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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03. 2024

프라하의 유령 프란츠 카프카


1.


프라하 유대인 지구의 두슈니 거리와 베첸스카 거리가 만나는 교차로 모퉁이에는 체코 출신의 유대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 기리는 뜻에서 만든 기념물이 있다. 가슴이 뻥 뚫린 거대한 사내의 어깨에 작은 사내가 올라탄 조각상이다.


프라하로 여행을 간 두 이스라엘 젊은이가 늦은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카프카 기념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두 젊은이가 휴대폰 사진이 제대로 나왔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 카프카 기념물과 스페인 시나고그 사이의 어두운 골목길에 고양이처럼 형형한 눈빛이 나타났다. 


“혹시 막스 브로트를 못 보셨나요? 방금 여기로 지나갔는데….”


두 젊은이가 갑작스러운 눈빛과 목소리에 놀라 주춤하고 있을 때 바싹 바른 사내가 그곳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은 기름을 발라 뒤로 바짝 빗어 넘겼고, 까만 양복에 하얀 셔츠를 입은 40대 초반의 중년 사내였다. 눈은 부리부리했고 귀는 외계인처럼 뾰족했다. 얼굴에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불만스럽고 우울해 보였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특이한 남성을 보고 두 젊은이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몸이 써늘해지는 공포를 느낀 그들은 말을 약간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글쎄요. 여기를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내는 이번에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두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 보세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코는 오뚝하고 콧수염을 길렀습니다. 원고가 가득 든 가방을 하나 들고 있고요.”

“우리는 이곳에 방금 왔습니다. 그전에 지나간 사람이 있었는지는 몰라요. 우리가 온 뒤로는 당신 말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원고를 빼앗아야 해. 절대 출간하지 말고 불태워 버리라고 했는데 나를 속이고 책으로 낸 거야. 사람들이 그걸 보면 얼마나 비웃을까?”


사내는 혼자 중얼거리다 슈이로카 거리를 따라 휑하니 가 버렸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묘한 긴장감과 두려움을 느끼며 묵묵히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아!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도대체 저 사람은 누구일까?”


“이 기념비의 주인이죠.”


두 젊은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등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 젊은이는 다시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낯선 사내가 담배를 피우면서 스페인 시나고그의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예요.”


낯선 사내는 두 젊은이와 사라진 사내의 대화를 들었던 것인지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두 젊은이는 놀라 쿵쾅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죽었잖아요? 방금 그 사람은 유령이라는 겁니까?”


사내는 다 피운 담배를 땅바닥에 던져 발로 끄면서 두 젊은이에게 다가갔다.


“저도 처음에는 유령이라는 걸 믿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 사람을 여러 번 만났죠. 늘 브로트를 찾으러 다니고 있더군요. 저만 유령을 본 것도 아니더군요. 게다가 유령이 여기에만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가 살았던 장소 여러 곳에 수시로 출몰한다더군요. 말라 스트라나에 있는 미국대사관 앞에서도 자주 보인답니다.”


두 젊은이는 카프카를 무척 좋아했다. 그가 쓴 ‘변신’은 여러 번이나 읽었다. 물론 다른 작품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왜 이렇게 된 걸까요?”

“말을 안 하니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브로트를 찾아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걸 보면 짐작할 수는 있죠.”


“그게 뭔가요?”

“카프카는 죽을 때 친구 브로트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모든 글을 불태워 버리라고 했지요. 브로트는 말도 안 된다면서 책으로 출간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다니는 건 그것 때문인가요? 유언을 어겼다고?”

“그렇게 짐작은 합니다. 하지만 모르지요. 다른 이유가 또 있을지….”


두 젊은이는 카프카의 유령이라는 사내가 사라진 골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독특한 내용을 기막힌 문체로 풀어낸 <변신>만큼이나 기괴하게 나타났다 희한하게 사라진 유령이었다. 



2. 


프란츠 카프카 기념물은 조각가 야로슬라프 로나가 2002년에 만들어 이듬해에 제막한 조각상이다. 프라하에 카프카 기념물을 만들자는 생각은 프라하 시청의 후원을 받은 ‘프란츠 카프카 협회’에서 처음 나왔다. 협회는 2000년 ‘유럽문화수도 프라하’의 해를 맞아 기념물 공모전을 열었다. 체코 조각가 7명이 작품을 제출했는데, 심사위원단은 로나의 작품을 선택했다.


