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의 꿈 쇤브룬궁전

by leo


1.


마리아 테레지아는 밝은 표정으로 마차의 작은 창을 열었다. 시원하고 상큼한 바람이 숨을 헐떡이며 좁은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바람 뒤로는 나지막한 언덕이 환한 미소를 띤 채 푸른 하늘을 보며 드러누워 있었다. 어중간한 규모의 궁전 한 채가 언덕의 배꼽 부분에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은 나의 땅이란 말이지?’


마리아 테레지아는 간 곳은 호프부르크왕궁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빈 외곽의 낮은 언덕이었다. 숲이 우거지고 초원도 넓게 펼쳐져 여름에는 늘 시원해서 소풍을 가기 좋은 곳으로 유명한 장소였다. 궁전 근처에 무너진 대리석 기둥 여러 개가 흩어져 있었고 풍차도 하나 돌아갔다.


‘저 풍차가 그 유명한 카터로구나. 궁전은 요제프 1세께서 만들다 만 것이고, 폐허는 50년 전 오스만투르크의 공격 때 무너진 ‘오락의 성’이겠군.’


자세히 살펴보니 언덕에는 풍차가 한 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곳곳에 여러 대가 흩어져 있었다. 각 풍차는 14세기 초 언덕의 주인이었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이 만든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풍차 옆에 마차를 세우게 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공기가 더러운 빈 시내와 달리 언덕에서는 맑고 신선한 바람이 폐를 맑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고 청량한 바람을 한껏 들이마셨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가 이 언덕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렇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공기를 빈 시내 어디에서 맛볼 수 있단 말이야? 오직 이곳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이지.’


마리아 테레지아는 언덕 곳곳을 돌아다녔다. 대리석 기둥 잔해 사이로 파릇파릇한 풀과 노랗고 빨간 야생화가 피어났다. 그녀는 작은 꽃 하나를 꺾어 향기를 맡았다. 무엇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야릇하면서 달콤한 냄새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언덕 중간 부분의 작은 샘에서 물이 퐁퐁 솟아나는 게 보였다.


‘저 샘이 쇤브룬이구나.’


전설에 따르면 16세기 초 마차슈 황제는 언덕에서 사냥을 즐기다 작은 샘을 발견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물의 수압이 얼마나 강한지 마치 분수처럼 솟아나는 분수였다. 마차슈는 그 장면에 매료돼 ‘정말 아름다운 샘이로구나(Schöner Brunnen)’라고 감탄했다. 쇤(Schön)은 ‘아름답다’, 브룬(brunn)은 ‘샘’이라는 독일어다.


원래 언덕의 주인은 클로스터노이부르크수도원이었다. 16세기 빈 시장이었던 헤르만 바이어가 땅을 사들여 풍차 옆에 대저택을 건설했다. 이 저택을 카터부르크 또는 가터부르크라고 불렀다. 사냥을 좋아했던 막시밀리안 2세 황제는 바이어에게서 언덕을 사들였다. 그는 땅 주변에 담장을 설치하고 오리, 사슴, 곰 등을 풀어 사냥터를 꾸몄다. 황실 가족은 물론 궁정 신하들이 사냥 놀이를 즐기거나, 왕실 가족이 여름휴가를 보내는 공원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빈 시내의 호프부르크 궁전은 무덥고 습한 여름을 보내기에는 너무 더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무너진 대리석 기둥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폐허가 된 궁전은 17세기 중반 황제 페르디난드 2세의 황후였던 곤차가의 엘레노라가 남편을 먼저 보낸 뒤 여생을 보내려고 만든 것이었다. 여흥을 무척 좋아했던 그녀는 궁전에서 각종 연회를 개최했다. 본래 이름은 ‘곤차가궁전’이었지만 축제성 행사가 얼마나 자주 열렸던지 ‘오락의 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녀마저 세상을 떠난 뒤인 1683년 곤차가궁전은 오스만투르크의 빈 공격 때문에 완전히 불타버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작은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전 두 황제인 레오폴트 1세와 그의 아들 요제프 1세 시대에 건설한 궁전이었다. 두 황제는 당시 오스트리아 최고 건축가로 떠오른 30대 젊은이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엘라흐에게 공사를 맡겼다.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궁전보다 더 웅장한 궁전을 만들겠다는 게 당초 목표였다. 하지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터진 데다 설상가상으로 레오폴트 1세에 이어 전쟁 중 요제프 1세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지는 바람에 궁전 중앙 부분만 완성된 뒤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언덕에 달려간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버지 카를 6세는 대를 이어받아 여황제가 될 큰딸에게 언덕을 선물로 주었다. 딸이 이 언덕을 매우 좋아해서 수시로 바람을 쐬러 나간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요제프 1세의 궁전을 바라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머릿속으로 다양한 궁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요제프 1세가 동경했던 베르사유궁전은 물론이거니와 바이에른공국 뮌헨의 님펜부르크궁전도 생각났다.


