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보브스케 디발도와 돈 조반니

by leo


1.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아직 바깥은 어두웠다. 오전 6시 무렵 잠에서 깨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는 전날 밤 빈 시내 멜그루브 식당에서 열린 연주회에 참석했다가 늦게 귀가했다. 꽤 피곤했지만 아침이 되자 몸은 저절로 의식을 회복했다.


‘이상한 일이군. 왜 손님이 오지 않는 걸까?’


1786년 하반기부터 모차르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성탄절을 앞둔 시점인데도 여러 차례 연주회 수입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장권이 절반 이상 팔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제 같은 경우에는 150석 중에서 겨우 30석이 찼을 뿐이었다.


‘요즘 들어 나를 초청하는 귀족도 드물고 작곡 의뢰도 뜸해졌어. 연주회에서도 돈을 못 벌면 안 되는데.’


모차르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음악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수준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음악 소비자가 바뀐 것도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던 모차르트의 눈에 편지 한 통이 보였다. 간밤에는 피곤해서 바로 침대에 눕는 바람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겉봉투에는 ‘프라하’라는 발신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파스쿠알레 본디니’였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구나. 누구일까? 프라하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요세피나 두슈코바뿐인데.’


모차르트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뜻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친애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씨. 저는 프라하의 음악 기획사 사장 파스쿠알레 본디니입니다. 프라하에서는 모차르트 씨의 음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피가로의 결혼’은 공연할 때마다 매진됩니다. 다들 모차르트 씨를 직접 보고, 모차르트 씨의 연주를 직접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여러 귀족과 음악 애호가가 뜻을 모아 모차르트 씨를 프라하로 초대하기로 했습니다. 교통비와 숙식비는 모두 우리가 부담하겠습니다. 모차르트 씨가 연주회를 열고,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할 기회도 마련하겠습니다. 물론 수수료는 지불될 겁니다.’


편지를 다 읽은 모차르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프라하는 여섯 살이던 1762년 빈을 처음 방문했을 때 잠시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곳이었다.


‘프라하에 간다고? 콘스탄체도 데려가면 되겠어. 아내와 여행을 간 거라곤 잘츠부르크에 다녀온 것뿐이잖아. 재미있는 여행이 되겠군. 내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있다면 연주회에 손님도 가득 찰 것이고, 그러면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릴 수 있겠어.’


30년 전쟁(1618~48년)에서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 연합군에게 패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프로테스탄트는 대부분 달아나거나 쫓겨났다. 이 탓에 프라하 인구는 크게 줄었고 경제는 침체일로를 겪었다.


프라하의 인구가 다시 늘고 경제가 되살아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였다. 프라하는 17세기 이전의 전성기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도시가 됐다.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하자 프라하의 귀족은 문화예술로 눈을 돌렸다. 가장 먼저 1783년 노스티츠 국립극장을 건설했다. 공사비를 낸 사람은 프란츠 안톤 폰 노스티츠-리넥 백작이었다. 지금의 스타보브스케 디발도, 즉 국민극장이었다.


1783년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에서 모차르트의 ‘후궁탈출’이 공연됐다. 입구에서 손님을 돌려보내야 할 정도로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 공연 덕분에 프라하에서는 모차르트의 인기가 급속히 높아졌다. 3년 뒤인 1786년 말에는 ‘피가로의 결혼’이 스타보브스케 디발도 무대에 올랐다. 빈에서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던 이 작품도 대성공을 거뒀다. 당시 프라하 신문 <에버포스탐차이퉁>은 ‘피가로의 결혼만큼 프라하에 센세이션을 불러온 작품은 없었다. 끊임없이 박수가 쏟아져 나온 가운데 여러 차례 공연이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본디니가 모차르트를 프라하에 초청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런 역사적, 음악적 배경 때문이었다. 그는 모차르트를 데려올 경우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차르트가 아내 콘스탄체와 함께 프라하에 간 것은 1787년 1월 11일이었다. 그는 트후노브스카 거리에 있는 툰-호헨슈타인 백작의 저택에 묵었다. 프라하성 바로 아래 네루도바 거리에 있는 화려한 궁전 같은 집이었다. 모차르트를 초대했다는 사실을 본디니에게서 들은 백작이 스스로 집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었다. 저택은 지금 영국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차르트 부부는 프라하에 도착한 날 저녁 브렛펠트 저택으로 달려갔다. 저택의 주인은 요제프 브렛펠드였다. 그는 음악은 물론 미술, 철학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책과 그림을 수집해 집에 보관했다. 집이 워낙 커서 무도회와 콘서트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프라하 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와우!”


