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 얀 후스

by leo

1.


“우리가 피땀 흘려 일군 열매는 모두 독일 성직자가 빼앗아 갑니다. 파렴치한 성직자는 가난한 노파의 동전 한 푼까지 다 가져갑니다. 교회에 내는 헌금은 결국 성직자의 주머니로 들어갑니다. 성직자가 나쁜 사람입니까, 강도가 나쁜 사람입니까?”


1402년 어느 날,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냥 소리만 큰 게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적개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신도석에 앉은 신도들은 “할렐루야” 또는 “주님, 저들의 탐욕을 용서하소서”라며 그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신도들의 마음에 분노의 불을 지피는 뜨거운 연설을 한 사람은 교회 설교사인 얀 후스였다. 후스의 연설은 시간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 그는 날강도, 파렴치, 탐욕 등의 단어까지 써 가면서 신부, 주교 등을 맹비난했다. 그의 연설이 뜨거워질수록 신도석의 호응도 더 뜨거워졌다.


“하느님에게는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도덕적인 농민이 부유하면서도 파렴치한 주교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대중이야말로 가장 존경받아야 합니다. 포동포동 살찐 독일 주교는 한 푼의 가치도 없습니다.”


후스가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신도를 상대로 이런 연설을 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파렴치한 독일 기업인과 종교인에게 유린당한 조국 보헤미아의 아픈 현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재위 기간(1346~1378)에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프라하는 수공업도시, 상업도시로 성장하면서 보헤미아의 경제 중심지로 발전했다. 대외무역도 발전했다.


카를 4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지 않은 시기부터 보헤미아는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됐다. 풍부한 영토와 지하자원을 노린 독일 봉건주의의 탐욕이 보헤미아로 몰려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도사와 교사가, 나중에는 수공업자와 상인이 몰려왔다. 이들은 금세 보헤미아 전체의 3분의 1에 이르는 토지와 광산을 점유하게 됐다. 보헤미아의 경제는 완전히 독일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독일인은 보헤미아에서 독일법 적용을 받았다. 이들은 경제적, 정치적 특수집단을 형성한 뒤 온 나라를 장악했다. 이 때문에 보헤미아인은 자기 나라 땅에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차별을 받으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당시 보헤미아에서 가장 영향력과 규모가 큰 봉건세력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교황도 보헤미아를 주요 수입원으로 간주해 중요하게 여길 정도였다. 교회 지도부는 모두 독일인이 차지했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후스가 프라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사로 임명된 시기는 이 무렵이었다. 후스의 강연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은 가난한 농민에서부터 부유한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으로 늘어났다.


“교회의 토지 소유는 모든 죄악의 근원입니다. 교회의 토지를 몰수해 국유화해야 합니다.”


후스의 교회 개혁 활동은 강도를 더해 갔다. 당시 교회와 대학 강단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후스는 항상 체코어로 강의를 했다. 체코어를 다듬고 철자법을 개혁했으며,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했다.


교회는 후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죄가 없는 그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럴 즈음 후스가 완전히 교황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면죄부였다. 1411년 교황 요한 23세는 보헤미아에서 면죄부 판매를 시작했다. 심지어 십자군에 참여하면 모두 공짜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공언했다.


후스는 반대 운동에 나섰다. 교황에게는 군대를 동원할 권리가 없으며 돈으로 속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종교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면죄부 판매는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국왕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후스는 프라하 시민을 모아 면죄부 판매 반대 시위를 벌였다. 대학생 두 명이 시위 도중 교황을 매춘부로 묘사한 공연을 벌였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교황은 시위를 조직한 후스를 파문했다. 후스는 이에 맞서 공개적으로 교황을 악마라고 비난했다.


“교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적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왜곡된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와 정반대되는 삶을 사는 교황을 다들 적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교황은 파문으로 후스의 단죄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교황은 1414년 11월 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열리는 공의회에 참석하라고 후스에게 요구했다. 후스의 지지자는 공의회 참석에 절대 반대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목숨을 잃을 게 뻔합니다.”


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지만, 내 주장을 교회의 다른 사람에게 밝힐 좋은 기회이지도 않겠습니까? 하느님이 나와 함께하는데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지크문트로부터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로 갔다. 많은 성직자가 가득 메운 회의장에 후스는 두려움 없이 들어갔다. 교황은 성직자에게 둘러싸여 거만한 자세로 그를 맞았다.


“후스는 이단으로 혹세무민하는 자입니다. 저런 자를 살려두면 예수의 이름을 더럽히고 교회를 망치게 될 것입니다.”


후스가 공의회에 자리를 차지해 앉자마자 이탈리아에서 온 한 성직자가 그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다른 성직자가 그의 말을 이어받아 후스를 ‘악마’라고 몰아세웠다. 둘은 이미 교황청의 지시를 받아 공격의 포문을 열기로 약조한 터였다. 교황은 다른 성직자에게 후스를 일으켜 세우라고 했다. 후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황은 거만한 목소리로 후스를 향해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회개하시오. 당신의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 무릎을 꿇으시오.”


후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진실한 기독교도는 진실을 찾고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진실을 배웁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지킵니다. 설사 그 때문에 죽을지라도…. 주여, 당신의 모든 적과 그들의 오만을 용서해 주소서.”


교황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후스가 입은 사제복을 벗기라고 했다. 머리에 쓴 모자도 벗기고 ‘Haeresiarcha(에레시에르카)’라는 글자가 붙은 하얀 종이 모자를 대신 씌우라고 했다. 에레시에르카는 ‘이단의 두목’이라는 라틴어였다.


