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로마 창건 당시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고자 한다. 아물리우스가 죽었을 때 누미토르는 왕 자리를 되찾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알바롱가에서 무질서를 몰아내고 이전의 질서정연한 상태를 회복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두 손자에게 다른 도시를 건설하게 함으로써 독립적인 통치를 할 기회를 줘야겠구나. 알바롱가의 인구는 너무 늘어났어. 일부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게 좋겠어. 과거 적이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내보내야 해. 이렇게 하면 남은 신하들을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겠지.’
누미토르는 이런 계획을 두 손자와 의논해 동의를 얻었다. 그는 두 손자에게 어릴 때 자랐던 곳을 새로운 도시를 세울 지역으로 나눠주기로 했다. 또 알바롱가 주민들도 데려가도록 했다. 새로운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의심을 받는 사람들은 물론 자발적으로 떠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다 포함돼 있었다.
한 도시가 식민지단을 보낼 때 흔히 그러듯이 알바롱가를 떠나려는 사람 중에는 평민도 많이 포함돼 있었고, 최고층 계급의 저명한 인사들도 상당히 포함돼 있었다. 귀족 출신으로 보이는 트로이 계열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후손은 약 50개 가문을 이뤄 지금도 로마에서 살고 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금과 무기 식량도 제공받았다. 또 노예와 짐을 싣고 갈 짐승, 그리고 도시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재료도 제공받았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사람들을 데리고 알바롱가를 떠나 팔란티움과 사투르니아 언덕에서 살던 지역민을 합류시킨 뒤 전체 주민을 둘로 나눴다. 양측에 경쟁 정신을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다. 서로 라이벌 의식을 갖게 되면 일이 더 빨리 마무리될 것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가장 나쁜 악이라고 할 수 있는 불화를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양측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모시는 지도자야말로 전체를 통치할 수 있는 최적임자야!”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마음도 이제는 같지 않았다. 서로 형제의 감정을 느끼지도 않게 됐다. 둘 다 상대를 통치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됐고 평등이라는 단어를 비웃게 됐고 우위를 욕심내게 됐다. 한동안 그들의 야심은 가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한 사건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를 짓는 장소로 같은 곳을 고르지 않았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거주지를 정하자고 제안했다.
“이곳은 우리가 목숨을 건진 곳이야. 그리고 우리가 자랐던 장소지. 여기에는 행운이 넘쳐나고 있어.”
반면 레무스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레모리아라고 불리는 곳을 더 선호했다. 실제로 레무스가 고른 곳이 도시로 더 적합했다. 테베레 강에서 멀지 않았고, 오늘날 로마에서 7㎞ 정도 거리에 있는 언덕이었다.
두 사람의 라이벌 심리와 도무지 화해를 시킬 수 없는 통치에 대한 욕심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승자는 패자에게 모든 경우에 그의 뜻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둘의 불화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할아버지에게 해결책을 부탁하기로 하고 함께 알바롱가로 갔다. 누미토르는 둘에게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도시의 이름을 어떻게 정하고 누구를 지도자로 삼을지 여부를 신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거라. 하루 날을 정해서 두 사람이 각각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장소에 아침 일찍 가서 자리를 잡도록 해라. 그리고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 뒤 조점을 살펴보아라. 더 우호적인 새를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 도시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할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둘은 합의에 따라 정한 날에 시험을 받기 위해 각각 고른 장소로 갔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장소를 골랐고,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으로 올라갔다. 다른 사람은 레모리아에 갔다고 말하기도 한다. 감시인이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언덕에서 벌어진 일을 실제와 다르게 통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늘이 그를 인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물루스는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실제로 조짐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조짐을 나타내는 새를 먼저 본 것처럼 동생에게 사람을 보내 서둘러 오라고 했다.
그가 보낸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이런 식의 속임수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독수리 여섯 마리가 레무스에게 나타났다. 오른쪽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이었다. 새를 목격한 그는 정말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잠시 후 로물루스가 보낸 사람이 레무스를 데리고 팔라티노 언덕으로 갔다.
레무스는 로물루스에게 어떤 새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로물루스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독수리 열두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이 것을 본 로물루스는 용기를 내 새들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왜 너는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을 알고 싶어 하느냐? 분명히 지금 저 새들을 너도 보지 않았느냐?”
레무스는 형의 말에 화가 나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형은 나를 속이려는 거로군.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형에게 넘기지 않겠어.”
이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더 커졌다. 둘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몰래 애를 쓰면서 겉으로는 동등한 권리를 서로 인정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할아버지가 ‘더 우호적인 새를 먼저 보는 사람이 도시를 통치해야 한다’고 조언한 내용 때문이었다.
사실 둘 다 같은 새를 본 것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다만 동생은 더 일찍 봤고, 형은 더 많이 봤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주민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를 옹호하며 다툼에 가세했다. 두 사람의 지시도 없었는데 무기를 들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양측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양측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본 파우스툴루스는 형제의 갈등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실제로는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무장하지 않은 채 싸우는 양측 사이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파우스툴루스를 발견한 사람들은 그를 죽은 장소에 묻었는다. 그 위에는 포로 로마노의 로스트라 인근 핵심 지역에 서 있던 사자 석상이 놓였다.’
레무스도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로물루스는 형제의 죽음과 동료 시민의 상호 학살이라는 비극을 통해 아주 슬픈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레무스를 레모리아에 묻었다. 레무스가 이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고 매우 집착했다는 점을 감안한 처사였다.
