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하얀 유니콘의 집’

by leo


1.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수업을 진행하고 연구 논문을 작성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낸 탓에 무척이나 지친 상태였다. 그는 1908년 스위스 베른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경력을 시작했다. 취리히대학교에서는 이론물리학 부교수로 일했다. 정규직 교수가 아니어서 월급이 적은 데다 강의를 많이 맡아 매일 일정은 바쁘고 피곤하기만 했다.


“여보! 편지가 왔어요. 보낸 사람은 오스트리아 빈의 황실이래요. 누굴까요?”

“빈 황실에서 편지가 왔다고? 그곳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누구지?”


아인슈타인이 지친 몸을 겨우 달래 정신을 차릴 무렵 아내 밀레바가 편지 한 통을 불쑥 내밀었다. 그는 편지를 받아 겉봉투에 적힌 주소를 읽어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 교육부 장관 보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 알버트 아인슈타인 받음.’


아인슈타인은 주소를 보고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의 교육부 장관이 그에게 편지를 보낼 일은 없었다.


‘나는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닌데 왜 빈의 교육부 장관이 편지를 보낸 거지?’


아인슈타인은 책상에서 편지칼을 꺼내 봉투를 뜯었다. 아주 화려한 편지지에 깔끔한 글씨가 간단한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그는 여전히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용을 읽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교육부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 폐하의 지시를 받아 취리히대학교 이론물리학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를 체코 프라하 카를대학교의 이론물리학과 정교수로 임명하고자 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일 뜻이 있다면 지금 당장 빈으로 오셔서 계약조건을 협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빈은 물론이거니와 프라하에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왜 오스트리아 교육부가 그를 체코 카를대학교 정교수로 초빙한다는 것인지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나로서는 좋은 제안이군. 비정규직인 부교수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을 것이고 연봉도 훨씬 높겠지. 다만 스위스나 독일이 아니라 프라하라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거기에 가서 살다 보면 정이 들겠지.’


아인슈타인은 다음날 바로 짐을 챙겨 빈으로 달려갔다. 호프부르크 왕궁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장관을 만나자마자 궁금한 내용부터 물어 보았다.


“도대체 누가 저를 카렐 대학교 교수로 추천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부 장관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우리는 원래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과학자인 빈기술대학교의 구스타프 야우만 교수를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거절하더군요. 그때 카를대학교 교수회에서 세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가 1순위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프라하의 카를대학교는 이탈리아 볼로냐대학교, 프랑스 소르본대학교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였다. 하지만 체코는 국력이 약한 데다 유럽 중심부에서 떨어진 곳이어서 카를대학교 교수 자리는 지식인들에게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어떻습니까? 아인슈타인 박사.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조건은 어떻습니까?”

“연봉은 9천 크로네입니다. 올해 서른두 살인 아인슈타인 박사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디에 가도 이만한 대우를 받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 프라하에 새로 지은 아파트를 한 채 드리겠습니다.”


교육부 장관 말처럼 아인슈타인은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장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관도 밝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아인슈타인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프라하로 가기로 했다. 걸림돌은 아인슈타인도, 계약 조건도 아니었다. 그의 프라하행에 반대한 것은 아내 밀레바였다. 세르비아계인 그녀는 프라하에 가기를 싫어했다.


“취리히에는 온갖 민족이 다 살기 때문에 인종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프라하는 다르다고 하더군요. 그곳에는 체코인, 독일인, 유대인뿐이래요. 세 민족 사이에 갈등이 심해서 폭력도 난무한대요. 당신이야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면 되고, 같은 유대인을 만나면 되지만 나는 거기에 어떻게 살아요? 아는 사람도 없고, 밖에 나가면 너무 위험한 곳에서 말이에요.”


아인슈타인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일곱 살, 한 살인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이는 독일어 학교에 보내거나 유대인 학교에 보내면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문제는 아내의 말대로 문제는 아내의 사생활이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지내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박사가 된 이후 처음 제안을 받은 정규직 교수 자리를 포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프라하에서는 수업이나 논문에는 덜 얽매이고 개인적 연구에 더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선택지를 놓고 며칠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프라하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인슈타인이 1911년 4월 1일 프라하에 도착했을 때 카를대학교는 두 개로 나뉜 상태였다. 독일계 학생이 다니는 학교와 체코계 학생이 다니는 학교였다. 그는 독일계 학생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수업을 할 때는 늘 지정된 유니폼을 착용해야 했다. 황금색 리본을 단 검은 코트를 입고, 삼각형 모자를 썼으며, 허리에는 장식용 칼을 매달았다.


