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프라하를 따뜻하게 데워주던 해는 블타바 강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구시가지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아 불이 켜진 곳이 드물었다.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옆의 골목에는 오가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희미한 가로등에서 안개비처럼 노란 빛만 은은하게 흘러내렸다. 골목길 정면에 아치 모양으로 만든 검은 문이 달린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출입구에는 등이 달려있지 않아 아주 깜깜했다. 안쪽에는 꽤 너른 광장이 펼쳐졌다. 바로 운겔트였다. 바닥의 검은색 돌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돼 빤지르르하게 윤이 났다. 주변은 ‘ㅁ’ 자 모양으로 다양한 색의 건물로 둘러싸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덩치 큰 아랍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출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쳐다볼 만큼 미남이었다. 실크 소재에 금실로 기운 화려한 옷을 입어 누구의 눈에나 쉽게 띄는 차림이었다. 여행 온 부자라고 설명해도 쉽게 믿을 정도로 유복한 티가 온몸에 넘쳐흘렀다. 그는 신나는 음악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는 큰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얼마나 오래 됐는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빛바랜 갈색의 문 안쪽에서 축제의 열기가 뜨겁게 새어나왔다. 식당 안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폭소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가만히 둘러보니 결혼 피로연을 베푸는 자리인 것 같았다. 식당 점원 같은 옷을 입은 청년이 아랍인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어디에서 오신 분이세요?”
아랍인은 몹시 거북한 것처럼 심하게 인상을 긁었다.
“저는 이스탄불에서 온 상인 오누르입니다. 오늘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청년은 오누르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오늘 낮에 식당 주인 야쿠바 씨의 큰아들 크로파코바 씨가 가 성 야쿠바 성당에서 결혼했답니다. 지금 결혼 피로연이 진행되고 있는 거지요.”
“그…그럼, 시…신부는?”
“야쿠바 씨의 며느리는 자르밀라 씨예요. 야쿠바 씨의 오랜 친구인 마테이 씨의 딸이에요.”
“자…자르밀라?”
자르밀라라는 이름을 들은 오누르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청년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오누르를 식당 한쪽 구석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일단 여기 앉으세요. 야쿠바 씨는 늘 그러셨죠. 축제에 오신 손님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음식을 가져다 드릴게요.”
청년은 부엌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푸짐하게 가져왔다. 맥주와 독한 술도 잊지 않고 챙겨 테이블에 놓았다. 그는 무엇인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누르를 자꾸 돌아보았다.
오누르는 입을 굳게 다물고 혼자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는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목이 심하게 타오르는 걸 느끼며 뒷맛이 씁쓸한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잠시 후에는 갈증이 더 타오르는지 연속으로 술을 들이부었다. 조금씩 취해가는 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흥겨운 잔치군. 크로파코바 씨는 좋은 분 같아. 자르밀라 씨는 상당한 미인이고.”
오누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원래 나랑 결혼하기로 한 여자였어.”
오누르는 테이블에 놓인 술을 다시 들이마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어. 결혼하려고 날짜까지 잡았지.”
“그런데 왜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거지?”
오누르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필이면 그때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 할 수 없이 귀국하게 됐지. 넉넉하게 1년 정도면 모든 일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자르밀라에게는 돌아오면 결혼하자고 했지. 그녀는 기다리겠다고 약속하더군. 그런데 알라께서는 내가 짧은 시간에 이스탄불을 떠나는 걸 원하지 않으셨던 모양이야.”
“그게 언제 일이야?”
“자르밀라를 떠난 게 벌써 20년 전 일이야.”
“20……년? 음…. 꽤 긴 세월이었군.”
“나도 알아. 안다고! 너무 늦었지. 두 달 전에야 겨우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어. 정말 기뻐서 곧장 자르밀라에게 편지를 보냈지. 이제 돌아간다고. 이스탄불을 영원히 떠날 작정으로 모든 재산을 다 팔았어. 가지 말라는 친척과 친구들의 만류는 냉정하게 뿌리쳤어. 그리고 고생스럽고 긴 여정 끝에 오늘에야 여기 도착한 거야. 식당 앞에 오니 잔치 분위기이더라고. 편지를 받은 그녀가 환영 파티를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지. 기쁜 마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었어. 그런데 모든 건 착각이었어. 너무 늦었던 거야.”
오누르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나지막하게 신음을 내뱉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울먹였다. 어깨가 가볍게 들썩였다. 그는 이번에는 맥주가 아니라 독한 술 한 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그의 귀에 다시 나지막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오느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괴롭기는 하지만 사랑했던 옛 연인의 행복을 빌면서 조용히 사라져야지.”
“그냥 갈 거라고?”
“그…그래…그…그냥…가…갈 거야.”
