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프란츠 콜슈이츠키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인은 그를 그렇게 부른다. 폴란드에 가서 물어보면 제르지 프란치스케 쿨치츠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다시 헝가리인에게 이 사람을 아느냐고 질문한다면 듀로 콜레이츠라고 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로 가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유리 프란츠 쿨치스키라고 부를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기에 나라마다 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동유럽 대부분 나라 사람들은 그를 알고 있는 것일까?
첩자? 메신저? 평범한 상인? 돈에 굶주린 사기꾼? 1683년 오스만투르크의 ‘빈 포위’ 때 혼자 힘으로 빈을 구해낸 숨은 영웅? 아마 콜슈이츠키는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콜슈이츠키는 1640년 폴란드의 삼보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지금은 우크라이나 지역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그가 정통 루터파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본다.
콜슈이츠키는 스무 살 때 코사크 군대에 입대했는데, 언어에 탁월한 소질을 보여 장군들의 통역병으로 활동했다. 그는 폴란드어뿐만 아니라 독일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터키어를 할 수 있었다.
콜슈이츠키는 전쟁마다 따라 나섰다 그러다 오스만투르크군에 붙잡혀 수년간 콘스탄티노플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 이때 튀르키예의 관습을 배워 거의 튀르키예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게 됐다.
통역이 필요했던 세르비아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장사를 하러 간 길에 콜슈이츠키를 발견하고는 적지 않은 몸값을 주고 사 갔다. 이후 그는 당시 오스만투르크 영토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오스트리아 회사를 위해 일을 했다. 1678년에는 빈으로 진출했다. 이제부터 콜슈이츠키의 본격적인 활약이 펼쳐진다.
1683년 7월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5세가 헝가리 평원 너머로 10만 병력을 보냈다. 일부에서는 20만 명이라고도 한다. 목적은 유럽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던 빈을 점령하겠다는 것이었다.
오스만투르크군 총사령관은 술탄의 심복인 카라 무스타파였다. 잔인하고 무자비하며, 쾌락주의적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1674년 폴란드군을 격파한 뒤 붙잡은 기독교 병사들의 가죽을 벗겨 술탄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전장에 나갈 때면 수십 명의 첩은 물론 아프리카 흑인 환관 수백 명도 데려갔다고 한다.
무스타파는 전쟁에 나서면 다른 무엇보다 전리품에 욕심을 많이 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도 빈의 보물창고에는 직접 들어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정도였다.
오스만투르크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레오폴트 1세 황제는 일찌감치 빈을 떠나 달아났다. 그는 교황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교황은 서둘러 지원군을 보냈다.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도 젊은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꾸려 달려왔다.
오스트리아가 가장 기다리던 구원자는 얀 소비에스키 국왕이 이끄는 폴란드 군대였다. 당시 유럽의 기독교 군대 중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군대였다.
무스파타는 빈을 포위했다.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빈 시내로 바로 쳐들어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할 수도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포위 작전을 구사한 것이었다. 유혈이 낭자한 전투로 서로 인명 피해를 보기보다는 도시를 포위함으로써 빈 시민들을 위협하고 굶주리게 해서 항복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군 병력은 1만 2000여 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일부 비정규군이 있었다. 그들을 이끈 사람은 스타렘베르그 공작이었다. 황제는 달아나고 없었지만 용감한 군인이었던 공작은 오스만투르크에 항복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소규모였지만 도나우강 건너편 칼렌베르그 언덕에 로레인 백작이 이끈 다국적 구원군이 도착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하지 않고 결사항전하자 항복을 기다리던 무스타파는 인내심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는 빈을 무력으로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사상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포위당한 빈 시내에서는 질병이 만연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총알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스타렘베르그 공작은 항복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조금만 더 버티면 소비에스키 군대가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까지 버틸 힘이 없었다. 그는 항복을 결정하기에 앞서 구원군이 언제 오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스타렘베르그 공작은 도나우강 건너편에 주둔한 로레인 백작의 군대에 밀정을 보내기로 했다. 그곳에서 폴란드 구원군의 동태를 파악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밀정의 임무는 매우 위엄한 것이었다. 로레인 백작에게 가려면 빈 성벽을 완전히 포위한 오스만투르크군 진영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어서 아무도 밀정 업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밀정 역할을 하겠다면서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콜슈이츠키였다.
“저는 오스만투르크에서 오래 살아 튀르키예 말을 할 줄 압니다. 저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줄도 압니다. 저에게 임무를 맡겨 주십시오. 저들의 진영 한가운데를 여유 있게 지나 구원군과 접촉하고 오겠습니다.”
궁지에 몰린 스타렘베르그 공작으로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따져 물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가 이중첩자라 하더라도 자원한 임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승낙을 받은 콜슈이츠키는 오스만투르크 병사로 변장해 빈 성벽 북쪽의 해자 외벽으로 빠져나가 오스만투크르군 진영에 숨어들었다. 그는 때로는 오스만투르크 병사인 듯, 때로는 베오그라드에서 군대를 따라온 상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튀르키예인이나 다를 바 없는 그에게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오스만투르크군 진영을 유유히 빠져나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콜슈이츠키는 로레인 백작에게 빈의 심각한 상황을 설명했다. 로레인 백작은 소비에스키 국왕과 다른 유럽 지도자들에게 구원군 파병을 서두르라고 재촉하는 연락병을 파견했다. 콜슈이츠키에게는 상황을 좀 부풀려 희망을 담은 메시지를 빈에 전달하라고 당부했다.