모차르트와 콘스탄체는 브렛펠트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저택이 정말 화려하고 아름다운 데다 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넓은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개인 저택이 이렇게 아름답고 넓을 수가 있나!”


브렛펠트 저택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모차르트가 빈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곳에는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모두 모였다.


“어머나! 저 분이 모차르트 씨인 모양이야!”


여성들은 모차르트 부부를 보고 수군거렸다. 모두의 얼굴에는 동경심과 존경심이 가득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차르트는 그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모차르트 부부는 무도회에서 춤을 추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행사장 곳곳을 다니며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두 젊은 여인이 흥분된 표정으로 모차르트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모차르트는 모른 척하면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들어보았다.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에서 공연되는 ‘피가로의 결혼’ 표는 샀니?”

“응! 남편이 사 왔어. 극장 예매 매표소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몰렸던지 하마터면 못 살 뻔 했대.”


무도회장에 흐르는 음악은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곡 중 일부를 춤곡으로 개작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쉴 때는 너나할 것 없이 ‘피가로의 결혼’ 이야기만 했다. 누구나 ‘피가로의 결혼’을 본다는 단순한 사실에 흥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여성들 사이에 섞여 춤을 추거나 농담을 주고받지 않았다. 단순히 그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할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나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구나. 정말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어.’


모차르트는 다음날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에서 열린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했다. 극장의 로열박스에 그와 콘스탄체의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오페라가 시작되기 전에 본디니가 무대에 나가 ‘모차르트가 극장에 왔다’는 사실을 청중에게 알렸다. 극장에서는 뜨거운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차르트 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함성과 박수는 거의 10분이나 이어졌다.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한 모차르트는 아내와 함께 프라하 시내를 산책했다. 툰 백작이나 다른 사람은 동행하지 않았다. 프라하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구시가지 광장을 거쳐 카렐 다리를 건너 툰 백작 저택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모차르트 부부는 구시가지 광장으로 이어지는 젤레즈나 거리를 걸었다. 당시에는 프라하의 중심거리였다. 부부가 한 빵집 앞을 지날 때 뜻밖의 노래가 들렸다.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아리아 중 가장 유명한 ‘백작 나리, 춤을 추고 싶으시다면’이었다. 모차르트는 어떤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지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노래의 주인공은 가수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빵집에서 일하는 어린 종업원이었다.


“백작 나리 춤을 추고 싶으시다면/ 제가 기타로 반주를 해 드리지요/ 주인님이 저에게 배우길 원하신다면/ 새로운 춤을 가르쳐 드리죠.”


모차르트는 종업원을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종업원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노래를 멈추고 물어보았다.


“왜 저를 쳐다보시는 거죠?”

“그 노래는 어떤 곡이니?”


종업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저씨는 ‘피가로의 결혼’도 모르세요? 지금 프라하에서 이 노래를 안 부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모차르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옆에서 빙긋이 미소를 짓던 콘스탄체가 입을 열었다.


“잘츠부르크나 빈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이곳에서 일어나는군요. 이곳 사람들은 당신을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2.


모차르트가 프라하 방문을 마치고 빈으로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가 폭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현장을 목격한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의 지배인 파스칼 본디니는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다.


“올해 가을에 공연할 수 있도록 오페라를 하나 써 주실 수 있을까요? 모차르트 씨가 작곡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흥행에 성공할 겁니다.”


모차르트는 지배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언제쯤 공연하면 좋을까요?”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10월이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지금이 2월이니 여덟 달이 남았군요. 그 정도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오페라 한 곡 정도는 만들 수 있겠습니다. 작곡료는 얼마나 주시렵니까?”