아인슈타인의 집은 노동자 계층이 모여 사는 스미초프 구역의 레스니츠카 거리에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서 매우 깨끗했고 프라하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기가 들어가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학교가 있는 곳은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비니치나 거리였다. 그는 매일 집에서 나와 팔라츠케호 다리를 건너 나 모라니 거리를 걸어 파우스트의 집을 지난 뒤 비니츠나 거리의 학교에 도착했다. 그는 매주 월, 수, 금요일 오전 9~10시에 강의를 맡았다. 또 프라하 곳곳에서 초청을 받아 특별강의도 진행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갈수록 프라하를 무척 좋아하게 됐다. 처음에는 학교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프라하라는 도시 자체에 흥미를 갖게 됐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살 때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제대로 없어 유대인이라는 개념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프라하에서 많은 유대인을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아인슈타인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큰 고민은 역시 아내 밀레바였다. 그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프라하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데다 사람을 사귀려고 하지도 않았다. 혼자서 외톨이처럼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지냈다.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월급이 적어도 상관없으니 스위스로 돌아가요.”

“지금 여기서 포기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야. 내 경력은 여기서 끝이라고.”

“당신 경력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어요.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어요.”


아인슈타인은 학교에서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와 말다툼을 하는 게 또 다른 일과가 됐다. 싸우지 않고 하루를 마치는 날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은 취리히에 살 때부터 성격 차이로 자주 티격태격했지만, 프라하에 간 이후로는 싸움이 더 잦아졌고 더 심해졌다.



2.


희미한 전등 아래를 가득 메운 떠들썩한 분위기에는 흥이 넘쳐흘렀다. 살롱 곳곳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은 손님들은 저마다 껄껄,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박장대소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벼운 미소만 띤 채 맞은편에 앉은 친구의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살롱 한가운데 테이블에서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는 중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비슷한 또래의 여러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젊은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 철저한 시온주의 철학자 휴고 베르그만, 동료 이론물리학자 필립 프랑크였다. 다들 아인슈타인보다는 서너 살 적었지만 분명한 가치관을 가졌고 철학, 음악을 좋아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처럼 모두 유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즐겁게 대화를 나눈 곳은 구시가지 광장의 틴 성모 마리아 교회 옆에 있는 ‘하얀 유니콘의 집’이었다. 집 주인은 약사인 막스 판타였다. 작가이자 인지학자였던 그의 아내 베르타 판토바는 건물 1층에서 문학 살롱을 운영했다. 부부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어서 살롱에는 그들처럼 주로 체코에 살던 독일어권 유대인 지식인이 모였다.


“저기 피아니스트 오틀리 나겔 양이 들어오는군. 그렇다면 아인슈타인 박사의 바이올린 연주를 안 들어 볼 수 없지.”


‘하얀 유니콘의 집’ 문을 열고 한 젊은 여성이 들어오자 막스 브로트가 박수를 치며 아인슈타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살롱의 앞에 설치된 피아노 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곧바로 여성에게 뛰어갔다.


“나겔 양! 아인슈타인 박사가 당신이 오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시죠? 어서 모자를 벗고 피아노 앞에 앉으시죠?”


막스 브로트가 나겔 양이라고 부른 여성은 쑥스러운 듯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아인슈타인에게 목례를 한 다음 피아노 앞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인슈타인은 언제 가져왔는지 바이올린을 목에 가져다 댔다. 이 모습을 본 살롱 손님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큰 박수를 보냈다.


“♪~~♩~~♬.”