“콜슈이츠키 씨, 빈에 돌아가거든 절대 항복하지 말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이야기하시오. 폴란드 군대가 국경을 넘어 며칠 뒤 도착한다고 전해주시오.”
로레인 백작의 의도를 잘 파악한 콜슈이츠키는 빈으로 돌아갔다. 그가 가져간 ‘거짓말’은 빈의 지도자들은 물론 시민들, 오스트리아 군인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빈의 분위기가 높아진 사실을 모르는 오스만투르크군은 다음날 공격을 재개했다. 한 번만 더 힘차게 몰아붙이면 빈 성문을 허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기가 높아진 오스트리아 병사들과 시민들의 저항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했다. 결국 오스만투르크군은 이번에도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스타렘베르그 공작은 콜슈이츠키에게 한 번만 더 편지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소비에스키 국왕이 이끄는 폴란드군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4차례나 오스만투르크군 진영을 지나 빈과 구원군 사이에서 소식을 전해주고 전달받았다.
콜슈이츠키는 9월 11일 마지막으로 로레인 백작에게 갔다. 그는 빈이 허물어지기 직전이라고 호소했다.
“내일 오후에는 오스만투르크군이 최후의 총공격을 펼칠 것이라고 합니다. 빈의 내부 사정을 볼 때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렵습니다.”
콜슈이츠키가 말을 막 마칠 즈음 평원 너머에서 힘찬 나팔 소리가 들렸다. 빈 시민들이 그렇게 기다렸던 얀 소비에스키 국왕의 폴란드 군대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었다.
얀 소비에스키 국왕은 콜슈이츠키에게 빈으로 돌아가 비밀 작전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내일 아침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빈의 오스트리아 병사들에게 성문을 나와 적을 공격하라고 전하게. 우리는 뒤에서 적을 기습할 것이야. 포위당한 오스만투르크군은 바로 허물어질 걸세.”
콜슈이츠키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빈을 향해 돌아갔다. 그는 오스만투르크군 진영을 지나가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오스만투르크군 병사들이 며칠 전보다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여러 병사에게 물어보니 고향을 떠난 지 오래돼 다들 향수병에 시달리면서 사기가 떨어졌다고 했다.
콜슈이츠키는 더 가벼운 기분으로 빈 성의 해자를 건너 성벽을 넘어 스타렘버그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새벽이었다. 잠들었던 스타렘버그는 낯선 사람이 문을 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오스만투르크 병사 옷을 입은 콜슈이츠키를 자객으로 오해하고 큰소리로 경호원을 불렀다.
“자객이다. 오스만투르크 자객이 나를 죽이려 한다. 경호원들은 어디 있느냐? 어서 이 자를 잡아라.”
공작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호위병들은 콜슈이츠키를 죽이려고 했다. 놀란 콜슈이츠키는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공작님, 접니다. 콜슈이츠키라고요. 왜 이러십니까?”
다행히 정신을 차린 스타렘버그는 콜슈이츠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상황을 알아차렸다. 만약 콜슈이츠키가 목숨을 잃었다면 폴란드군과의 양면작전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게 됐다면 빈의 해방은커녕 폴란드군도 큰 낭패를 볼지 모르는 일이었다.
얀 소비에스키 국왕은 콜슈이츠키에게 일러준 대로 9월 12일 이른 새벽 8만여 명에 이르는 기독교연합군을 이끌고 오스만투르크군 숙영지를 기습 공격했다. 동시에 빈 시내에 웅크렸던 오스트리아 병사들도 물밀듯이 몰려나와 오스만투르크군을 공격했다. 적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오스만투르크는 이날 전투에서 엄청난 병력을 잃고 대패해 오스만투르크로 달아났다.
무스타파는 사령관 복장을 벗어 던지고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덕에 가까스로 전장에서 벗어나 헝가리 너머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는 패배 소식을 술탄이 알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키던 호위병 50명에게 목을 매 자살하라고 지시했다.
마침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보라고 술탄이 보낸 칙사 두 명이 베오그라드에 머물던 무스타파를 만났다. 두 칙사는 무스타파의 측근으로부터 대패 소식을 전해 듣자 곧바로 무스타파를 목 졸라 죽인 뒤 그의 목을 술탄에게 들고 가 사실을 알렸다.
2.
오스만투르크군이 대패하면서 급하게 달아나는 바람에 그들이 갖고 있던 온갖 보급물품은 그들의 야영장에 고스란히 버려졌다. 천막 수천 개와 수천 마리의 말, 낙타, 소, 양은 물론 온갖 희귀한 물건이 다 포함돼 있었다.
