 활동과 설교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페르디난트가 찾아낸 방법은 ‘가톨릭의 칼’이었던 예수회였다. 1540년에 탄생해 활동력이 매우 강했던 예수회는 목표를 추진하는 데 가장 좋은 무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예수회를 설립한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에게 수도사들을 보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이그나티우스가 특별히 선발해 파견한 예수회 수도사 12명이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1556년이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옛 도미니크 수도회의 건물이 있었던 카를로바 거리의 땅을 사들여 예수회에 기부했다. 예수회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황제의 지원을 받아 수도원 인근의 저택 32채, 정원 일곱 곳, 교회 3곳, 수도원 한 곳을 더 매입했다.


돈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예수회는 옛 도미니크 수도원 일대를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고칠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성 살바도르 교회와 대학부터 지었다. 나중에는 점점 더 많은 건축물을 덧붙여 나갔다. 그들이 지은 건물은 오늘날 새 프라하 시청사가 있는 마리안스케 광장까지 퍼져 나갔다. 이렇게 해서 170년 동안 꾸준히 건설한 결과물이 바로크와 고전주의 양식의 혼합체인 클레멘티눔이었다.


여러 세대를 이어 진행된 공사에는 카를로 루아고, 도메니코 오르시 막시밀리안 칸카, 킬리안 이그낙 디엔첸호퍼 등 당시의 유명한 건축가들이 모두 참여했다. 완성 단계에 이른 클레멘티눔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사람들은 이곳을 보면서 ‘프라하 바로크 건축의 진주’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예수회는 원래 건축 활동에 매우 뛰어난 장점을 가진 조직이었다. 그들은 클레멘티눔을 일종의 성채처럼 지었다. 그곳을 ‘우리의 섬 클레멘티눔’이라는 뜻인 ‘인술라 노스트라 클레멘티눔’이라고 불렀다. 예수회는 클레멘티눔에 교회를 두 개 만들었다. 먼저 건설한 성 살바도르 교회와 그 이후에 설립한 성 클레멘스 교회였다. 이곳이 클레멘티눔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성 클레멘스 교회에서 이름을 따온 덕분이었다.


클레멘티눔은 채소, 곡식을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정원 다섯 곳과 하수구 시설은 물론 인쇄실, 의료실과 약국, 학습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외부와 단절되더라도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모든 공간과 시설을 다 갖고 있었던 셈이다. 도서관, 천체 관측소, 학교, 국내외의 학생 70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도 있었다. 대형 홀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학, 음악, 그리고 문학에 바친 홀까지 있었다. 나중에는 극장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화려한 오페라와 연극이 상연됐다.


예수회는 종교 활동 이외에 천문학, 수학, 물리학 같은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쏟았다. 이들이 만든 대표적인 과학 시설은 천문학자 요셉 스테플링에게 주문해 1722년에 체코에서는 처음 만든 천문탑이었다. 클레멘티눔의 천문 연구시설로는 천문탑만 있는 게 아니었다. 메리디안 홀에는 지금도 중세시대 천문기구 원본이 전시돼 있다. 과거에는 시간을 알려주던 기구였다. 정오가 되면 햇빛이 이 홀의 바닥에 긴 선을 그린다. 시간이 낮 12시라는 걸 표시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도 매일 정오가 되면 클레멘티눔의 천문탑에서 깃발을 흔들어 정오라는 걸 프라하 시민들에게 알려주었다.


예수회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지극한 열정을 쏟았다.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할 능력을 갖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이들은 굳이 교육 영역을 신학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많은 학생에게 교회에서 배우거나, 아니면 과학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예수회는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기 위해 클레멘티눔에 학교를 만들었다. 1616년에는 대학교로 승격시켰다. 프로테스탄트인 후스파가 운영하는 카를대학교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페르디난트 2세가 이끄는 가톨릭 연합군이 1620년 백산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반군을 누르고 보헤미아를 장악하자 예수회는 카를대학교를 흡수 통합했다. 하나가 된 대학교 관리는 예수회 수도사들이 맡았다. 대학교 본부는 클레멘티눔에 설치했다. 물론 나중에 예수회가 프라하에서 쫓겨난 뒤 두 대학교는 다시 분리됐다.


이처럼 예수회가 체코의 학문과 교육 발전에 기여한 바는 엄청나게 크다. 그래도 체코인들은 예수회의 활동을 평가 절하한다. 프로테스탄트, 특히 후스파를 끔찍하고 잔혹하게 탄압한 경력 때문이었다. 예수회는 정기적으로 공개 종교재판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종교 범죄자 즉 후스파 지지자들을 공개적으로 고문했다. 사람들의 가슴에 두려움을 심어 신심이 두터운 가톨릭으로 키우려는 게 목적이었다. 예수회의 고문은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살아있는 사람의 사지를 절단하거나, 심장과 눈을 뽑아내기도 했다. 혀를 뽑는 건 가장 단순한 것이었고, 중세 시대에 흔했던 화형은 아주 인자한 형벌이었다.


예수회는 도미니크 수도회처럼 ‘분서갱유’도 서슴지 않았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은 신부 코니아슈였다. 그가 맡은 일은 원래 설교였다. 연설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다섯 차례 설교를 하다 지쳐 쓰러질 정도로 열정이 넘쳤다.


코니아슈는 신부로 서임된 뒤 프로테스탄트 및 비 가톨릭 서적을 찾아내 불태우는 일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게 됐다. 그는 설교하는 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은 물론 프라하 곳곳을 돌아다니며 불온한 책을 찾아내는 데 쏟아 부었다. 이런 방식으로 발견한 책은 그 자리에서 바로 불태워 없애 버렸다. 그가 소각시킨 책은 수천 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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