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표정은 어두웠고 슬퍼 보였다. 그는 아직 7시도 되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쇤브룬궁전의 황제 접견실에 혼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날은 이제 막 더위가 조금씩 빈을 덮치기 시작한 1908년 6월 10일이었다.
“똑똑!”
누군가 접견실 문을 두들겼다. 문 앞에 조카이면서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였다. 그의 표정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폐하, 시간이 됐습니다. 정말 가시지 않으시렵니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만 위로 약간 치켜뜬 채 황제를 쳐다보았다.
“나는 가지 않을 걸세. 가고 싶지가 않아. 그곳에 가면 또 황후를 생각해야 하겠지. 갑자기 슬픔이 복받쳐 눈물이 펑펑 쏟아질지도 몰라. 제국의 황제가 백성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지. 나는 이곳에서 황후를 그리워하겠네.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황후에게 인사를 해 주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머리를 숙였다.
“정 뜻이 그러시다면 저만 다녀오겠습니다. 행사를 마치면 바로 돌아와서 폐하께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서너 걸음 뒷걸음친 뒤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창가로 걸어가 궁전에서 나간 황태자가 마차에 몸을 싣고 시내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벌써 17년이 지났군. 내 평생의 사랑, 엘리자베트가 곁을 떠난 지….’
황제가 추억에 잠긴 사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태운 마차는 한참이나 달려 쇤브룬궁전과는 정반대편인 빈 2지구 레오폴트슈타트로 갔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도나우강 변의 멕시코 광장에 건설 중인 성당이었다.
19세기 말 레오폴트슈타트에는 성당이 부족했다. 이 문제도 해결할 겸 1848년에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 황제 즉위 50주년을 기념할 겸 도나우강 변에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위원회가 설립됐다. 그런데 성당 공사를 시작하기도 전이었고 황제 즉위 50주년인 1898년 12월 2일이 되기 석 달 전인 1898년 9월 10일 황제의 부인인 황후 엘리자베트가 스위스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엘리자베트는 살아 있을 때에는 오스트리아 국민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장례식을 치른 뒤에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외국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미인 황후를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커진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곳곳에서 그녀를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 개최와 건축물 제작 붐이 일었다.
이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부인인 소피 대공비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 즉위 50주년 기념 성당 내부에 ‘엘리자베트황후 기념예배당’을 하나 짓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성당건설위원회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원래 세례당으로 건설할 예정이던 공간을 엘리자베트예배당으로 바꾸기로 했다. 국가 재정이 넉넉지 못한 점을 감안해 공사비는 국민 성금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날이 갈수록 엘리자베트의 인기가 높아진 덕분에 모금 운동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총 성금은 34만 8348굴덴이었는데 예배당을 훌륭하게 꾸미고도 남을 만한 돈이었다. 예배당 벽에 프레스코 그림을 그리는 대신 유리 모자이크를 설치하고, 벽돌 대신 대리석을 사용해도 될 만큼 충분한 돈이었다.
모자이크를 디자인한 사람은 카를 에더러였다. 그는 예배당 제단의 둥근 부분 천장에 튀링기아의 성 엘리자베트 모자이크를 설치했다. 튀링기아의 성 엘리자베트는 13세기 헝가리의 공주였는데,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며 평생을 보냈다. 그가 튀링기아의 성 엘리자베트를 모자이크 주제로 선택한 것은 황후와 이름이 같기 때문이었다.
국가 예산을 들이는 성당 건설 공사는 재정난 때문에 계속 지연됐다. 반면 엘리자베트예배당은 성금이 충분한 덕분에 조기에 완공됐다. 예배당 공사는 아직 성당 공사가 진행 중이던 1907년에 끝났고 황후 암살 10주년을 앞둔 1908년 6월 10일에 봉헌식이 마련됐다.
엘리자베트황후 기념예배당은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빈에서 가장 으뜸가는 아르누보 건축물이었다. 예배당은 성당의 왼쪽 트랜셉트에 건설됐다. 트랜셉트는 십자가형 교회의 좌우 날개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우리말로 ‘익랑’이라고 부른다. 높이는 13.5m이며 지금은 10m 정도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도착했을 때 봉헌식 거행 준비는 끝난 상태였다. 성당 앞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졌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학교 어린이, 다양한 클럽 회원, 도나우증기선회사 직원 등이 마름모 모양으로 줄을 서 대공을 기다렸다.
봉헌 미사는 오전 7시 주교 대행 고트프리드 마샬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봉헌 미사에서는 다이아몬드는 물론 각종 금 세공품으로 장식한 성배가 사용됐다. 엘리자베트의 둘째딸 기젤라 공주와 막내딸 마리 발레리아 공주가 예배당에 기증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황제에게 봉헌식 참여를 권유했지만 황제는 거부했다. 왜 가지 않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황후와의 추억이 쌓인 쇤브룬궁전에 하루 종일 머물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엘리자베트 황후가 세상을 떠난 뒤 해마다 황후 기일인 9월 10일이 되면 혼자 카푸치노수도원의 지하묘지에 안치된 황후의 관에 가서 오랫동안 혼자 머무르다 궁전으로 돌아가곤 했다. 저녁에는 호프부르크왕궁 예배당에서 열리는 황후 추도미사에 참석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엘리자베트황후 기념예배당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13년 11월 2일에 거행된 성당 축성미사 때였다. 그는 축성미사를 마친 뒤 수행원 없이 혼자 황후의 이름을 붙인 예배당에 들어가 한참이나 머물렀다. 아무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성당의 정식 명칭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성당’이지만 흔히 ‘황제 50주년 기념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당을 처음 지을 때만 해도 성당 인근 광장의 이름은 ‘카를대공광장’이었는데, 1956년에 ‘멕시코광장’으로 바뀌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독일 나치에 강제로 합병 당했을 때 멕시코가 전 세계 모든 나라 중에서 유일하게 국제연맹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불법’이라며 항의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곳에 멕시코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 성당을 ‘멕시코성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