그중에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도 있었다. 바로 희한하게 생긴 갈색 콩이 가득 찬 포대 수백 개였다. 빈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태우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은 콜슈이츠키가 빈 시내에서 서둘러 달려 나와 콩 포대를 빼앗아 집으로 옮겼다. 그가 가져간 것은 커피였다. 그는 엄청난 분량의 커피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성모 마리아시여! 커피가 불타고 있군요. 당신이 만약 커피를 모르신다면 저에게 주십시오. 저는 이 콩을 정말 유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빈으로 돌아온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전쟁의 최고 공로자인 콜슈이츠키를 불러 온갖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렸다. 그에게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했다.
“폐하, 오스만투르크군의 숙영지에서 압수한 콩 포대 수백 개를 제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 콩 포대를 제가 가지도록 해 주십시오.”
커피가 뭔지 모르는 황제는 환히 웃으며 승낙했다. 황궁에서 나간 콜슈이츠키는 얼마 뒤 빈 시내에 빈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오늘날 빈 중앙역 인근에 콜슈이츠키의 이름을 딴 콜슈이츠키가세라는 거리가 있다. 그곳의 ‘카페 즈비리나’ 인근에 터키 옷을 입고 커피잔을 얹은 쟁반을 든 콜슈이츠키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빈의 ‘커피 제조자 길드’가 세운 것이다.
콜슈이츠키의 커피는 빈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평 받지 못했다. 빈 사람들은 커피를 ‘죽으로 끓인 검댕’이라고 빈정댔다. 콜슈이츠키는 나중에 커피에서 찌꺼기를 걸러낸 뒤 크림을 올렸다. 오늘날 #비엔나커피 라고 알려진 바로 그 커피의 원조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는 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섞인 이야기일 뿐이다. 객관적 자료에 따르면 빈에 커피하우스를 처음 연 사람은 1685년 아르메니아인 요하네스 테오다트였다.
디오다토는 이중첩자였는데 빈 황궁을 위해 스파이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찌감치 커피콩에 대해 알았고, 아르메니아에서 커피콩을 볶고 음료로 마시는 방법을 배웠다. 오늘날 빈에 있는 요하네스 디오다토 공원은 그의 이름을 붙인 공원이다.
디오아토가 개업한 첫 커피하우스는 오늘날 빈 스타일 커피하우스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진 곳이었다. 종업원들은 커피 잔에 따뜻한 물을 부어 손님에게 대접했다. 그의 커피하우스에는 카드게임과 당구장 테이블이 설치돼 있었다.
이후 빈에는 커피하우스가 늘어났고, 서비스도 발전했다. 1720년 ‘크라머슈에스 카페하우스’는 빈 중심가에서 처음으로 손님을 위해 신문을 비치했다. 또 다른 커피하우스에서는 따뜻한 음식과 가벼운 술을 내놓기도 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1808년 영국 봉쇄령을 내렸을 때 오스트리아에도 큰 타격이 미쳤다. 커피콩 가격이 급격하게 오른 것이다. 커피하우스 주인들은 파산하지 않으려고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대안은 바로 카페 레스토랑이었다.
1814~1815년 ‘비엔나 회의’ 이후 빈의 커피하우스 문화는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당시 빈 스타일의 커피하우스는 넓은 방에 빨간 벨벳 의자를 비치하고 큰 샹들리에를 천장에 건 모습이었다. 그때 빈 사람들은 대개 좁고 복잡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들은 우아하고 넓은 커피하우스를 ‘확장된 거실’, ‘두 번째 집’이라고 불렀다.
빈 스타일 커피하우스는 프라하, 자그레브, 베로나, 트리에스테, 베니스로 퍼져 나갔다. 당시 유럽에서 빈 스타일 커피하우스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인생의 질을 가름하는 요건 중 하나가 됐다. 1856년에는 여성도 커피하우스에 입장할 수 있게 됐다.
1890년 무렵 ‘카페 그리엔스타이들’은 ‘융 비엔(젊은 빈)’으로 불린 문학인 그룹의 정기적 모임 장소가 됐다. 휴고 본 호프만스탈, 칼 크라우스, 아더 슈니츨러 같은 젊은 작가들은 매일 이 카페에서 만났고, 이른바 커피하우스 문학의 탄생을 이끌었다. 작가들은 점점 단골카페를 늘려 나갔다. 카페 첸트랄, 카페 헤렌호프 등이 바로 그곳이었다. 다른 예술가들은 카페 뮤지엄 같은 곳을 선호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첫 댄스카페가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미국의 재즈음악을 연주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기에는 커피하우스는 불법 상품을 밀거래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50년대 들어 빈 커피하우스는 위기에 빠졌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에스프레소 바가 점점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빈 커피하우스는 점점 낡은 문화로 치부됐다. 1980년대에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빈 스타일 커피하우스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빈 커피하우스가 되살아난 것은 1983년 빈 커피하우스 문화 탄생 300주년이 계기가 됐다. 빈 사람들은 빈 스타일 커피하우스의 독특한 고품질을 다시 기억하게 됐다. 2011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지금 빈 커피하우스는 빈 여행 필수 방문코스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