“오누르! 너는 20년 동안 자르밀라를 재회할 날만 기다렸어. 고향에서 숱한 재촉을 받고도 다른 여자를 만날 엄두조차 내지 않았어. 자나 깨나 늘 그녀만 생각했던 거야.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달려온 것이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빌어 주며 떠날 거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갈 곳이 어디 있어? 고향? 가축을 기를 땅 한 뙈기, 몸을 눕힐 방 한 칸이라도 남은 게 있어? 실패하고 돌아온 너를 친척과 친구들이 환영할 것 같아? 타향에서 외롭게 떠돌아다니다 죽는 게 너의 운명이야. 따져 보자고. 네 잘못이 뭐야? 없어. 앗, 아니다. 하나 있구나! 배신당한 게 네 실수구나. 이제 어떻게 할래? 책임질 게 없으면서 평생 눈물만 흘릴 거야?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볼래? 그게 뭐냐고? 알려 줄까? 자르밀라의 역할이 배신이라면 너의 역할은 바로 복수야.”
오누르는 냉수를 마시듯 단숨에 술을 석 잔이나 연거푸 틀어넣었다. 얼굴이 벌게진 그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오랜 여행에 지친데다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체질이어서 이미 얼근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건 너무 끔찍한 생각이야.”
오누르가 누군지 모르는 목소리에 시달릴 때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싱글벙글대는 사내가 2층 계단에서 내려왔다. 아주 활기차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의 옆에 서 있었다. 1층에서는 엄청난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오늘 결혼식을 치른 크로파코바와 자르밀라였다. 두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본 오누르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낮은 목소리는 다시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두 사람 모두 행복해 보이는군. 너만 빼고.”
시뻘겋게 충혈된 오누르의 눈이 갑작스레 잔인한 살기로 번득였다. 입가에는 냉혹한 미소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게 몹시 위태롭게 보였다.
긴 피로연에 지쳤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자르밀라는 혼자 2층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순식간에 다가간 오누르는 그녀의 손을 잡아 밖으로 억지로 끌고 나갔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소리를 지르거나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크로파코바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계속 술을 마시면서 신나게 춤을 추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술에 취했거나 즐겁게 떠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이 나가는 걸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오누르는 옆 건물의 지하실로 자르밀라를 데려갔다. 장사하러 온 외국 상인들이 물건을 쌓아 두는 창고였다. 그녀는 느닷없는 일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떨궜다. 젖은 눈길에는 초조한 두려움과 면목이 없어 미안한 마음이 엇갈렸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불콰하게 물든 오누르는 옛 연인을 뒤에서 힘껏 껴안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머리카락과 목덜미의 향기를 맡았다. 따스한 봄날 블타바 강변에 피어난 보라색 꽃과 시원한 가을날 비셰헤라트 언덕에 흐르는 바람 냄새가 은근하게 그의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오누르는 왼손을 슬며시 들어 올려 자르밀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오른손으로는 날이 시퍼렇게 번득이는 단검을 허리춤에서 슬며시 꺼냈다. 그는 온몸을 파들파들 떨기 시작한 그녀의 가슴에 날카로운 칼날을 밀어 넣었다. 손아귀에 조금씩 힘을 더해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깊숙하게 욱여넣었다.
자르밀라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간질 환자가 발작을 일으키듯 몸부림쳤다. 오누르는 과거에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의 목덜미에 머리를 대고 죽음의 고통을 음미하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래지 않아 자르밀라의 팔다리는 축 늘어졌다. 오누르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을 느긋하게 빼냈다.
“사랑하는 자르밀라! 이제 모든 게 끝이 났어. 당신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당신의 사랑도, 나의 사랑도.”
오누르는 창고 한쪽 구석에 있던 도끼를 들어 자르밀라의 목을 잘랐다. 그는 창고에 굴러다니던 작은 상자에 그녀의 목을 담아 지하실에서 올라가 식당을 지나 희미한 가로등 불 아래를 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자르밀라가 없어진 사실은 다음날 아침에야 알려졌다. 다들 처음에는 신랑 친구들이 신부를 ‘납치’해 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에는 친구들이 신부를 숨겨 놓으면 신랑이나 신부 가족이 ‘몸값’을 내고 다시 데려오는 게 풍습이었다. 한참 뒤에야 지하실에서 머리가 없는 몸과 피 묻은 옷이 발견됐다. 누가 왜 신부를 죽였고, 머리는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누르는 상자를 들고 프라하를 떠났다. 그는 그해 겨울 체코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병들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갈 곳을 잃고 헤매던 그의 영혼이 돌아간 곳은 운겔트였다. 머리에 터번을 쓰고 값비싼 비단 옷을 입은 터키 유령이 상자를 들고 배회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늦은 밤이 되면 희미한 가로등 빛에 비쳐 희미하게 너울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걸어온다. 키가 훤칠하게 큰 유령은 두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고통스럽게 한탄한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법한 처절한 신음이다.
“사랑하는 자르밀라. 모두 내 잘못이오. 용서해 주시오.”
유령의 눈가에는 고통과 회한의 눈물이 흐른다.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와서 뉘우치고 괴로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후회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일찌감치 찾아오지 않고 항상 모든 일이 끝난 뒤 마지막에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운겔트 끝까지 걸어간 유령은 건물 벽에 부딪히자 몸을 반대쪽으로 돌린다. 그는 이미 엎질러진 일을 두고 하소연을 반복한다. 한 번은 후회고, 한 번은 원망이다. 유령이 된 그의 마음에는 아직도 악마가 남아 있다.
“자르밀라, 나를 배신하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