기념물은 카프카 탄생 120주년인 2003년에 제막됐다. 동상의 높이는 3.75m이며, 무게는 700kg이다. 아래에 있는 인물은 머리가 없이 양복을 입고 앞으로 걸어가는 자세를 하고 있다. 등에 탄 사람은 그보다 작은데, 카프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앞을 가리킨다. 이 기념물은 카프카가 1912년에 쓴 ‘갈등의 묘사’라는 작품에 나오는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나는 지인의 어깨에 뛰어올랐다. 주먹을 그의 등에 우겨 넣으면서 빨리 걸으라고 재촉했다. 그는 마지못해 앞으로 걸었지만 자주 멈췄다. 나는 구두로 배를 여러 번이나 걷어찼다. 좀 더 생동감 있게 걸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건 효과가 있었다. 우리는 아주 넓지만 아직 미완성인 풍경의 내부로 재빨리 갈 수 있었다.’


아주 희한한 모습의 카프카 조각상이 설치된 장소는 요제포프라고 불리는 유대인 지구의 동쪽 끝부분이다. 조각상을 이곳에 세운 것은 유대인 지구와 기독교 지역의 경계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조각상 왼쪽은 유대인 지구, 오른쪽은 기독교 지역이었다. 


카프카는 틈만 나면 두슈니 거리에서 산책을 즐겼다. 산책을 시작하는 곳은 늘 유대인 지구였지만 얼마 걷지 않으면 기독교 지역이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유대인 지구였다. 이러한 장소에 기념물을 세운 것은 카프카가 유대인과 기독교 사이를 오가며 정체성의 고통에 시달린 경계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였다.


카프카는 1883년 마이셀로바 거리와 라드니체 거리가 만나는 요제포프 남쪽 끝부분의 저택에서 유대인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평생의 대부분을 요제포프와 구시가지 광장에서만 살았다. 다른 모든 프라하의 유대인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에게도 요제포프는 삶의 거점이면서 평생 벗을 수 없는 짐이자 고통스러운 낙인이었다.


카프카는 조국 체코와 고향 프라하에서 늘, 그리고 영원히 이방인이자 주변인이었다.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체코인에게서 홀대받았고,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독일인에게서 외면당했다. 그는 프라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가 가고 싶어 했던 도시는 유대인 약혼녀가 살던 독일 베를린이었다. 1914년 숨 막힐 정도로 편협한 프라하를 떠나 베를린에 가려고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떠날 수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소설에서 프라하라는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데, 프라하에서 탈출하고 싶은 그의 욕망 그리고 끝내 탈출하지 못한 그의 좌절을 상징한다.


카프카가 프라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1902년 유대인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난다. 


‘프라하는 우리를 나가지 못하게 한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프라하라는 어머니는 턱 여러 개를 갖고 있다. 하나는 여기에 맞춰져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양쪽에서 턱을 공격해야 한다. 비셰헤라트와 헤라드차니에서. 바라건대 우리는 달아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돈을 벌기 위해 혼자 시골에서 프라하로 상경한 사람이었다. 그가 프라하로 갈 수 있었던 것은 1848년 역사상 처음 체코 유대인에게 주거 이전의 자유가 주어진 덕분이었다. 헤르만 카프카만 그런 게 아니라 시골에서 살던 많은 유대인이 대거 프라하 등의 도시로 이동했다. 이 시대의 체코 유대인은 체코의 문화, 언어보다는 지배 세력이던 오스트리아, 독일의 문화와 언어를 선호했다. 1890년에 프라하 유대인의 94%가 독일어를 제1언어로 사용했다는 조사 결과는 이를 잘 보여 준다. 


유대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 시기에 체코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압제자로 여겼다. ‘여기에 빌붙은’ 유대인은 압제를 돌아가게 하는 톱니바퀴에 달린 톱니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와는 달리 독일인은 유대인을 기회주의자라며 멸시했고, 함께 살 수 없는 인종이라며 거부했다. 