“후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한다. 성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권리도 포함된다. 교회를 망치는 악마의 현신인 후스에게 화형의 벌을 선고한다.”


후스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괜히 교황에 맞섰다가 파문이라도 당하면 큰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민족주의자인 후스가 보헤미아로 돌아올 경우 정치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공의회에서 체포당한 후스는 70일가량 수감됐다. 그의 화형식은 1415년 7월 6일에 열렸다. 사형수는 후스의 옷을 모두 벗긴 뒤 손을 뒤로 묶었다. 목에는 줄을 걸어 나무 말뚝에 걸었다. 말뚝 아래에는 짚단과 잘 마른 장작들이 쌓였다. 후스는 화형식에 모인 다른 성직자들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하느님은 내가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설교했는지 다 보셨습니다. 거짓 목격자들이 나에게 어떤 엉터리 증언을 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설교하고 글을 쓴 이유가 인간에게서 죄를 씻어 내려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나는 즐겁게 죽을 것입니다.”


사형수는 후스가 즐겨 읽었던 종교개혁론자 존 위클리프의 저작을 불쏘시개 삼아 장작에 불을 붙였다. 후스는 이렇게 해서 마흔여섯의 길지 않은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교회는 그의 재를 모아 라인 강에 뿌려 버렸다. 그에게는 무덤을 만들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후스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후스의 추종자들은 크게 분개했다. 후스의 처형은 보헤미아 민족을 탄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419년 후스 추종자들은 시청으로 달려가 시의원 13명을 창문에서 광장 바닥으로 내던졌다. 이어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교황청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이렇게 해서 13년의 내전, 즉 후스 전쟁이 시작됐다.



2.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 한가운데에는 큰 동상이 있다. 종교개혁 및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얀 후스를 기리기 위해 20세기 초에 건립한 전신상이다.


동상 건립 운동은 19세기 말에 시작됐다. 1890년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국민 모금 운동을 벌였다. 동상 제작은 1903년에 시작돼 1911년에 끝났다. 추진위원회는 후스 화형 500주년인 1915년 7월 6일에 동상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뒤흔들던 중이어서 대대적인 제막식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추진위원회는 행사를 ‘적당한 시점’으로 미루기로 하고 일부 인사만 모인 가운데 구시청사 회의장에서 조촐하게 제막식을 거행했다. 나중에 치르기로 했던 ‘대대적인 제막식’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끝내 거행되지 못했다.


1918년 탄생한 제1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슈 마사릭(1850~1937년)은 열성적인 얀 후스 지지자였다. 원래 대학교 교수였던 마사릭은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얀 후스의 가르침에 집착했다. 그는 얀 후스를 파괴주의자가 아니라 인도주의를 통해 민족의 부흥을 시도한 인물로 보았다. 얀 후스의 종교, 사회 개혁 운동을 ‘기존 체제를 뒤엎는 후스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얀 후스에게 기존 체제는 독일인이 장악한 가톨릭이었고, 마사릭에게는 체코를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프라하에서 얀 후스 동상 제막식이 열리던 1915년 7월 6일 마사릭은 스위스 제네바에 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해 체코의 독립을 선언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관계자는 물론 여러 나라 대표단 앞에서 “체코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평화는 없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얀 후스 화형 500주년 기념일이자 얀 후스 동상 제막일에 독립을 선포한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마사릭이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 과거 외세를 배격하려 했던 얀 후스를 체코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움으로써 뜨거운 독립의 열망을 과시한 것이었다.


마사릭의 생각은 대다수 체코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다양한 단체가 후스파의 상징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에 참전한 체코 병사들은 무기나 옷에 후스의 상징을 그려 넣었다. 일부 부대는 후스 전쟁 때 활약하다 목숨을 잃은 영웅들의 이름을 부대의 명예칭호로 삼기도 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후스주의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국민이 체코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독일계도 적지 않았다. 슬로바키아계도 마찬가지였다. 보수적인 가톨릭도 후스를 폭력주의자라고 싫어했다.


후스 동상을 잘 살펴보면 당시 체코 민족주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후스 전쟁 때 후스파의 본부였던 틴 성모 마리아 교회를 바라본다. 동상 오른쪽에는 그를 지지하는 전사들이, 왼쪽에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보인다. 전사들은 프로테스탄트의 고난을, 아기를 안은 여인은 고난을 딛고 일어선 ‘체코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동상 아래 부분에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기원하라’는 글이 새겨졌다. 이 글은 후스의 가르침 즉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체코 민족주의의 기본 이념을 의미한다.


1948년 쿠데타로 집권한 공산정권도 후스를 이용했다. 공산당은 후스의 이념을 사회주의 혁명에 부합하는 민중 혁명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후스가 종교 개혁을 주창하고 민족주의를 가르친 장소였던 베들레헴 교회를 중건했다. 교회에 담긴 종교적 측면은 깎아내리고 자유를 찾으려는 민중의 투쟁을 상징하는 기념물이라는 데 중건의 초점을 맞추었다.


후스 사망 600주년인 2015년 체코 정부는 구리로 종을 만들어 베들레헴 교회의 탑에 설치했다. 교회의 벽에는 ‘진리를 위하여’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 문구는 햇빛이 잘 들어 벽에 뚜렷한 그림자가 생길 때에만 선명하게 잘 보인다. ‘진리는 어두운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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