지배인은 빙긋이 웃었다.


“빈에서 받으시는 만큼 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오페라 한 곡 가격은 500굴덴이라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나중에 오페라를 초연하러 올 때 체류비도 부담해 주시는 조건이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지배인은 두말하지 않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모차르트는 두말하지 않고 지배인이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금 빈에 돌아가 봐야 오페라를 의뢰할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 정도 돈이라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빈에 돌아간 모차르트는 극작가 로렌초 다 폰테를 찾아갔다. 그는 프라하에서 제안을 받은 새 오페라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이야기를 만들면 좋을까요?”


다 폰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이탈리아에서 인기를 끄는 오페라가 있어. 자네도 잘 알 거야. 이탈리아어로는 ‘돈 주앙’이지.”

“저도 소문은 들었습니다.”


“1630년에 티르소 데 몰리나가 쓴 대본을 내가 갖고 있다네. 그걸 새롭게 해석해서 아주 재미있으면서 깊이 있는 대본을 하나 만들도록 하지.”

“난봉꾼 이야기라니, 정말 재미있겠습니다. 사람들도 흥미를 가질 만한 스토리가 되겠군요.”


모차르트는 다 폰테에게서 대본을 받자마자 ‘돈 조반니’ 작곡을 시작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정황상 3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작곡의 기본적 얼개를 완성한 것은 프라하에 도착해 친구인 요세피나 두슈토바 부부의 집에 머물던 10월 초였다.


‘돈 조반니’는 원래 10월 14일에 초연될 예정이었다. 10월 8일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결혼식을 치른 작센 공국의 안톤 대공과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파가 이날 프라하를 지나가게 돼 있었다.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에서 ‘돈 조반니’를 초연하려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음악이 너무 어려워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은 곡을 익히는 데 애를 먹었다. 14일에 막을 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안톤 대공 부부는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관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모차르트가 오페라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초연 전날까지도 서곡과 2막의 피날레를 만들지 못한 상태였다. 본디니는 속이 탔다. 하루가 늦어질수록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29일에는 막을 올려야 했다. 그는 28일 저녁 모차르트를 요제피나의 집에 가둬 버렸다.


“오늘 밤은 어디에도 나갈 생각을 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곡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본디니는 모차르트가 갇힌 방 맞은편 방에 다 폰테를 집어넣었다.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상황이 워낙 급하니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차르트 씨가 달아나지 않도록 다 폰테 씨가 감시를 해 주셔야 합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본디니가 울상을 짓자 모차르트는 29일 해가 밝기 전까지 꼭 곡을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속을 썩여서 미안합니다. 오늘 밤을 새겠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모든 게 해결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게 단호하게 부탁했다.


“당신도 나와 함께 오늘 밤을 새야 해. 졸지 않도록 계속 나에게 말을 걸어 줘. 할 말이 떨어지면 ‘천일야화’ 이야기를 해도 돼. 펀치도 자꾸 만들어 줘. 그래도 내가 조는 기색이 보이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등짝을 내리치도록 해.”


콘스탄체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남편 곁을 지켰다. 펀치를 만들어 남편에게 자꾸 마시게 했다. 그런데 펀치에는 술이 약간 들어갔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평소보다 더 심하게 졸았다. 차라리 펀치를 안 마시는 게 나았다. 펀치 탓인지 콘스탄체가 말을 멈출 때마다 모차르트는 꾸벅꾸벅 졸았다. 그녀가 모차르트의 등을 심하게 내리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잠시 눈을 붙이도록 해요. 한 시간 뒤에 깨워 줄게요. 이렇게 졸기만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말에 대꾸를 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책상에 쓰러졌다. 그리고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모차르트가 얼마나 곤하게 잤던지 콘스탄체는 한 시간 뒤에도 깨울 수 없었다.


‘한 시간만 더 자게 놔둬야겠어. 남편 실력이라면 그때라도 작곡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야.’


콘스탄체는 자정이 넘어 새벽 다섯 시 무렵이 됐을 때 모차르트를 깨웠다.


“이제 일어나야 해요. 더 이상 자면 안 돼요. 약속을 지켜야죠. 어서 일어나세요.”