결국 유대인은 체코인은 물론 독일인에게서도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는 체코인, 독일인, 유대인 사이를 오갔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라며 당시 유대인의 소외를 아쉬워했다.


카프카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 그와 같은 세대의 젊은 유대인은 돈을 많이 번 부모의 지원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체코 유대인 사회의 지식인 제1 세대였다. 하지만 이들은 민족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늘 괴로워했고, 세상에서 고립된 정체성을 재정립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결과는 프란츠 카프카,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카프카는 1910~1920년대에 체코 문학계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자 주변인이었다.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쓰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에서도 외면당했으니 유럽의 다른 나라에 알려지거나 인정을 받을 방법은 없었다. 그가 유럽과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친구인 막스 브로트가 ‘모든 소설을 소각하라’는 유언을 무시하고 그의 사후에 작품을 출간한 덕분이었다.


브로트가 책을 낸 덕분에 1930년대 프랑스에서 카프카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같은 실존주의 작가는 그를 숭배할 정도였다. 카뮈는 1936년 카프카를 이해하겠다면서 프라하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프라하 지식인 사회에서 카프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프카가 체코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로 변한 1950년대였다. 체코인이 그의 문학적 성과를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었고, 그가 쓴 소설의 내용이 마치 ‘예언’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공산정권 출범 이후 체코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수천 명의 정치범이 생겼는데, 이런 과정이 카프카가 1914~15년 사이에 쓴 ‘심판’의 내용과 거의 흡사했다. 그의 소설이 비밀리에 널리 소개되자 체코의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는 그를 영웅이자 예언자로 생각했다. 그 덕분에 1963년 프라하 북동쪽 리블리체에서 카프카 국제 학술회의까지 열리게 됐다. 서유럽과 동유럽 학자, 작가가 모여 카프카를 주제로 논의하는 첫 회의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상황은 급변했다. 카프카는 다시 체코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도 이유는 문학 때문이 아니라 정치 때문이었다. 체코의 지식인은 ‘프라하의 봄’ 이전보다 더 극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괴로워하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1977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났고 그가 쓴 책은 모두 판매 금지됐다. 카프카의 운명도 다르지 않아 그의 작품은 서점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카프카가 다시 체코로 돌아간 것은 벨벳혁명 이후였다. 1989년 벨벳혁명이 일어나서 공산정권이 몰락하자 카프카는 체코의 다른 예술가처럼 복권됐다. 카프카를 기념하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하벨 대통령의 1999년 이스라엘 방문 직후부터였다. 이때 말라 스트라나에 카프카 박물관을 건설하는 사업이 진행됐고, 이듬해에는 요제포프에 카프카 기념물을 세우자는 제안도 나왔다. 두 사업이 나온 배경은 순전히 정치적이었다. 프라하는 2000년 도시의 슬로건으로 ‘유럽문화수도 프라하’를 정했는데 마땅히 내세울 만한 인물을 찾지 못해 고민하다 카프카를 떠올렸다. 유럽에서 최고의 현대작가로 평가받는 그를 복권시킬 경우 프라하가 유럽에서 문화의 수도이자 다문화의 수도라는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카프카 기념물 사업 이야기가 나오자 프라하에서는 뜨거운 찬반 논란이 벌어졌다. 프라하 시청은 동상을 세워 카프카를 기념하게 되면 관광산업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반대 측은 카프카가 독일어로만 작품을 쓴 유대인이라는 점을 은근히 내세웠다.


19세기도 아니고 뉴밀레니엄의 시대인 21세기에 카프카의 기념물 건립을 둘러싸고 논란이 생겼다는 것은 프라하의 상황을 여지없이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프라하에서 그의 위상을 보여 주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때까지도 카프카 전집이 체코어로 완역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체코어 전집이 나온 것은 2007년이었다.


논란 끝에 프란츠 카프카 협회가 공모전을 진행해 겨우 기념물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물론 기념물 하나가 세워졌다고 해서 카프카가 프라하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는 작가, 역사적 인물이 됐다거나 관용의 도시로 변했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바뀌고 세태가 바뀌면 카프카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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