로물루스는 슬픔과 회환에 잠겨 낙담했으며 살아갈 희망을 모두 잃어버렸다. 어린 쌍둥이를 받아들여 친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사랑으로 키워준 라우렌티나가 그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는 라우렌티나의 조언을 받아들여 다시 일어났고, 전투에서 목숨을 건진 주민들을 모아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를 세웠다. 당시 주민들의 수는 겨우 3천 명에 불과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레무스의 죽음과 관련해 가장 타당해 보이는 설명이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레무스는 속임수에 대한 분노와 개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로물루스에게 지도권을 넘겼다. 나중에 성벽이 완성됐을 때 레무스는 성벽이 얼마나 허약한지 보여주려고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 성벽이라면 어떤 적이라도 나처럼 쉽게 넘을 수 있을 거야”
레무스는 성벽을 껑충 뛰어넘었다. 그때 성벽 공사 책임자로서 성벽에 서 있던 켈레르가 화를 냈다.
“적이 이런 짓을 한다면 우리가 쉽게 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
켈레르는 몽둥이로 레무스의 머리를 때려죽이고 말았다. 어찌됐든 형제 사이에 벌어진 분쟁의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이제 로마를 건국하는 데 아무런 장벽도 남지 않게 됐다. 로물루스는 먼저 신에게 경배한 뒤 하루 날을 정해 팔라티노 언덕에서 의례를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희생제와 시민들을 격려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자 예정된 날이 밝았다. 그는 먼저 앞장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쳤다. 다른 사람에게도 형편에 맞춰 희생물을 바치게 했다. 이어 신의 조짐을 살폈는데 아주 좋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천막 앞에 불을 피우시오. 그리고 불꽃 위를 뛰어넘으시오. 몸을 청결하게 씻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입니다.”
신에게 바치는 모든 의례를 다 마쳤다고 판단한 로물루스는 사람들을 미리 지정한 장소로 데리고 가 언덕의 직사각형 크기를 설명했다. 이어 암소 한 마리와 수소 한 마리에게 멍에를 씌워 쟁기를 끌게 해 연속으로 이어지는 고랑을 팠다. 성벽을 세울 때 이용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로마인에게는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고 할 때 쟁기로 고랑을 파는 관습이 생겼다.
로물루스는 고랑을 다 판 뒤 암소와 수소를 잡아 신에게 바쳤다. 똑같은 절차로 진행한 의례에서 다른 여러 희생물도 바친 뒤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일하러 갑시다.”
로마인은 그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이날이 되면 파릴리아라고 부르는 가장 성대한 축제를 열고 있다. 이날은 봄의 시작과 함께 오게 되는데, 농부와 목동은 풍년과 가축의 증가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친다.
로마인이 그 이전부터 이날을 축하의 날로 삼아 즐겨 왔던 것인지 아니면 이런 이유 때문에 도시 창건일로 정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또는 실제로 이날이 로마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는지, 아니면 목동을 돌봐주는 신에게 이날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는지 어느 것도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로마의 기원과 관련한 사실은 지금까지 밝힌 내용과 같다. 내가 부지런하게 그리스와 로마 작가들이 쓴 책을 읽음으로써 찾아낸 내용이었다.
지금부터는 로마가 야만인, 도망자, 떠돌이의 피난처라고 주중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로마가 분명히 그리스 계열의 도시임을 확인하게 하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로마가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우호적인 도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원주민은 오이노트리아 인이었으며, 나중에는 아르카디아 인이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면 된다.
또 이들과 거주지를 나눠 쓴 사람들은 아르고스 출신의 펠라스기 인이었으며, 테살리에서 이탈리아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된다. 여기에 원주민으로부터 거주 승낙을 받아 팔라티노 언덕에 정착한 에반드로스와 동료 아르카디아 인, 헤라클레스와 함께 와서 사투르니아 언덕에 정착한 펠로폰네소스 인, 마지막으로 트로이를 떠나 초기 정착민과 융합한 사람들을 기억하면 된다. 이들보다 더 오래됐고 더 그리스적인 도시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로마 인이 고대의 많은 제도를 잃어버린 이유가 된 로마 인과 야만인의 융합은 더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로마가 오스키 인, 마르키아 인, 삼니움 인, 티레니아 인, 브루티아 인, 움브리아 인, 리구리아 인, 이베리아 인, 갈리아 인은 물론 많은 다른 민족을 받아들인 뒤에도 완전히 야만화 되지 않았던 것은 사건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되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로마와 융합한 부족 중 일부는 이탈리아 출신이며, 다른 부족은 다른 지역 출신이다. 서로 언어와 관습이 다르다.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은 로마의 옛 질서에 많은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야만족 사이에 살게 된 많은 다른 부족은 짧은 시간에 그리스적 전통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그리스어를 할 수 없게 됐고, 그리스의 전통을 지키거나 똑같은 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됐고, 종전과 똑같은 공정한 법을 가질 수도 없게 됐다. 게다가 일상적인 삶의 상호작용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그들과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없게 됐다.
흑해 근처에 정착한 아카이아 인은 내 말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들은 원래 그리스 도시인 엘리스 출신이었지만, 지금은 야만족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종족이 됐다.
지금 로마 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적으로 야만족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그리스 언어도 아니다. 글자 그대로 두 개를 합쳐놓은 것이다. 대부분은 아이올릭 계열이다. 로마 인이 여러 부족을 융합함으로써 생긴 유일한 부작용은 그들이 더 이상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로마 인은 다른 식민지 이상으로 그리스 출신이라는 흔적을 잘 보존하고 있다. 로마 인이 인간다운 삶을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또 그리스 인처럼 살게 된 것은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뒤 바다 너머에 있는 나라들을 정복하려고 목표를 세웠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은 미덕을 추구하는 데 있어 과거보다 더 고귀한 일은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설명을 내놓을 수 있다. 많은 주장과 믿을 만한 저자들의 증언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나중에 로마의 정부에 관해 쓸 때 설명하기 위해 이런 설명을 아껴두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