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대성당에 들어가자 넓은 홀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열주 회랑’이라는 뜻인 포르티코인데, 나르텍스라고도 부른다. 대성당 바깥은 인간세상, 안쪽은 신의 세상이며 나르텍스는 그 중간에 위치한 공간이다. 성당에 기도하러 간 신도가 속세에서 묻히고 온 온갖 죄악의 때를 씻어내 마음을 정화하고, 이교도나 불신자는 참회하고 개종하는 공간이다.
나르텍스는 ‘바로크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위스 출신 건축가 카를로 마데르노가 설계한 구역이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에서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에 이르기 전의 공간과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일주문~해탈문 사이의 영역은 부처를 모신 대웅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곳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나르텍스는 원래 초목인 ‘회향’을 뜻하는 단어로 당시 학교나 군대에서는 회향 줄기를 묶어 회초리로 사용했다. 나르텍스를 교회 건물의 일부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한 것은 12세기부터인데, 왜 이 단어를 골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베드로대성당 나르텍스는 단순히 행사를 여는 홀처럼 넓기만 하고 빈 공간은 아니다. 대성당 안에 들어가려고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전후좌우, 위아래를 잘 살펴보면 곳곳에 성 베드로와 기독교의 이야기가 담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이 성 베드로의 성전이고 기독교의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작품들이다.
먼저 천장에는 ‘사도행전’ 내용을 중심으로 성 베드로의 생애를 그린 스투코가 새겨졌다. 스투코는 진흙, 석고, 회반죽 등을 사용해 벽면에 부조처럼 장식을 만드는 기법이다. 스투코를 둘러싼 천장 구석구석에는 성 베드로에 이은 제2대 교황 성 리노부터 35대 교황 성 율리오 1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황 36명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조각상들이 도열한 양쪽 중앙 부분에는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했다는 성경 ‘마태복음’ 4장 18~20절의 내용을 담은 부조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에게 갔다’는 성경 ‘마태복음’ 14장 29절의 장면을 담은 ‘나비첼라’라는 모자이크 그림이 있다.
나르텍스 바닥에는 교황 레오 13세(재임 1878~1903년), 요한 23세(재임 1958~1963년), 클레멘스 10세(재임 1670~1676년)의 문장이 새겨졌다.
성베드로대성당 나르텍스에는 문도 많은데 제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출입문이 무려 다섯 개다. 입구를 마주 보고 섰을 때 맨 왼쪽은 ‘죽음의 문’이다. 대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면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다음은 ‘선악의 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재임 1963~1978년)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970~1977년에 만든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는 선을, 왼쪽 부조는 악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세 번째인 가운데 문은 ‘필라레테 문’이다. 다섯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는데, 문을 만든 조각가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별명이 필라레테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네 번째는 1965년에 만든 ‘성례의 문’이다. 관람객이나 신도가 대성당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이어서 늘 열려 있다. 문의 오른쪽 부조에는 천사가 세례, 견진성사, 보속(고해 신부가 정해주는 속죄 행위)을 거행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왼쪽 부조에는 성체성사, 결혼, 신품성사, 병자성사를 거행하는 장면이 담겼다.
맨 오른쪽은 ‘성스러운 문’, 즉 성문(聖門)인데, ‘대사면의 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은 25년 주기로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성년은 달리 희년(禧年)이라고도 한다. 성문은 성베드로대성당에만 있는 게 아니라 로마의 4대 대성당인 라테라노대성당,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 산타마리아 마조레대성당에도 있다. 각 성당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성문을 안쪽으로 잠가 놓았다가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만 순례자에게 개방한다.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하면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교황이 성년 첫날인 1월 1일 은으로 만든 망치로 성문을 똑똑 두들기면 문이 열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다. 성경에 ‘나는 문이니 누구든 나를 통해 들어오면 안전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문을 통해 들어간다는 것은 예수의 자비를 통해 안전을 구한다는 뜻이다.