콘스탄체의 간곡한 목소리를 들은 모차르트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에는 아직 졸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눈을 잠시 비빈 뒤 아주 크게 기지개를 켰다. 콘스탄체는 남편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창문을 활짝 열었다. 어두운 창밖에서 차가운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됐어. 눈을 붙였더니 잠이 확 달아났군. 당신 덕분이야. 이제 집중해서 작곡을 해야겠어.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아도 돼. 펀치도 만들지 말고.”


모차르트는 말을 끝내자마자 머리를 책상에 처박고 악보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작곡에 열중했던지 콘스탄체가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


“다 됐어. 이제 끝이야. 본디니 씨를 불러야겠어.”


모차르트가 깃털 펜을 집어던진 것은 아침 일곱 시 무렵이었다. 아직 창밖은 어두웠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본디니는 악보를 들고 필경사에게 뛰어갔다. 필경사가 악보를 다 베낀 것은 거의 정오가 됐을 때였다. 악보는 마련됐지만 문제는 오케스트라가 연습을 할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본디니는 오케스트라에 악보를 전해 주면서 하소연하듯 부탁했다.


“너무 늦었어. 미안해. 어쩌겠나? 이미 일이 이렇게 돼 버린 걸. 자네들은 모두 숙련된 연주자들 아닌가? 연습은 생략하도록 하세. 공연을 할 때 눈으로 보면서 연주해도 될 거야. 평소보다 조금만 더 신경을 집중하면 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기가 막혔지만 본디니의 말처럼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표는 매진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연습하지 않았지만 이날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기가 막혔다. 그들이 이날 오전에야 서곡 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감탄을 쏟아냈다.


“브라보! 브라보! 여러분, 정말 대단합니다.”


‘돈 조반니’는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극장은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꽉 찼다. 공연이 끝나자 오랫동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모차르트는 청중에게 인사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돈 조반니! 나보고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했죠? 그래서 내가 왔습니다.’


돈 조반니는 평론가와 언론으로부터도 호평을 받았다. 당시 프라하에서 발행되던 신문 ‘오베르포스탐츠-자이퉁’은 이날 연주회 분위기를 상세히 보도했다.


‘월요일이던 29일 오랫동안 기다렸던 돈 조반니가 초연됐다. 여러 평론가, 음악가는 ‘이렇게 훌륭한 곡이 프라하에서 연주된 적은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지휘는 모차르트가 맡았다. 그가 극장에 들어가자 세 번에 걸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휘를 마치고 나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돈 조반니는 연주하기에 매우 어려운 곡이었다.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이 모인 청중은 짧은 연습만 하고도 훌륭한 연주를 한 오케스트라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를 초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스타보브스케 디발도 입구에는 오페라에 유령으로 나오는 코멘다토레를 상징하는 유령 조각상이 세워졌다. 오페라가 연이어 성공하자 프라하에서는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차원을 넘어 숭배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났다. 여러 귀족이 그에게 좋은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프라하에 더 있다 떠나라는 것이었다.


“모차르트 씨, 프라하에서 서너 달만 더 계시다 가시죠? 체류비는 우리가 부담하겠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 연주회 기회도 여러 번 만들겠습니다.”


일부 귀족은 아예 프라하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무료로 집을 하나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스타보브스케 디발도에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도 만들겠습니다. 누구보다 모차르트 씨를 사랑하는 프라하에 사시면서 마음 편하게 음악 활동을 이어 가시면 됩니다.”


모차르트는 뜻하지 않은 이색적 제안에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같은 작곡가는 생계를 귀족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프라하 귀족의 수는 너무 적습니다. 저에게 연간 1천 굴덴을 꾸준히 후원해 줄 수 있는 재력을 가진 부자도 드뭅니다. 빈에서는 연간 1만 굴덴을 버는데 프라하에서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겠습니까? 게다가 처음에는 모든 걸 다 해 줄 것처럼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바뀌는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제안은 고맙지만 제가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모차르트는 두 차례 방문에서 뜨거운 환대를 보내준 프라하에 아쉬움을 남긴 채 11월 3일 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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