나겔은 직업적 피아니스트였지만 아인슈타인의 연주 실력은 프로급은 아니었다. 취미로 배우는 아마추어 중에서 제법 잘 연주하는 정도였다. 물론 ‘하얀 유니콘의 집’에 모인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않았다. 이들은 체코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이었고 음악, 미술, 건축 같은 예술에 박식했다. 평소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의 오페라 공연이나 루돌피넘의 음악 연주회에 자주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아인슈타인의 평범한 바이올린 연주에 열광한 것은 그가 유대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유럽에서 각광받는 자랑스러운 과학자이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린 연주를 마친 아인슈타인은 큰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던 친구들은 어깨를 두들기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막스 브로트가 이번에는 카프카를 일으켜 세웠다.


“이 친구가 요즘 재미있는 소설을 하나 썼어. 직장인이 괴물로 변한다는 내용이지. 아직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어. 오늘 우리에게 일부분만 들려주기로 했어. 다 같이 박수로 이 소극적인 친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자고.”


카프카는 쭈뼛쭈뼛하며 머리를 긁었다. 그러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종이뭉치를 꺼내 펼쳤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야. 앞부분만 대충 썼어. 다들 들어보고 소감을 말해 줘. 그럼 작품을 더 쓸 때 반영할 수 있을 거야. 자! 그럼 잘 들어.”


아인슈타인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프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과학서적을 많이 읽지만 소설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이런 그에게 살롱에서 만나는 카프카 같은 소설가는 신기하면서 반가운 친구였다. 그는 눈과 귀는 물론 온몸의 촉각을 곤두세워 카프카의 낭송을 들었다.


아인슈타인의 프라하 생활은 불과 1년 반 만에 끝났다. 이유는 매일 집에 들어가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아내 말리바의 잔소리였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취리히로 돌아가자며 소리를 질렀다. 아인슈타인은 프라하를 정말 좋아했고, 프라하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취리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취리히처럼 강의와 논문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 개인 시간이 많아 늘 하고 싶었던 ‘상대성 이론’을 심도 있게 연구할 수 있었다. 그에게 프라하보다 더 좋은 장소는 유럽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년 넘게 이어진 아내의 잔소리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아내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빈의 교육부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가 프라하를 떠난 것은 1912년 7월 25일이었다. 취리히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밀레바는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녀는 7년 뒤 남편과 이혼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프라하를 떠난 뒤에도 프라하를 잊지 못했다. 그는 1921년에는 프라하에 잠시 돌아가 천문학연구소에서 특별강의를 진행했다. 주제는 상대성 이론이었다. 강연에 참석한 한 철학자가 상대성 이론을 반박하면서 화를 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인슈타인은 대답 대신 바이올린을 꺼내 천천히 연주했다. 사람들은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하얀 유니콘의 집’은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다. 1965년에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하니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다. 건물의 기초 부분은 10~12세기에 유행했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1천 년 전에 처음 건설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후에 여러 차례 새로 지었기 때문에 현재 건물이 1천 년 전의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얀 유니콘의 집’은 과거에는 연금술 및 신비주의와 관련이 있던 곳이었다. 16세기에는 타디아쉬 하젝 자주크라는 사람이 살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를 위해 일하던 점성술사 겸 연금술사였다. 나중에는 제로님이라는 마법사와 알즈베타라는 점성술사가 살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마법을 사용해 유니콘을 만들었다. 철없는 어린 동물은 너무 난폭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민원이 빗발치자 두 사람은 할 수 없이 어렵게 창조한 유니콘의 숨을 직접 끊어 버렸다.


연금술사, 마법사, 점성술사가 살았던 집인 만큼 돌 양의 집에 붙은 상징물에도 연금술과 관련된 의미가 담겨 있다. 왼쪽 기둥을 보면 초승달과 해가 새겨져 있다. 연금술에서 해는 금, 달은 은을 상징한다. 또 능동과 수동, 무한한 정적과 끝없는 활동을 뜻한다. 두 가지 힘을 합치는 것은 연금술의 목표였다.


아인슈타인이 단골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뜻에서 하얀 유니콘의 집 출입구에는 아인슈타인의 얼굴을 새긴 청동판이 붙어 있다. ‘아인슈타인은 카프카 등이 있는 자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는 글도 새겨져 있다. 아인슈타인은 카프카 등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당시에는 낯선 개념이었던 상대성 이론을 열띤 목소리로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카프카를 포함한 대다수 참석자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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