‘합스부르크 왕실은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이야.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 최고의 국가이고…. 그 명성에 걸맞은 궁전을 지어야 해. 내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 이곳에 유럽 어느 나라의 궁전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큰 궁전을 지을 거야. 모든 오스트리아인이 사랑하고, 모든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을 만들어야지. 그곳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면서 사랑하는 남편은 물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거야.’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간 마리아 테레지아의 눈에 멀리 빈 시내가 보였다. 반대쪽으로는 빈의 한쪽을 막아주는 방어벽인 높은 산악지대가 펼쳐졌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는 그녀의 가슴에 위대한 포부와 기상이 뜨겁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2.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0년 10월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올랐다. 여자가 황제가 될 수 없다며 등극에 반대하는 다른 나라와 갈등을 빚었지만 끝내 모든 것을 이겨내고 5년 뒤에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함께 신성로마제국 공동 황제 자리에도 올랐다. 권력을 한손에 장악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언덕에 남편과 함께 살 새 궁전을 만들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궁전을 지으려면 공사를 누구에게 맡겨야 하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건축가를 떠올려보았다.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다들 나이가 많은 데다 오스트리아에만 머물러 있어 시야가 좁다는 게 그녀의 판단이었다. 유럽 최고의 궁전을 지으려면 더 넓고 더 웅장한 계획을 꾸밀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맞아! 요새 인기를 얻는 젊은 건축가가 있지! 이름이 뭐라고 했지? 그래! 파카시! 니콜라우스 파카시였어. 그자에게 일을 맡기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식의 궁전을 지을 수 있겠군.’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종에게 파카시를 데려오라고 했다.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서둘러야 한다는 게 그녀의 평소 생각이었다. 파카시는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 상인의 아들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27세의 젊은 건축가였다.


호프부르크궁전에 들어간 파카시의 얼굴에는 긴장감은커녕 자신감이 역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자네를 왜 부른 것인지 그 이유를 알겠나?”


파카시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무슨 지시를 내리시려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제프 2세 선임 황제께서 쇤브룬 언덕에 만드시던 궁전을 알고 있는가?”

“예, 당시 최고의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엘라흐 경이 설계한 궁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쟁 때문에 궁전 공사가 중단돼 미완성 상태로 내버려진 것도 잘 알고 있겠군.”

“네. 폐하. 그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파카시보다 한 살 아래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건축가를 부른 것은 패기가 넘치기 때문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궁전을 중건하고 싶네. 자네가 모든 일을 맡아 추진해주도록 하게.”


파카시는 깜짝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황제가 부른다기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왕궁에 들어왔는데, 황제가 살 궁전을 만들라고 하다니 어찌 이런 일이! 게다가 그 궁전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이라는 엘라흐 경의 작품이 아니던가! 이제 겨우 귀족들의 저택 몇 채를 지어본 개 고작인데 이런 엄청난 일이 떨어지다니!


파카시의 얼굴에서 놀란 기색을 눈치 챈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그치듯 물었다.


“할 수 있겠나? 아니면 할 수 없겠나? 지금 당장 답을 하게.”


파카시는 영리하면서 야심이 큰 젊은이였다. 제 발로 찾아온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낼 자신감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기대하시는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을 지어 보겠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원했던 쇤브룬궁전 건축은 요제프 1세가 이미 지어놓은 궁전을 크게 증축하는 것이었다. 공사는 1743~1749년 사이에 진행됐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황제 부부가 들어가 살 스위트룸과 접견실을 갖춘 동관의 왕실 주거 공간 확장이 공사의 첫 단계였다.


주거 공간 공사는 1746년에 끝나 황제 부부는 그해 여름을 새 궁전에서 보낼 수 있었다. 한 해 전인 1745년에는 대대적으로 수리한 왕실 예배당이 완공돼 봉헌식을 치렀다. 이곳이 쇤브룬궁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덕분에 요제프 1세의 작은 저택이었던 쇤브룬궁전은 웅장한 왕실의 여름 거처로 탈바꿈하게 됐다. 피카시는 쇤브룬궁전 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건축가로 발돋움했다. 그는 이 사업 성공 덕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다성 왕궁 재건을 포함한 많은 국책사업을 맡을 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는 1747년까지 아이를 여덟 명이나 낳았고, 그중에서 일곱 명이 살아남았다. 식구가 늘어나자 쇤브룬궁전을 다시 증축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2층과 3층 사이에 중간층을 넣어 어린 왕자, 공주가 각각 지낼 수 있게 했다. 궁전 중앙에는 대형 홀 두 개를 만들어 대규모 행사를 진행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소형 홀도 하나 설치해 가족끼리만 축하행사를 열 수 있게 했다.


나중에는 왕실 가족을 모시는 귀족, 귀족부인이 거주하는 공간인 ‘왕당파관’을 만들었고, 왕실 가족 거주 공간과 연결하는 회랑도 건설했다. 여름철에 쇤브룬궁전에 거주하는 귀족, 귀족부인은 물론 잡다한 일을 담당하는 직원 숫자가 무려 1천 명에 이르렀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공간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북관에 극장도 건설했다. 외부에서 초청한 가수나 배우가 공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 부부가 좌석에 앉은 가운데 어린 자녀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공연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에는 노래를 잘 부르는 공주로 유명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계승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인 1765년에는 언덕 맨 꼭대기에 글로리에테도 건설했다. 왕위계승전쟁과 이어진 7년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기념비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합스브루크 왕가의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브룬궁전의 벽을 주로 황금색으로 칠했다. 나중에 추가 증축한 부분에는 옅은 황토색과 옅은 베이지색을 가미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세기에는 연한 회색이 칠해졌고, 19세기 중반부터는 ‘쇤브룬 옐로’로 알려진 노란색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눈을 감자 왕실 가족은 쇤브룬궁전을 떠나 호프부르크왕궁으로 돌아갔다. 여름에도 쇤브룬궁전을 별궁으로 사용하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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