성문은 1975년과 2000년에 열렸고, 다음에 문이 열리는 해는 내년인 2025년이다. 이때에는 기독교 순례자를 포함해 평소보다 더 많은 여행객이 성베드로대성당을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성문을 통과하면 지금까지 살면서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기독교 신도이든 아니든 이 문을 지나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성베드로대성당에 들어가는 걸 다시 잠시 미루고 나르텍스 왼쪽 끝으로 시선을 잠시 돌리면 기마상이 하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8세기 말 서유럽을 통일하고 교황청의 수호자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샤를 대제, 즉 샤를마뉴를 새긴 기마상이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800년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나르텍스의 오른쪽 끝은 유리가 달린 문으로 닫혔다. 문 뒤에는 바티칸교황청으로 들어가는 긴 회랑인 스칼라 레기아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문으로 가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문이 닫혔으니 갈 수 없고, 당연히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 너머에는 다름 아니라 312년 기독교를 공인해 세계적 종교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이 있다. 원래 성베드로대성당 안에 설치하려고 만들었지만 완공될 무렵에 위치를 바꾼 것이다. 자리가 나쁘다 보니 일부러 이 조각상을 보려고 문 너머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17세기 최고의 조각가였던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1655년)의 의뢰를 받아 만든 기마상의 제목은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이다. 말을 탄 콘스탄티누스가 하늘을 보며 깜짝 놀라는 모습이다. 기마상은 대개 주인공의 위용을 과시하는 형태로 만드는 게 일반적인데, 콘스탄티누스의 기마상을 이렇게 특이하게 만든 것은 전설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천하통일을 놓고 처남인 막센티우스와 건곤일척의 맞대결을 벌일 때 하늘에서 빛의 형태로 내려온 ‘엔 타우토 니카’, 즉 ‘이 표식으로 승리하리라’는 그리스어와 ‘키로(☧)’ 표식을 본 뒤 전투에서 이겼다는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다. ‘☧’는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ΟΣ)’의 앞 두 철자를 따서 만든 표식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지 않았다면 고대 로마는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교도 국가로 남았을 것이고,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가 되기는커녕 다른 많은 종교처럼 아예 사라졌거나 극소수만 신봉하는 종교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성베드로대성당은 물론 바티칸시국조차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가 ‘인간의 구세주’였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구원자’였던 셈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이처럼 기독교 역사에 결정적 변화를 이룬 황제인 건 분명한데,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은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내려 보낸 키로가 그를 감동시켰다는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고, 그가 기독교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어릴 때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 깨우침을 얻어 기독교도가 됐다’고 주장한다. 나중에는 어머니 헬레나까지 개종시켰는데, 이를 대외적으로 숨겨오다 황제가 된 이후에야 대대적으로 공표했다는 것이다. 그가 개종할 당시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최악의 기독교 탄압 정책을 펼치던 시기여서 진심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였지만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를 측은히 여겨 황제가 된 이후 친기독교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에게 어머니는 평생 큰 트라우마였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시리아의 로마군 기지 인근 마을에서 만나 결혼한 조강지처 헬레나를 버리고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큰딸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집에서 쫓겨나면서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을 오랫동안 생생히 기억했다.
완전히 다른 주장도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두고 막센티우스 등과 내전을 벌일 때 지지 기반이 약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 탄압받던 기독교를 지지 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친기독교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콘스탄티누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종교를 다 용인했으며, 기독교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키로의 기적을 체험했다는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입성한 지 2주 만에 막센티우스의 지지 세력이었던 근위대를 해산하고 근위대의 기지였던 곳에 라테라노대성당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그가 정말 꿈과 하늘에 나타난 계시에 감명을 받은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매우 신속한 조치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콘스탄티누스의 성당 건설은 라테라노대성당에서 그치지 않았다. 13년 뒤에는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었고, 324년에는 성 바오로의 유해를 모신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을, 다음 해에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조각을 모신 산타크로체 게루살렘 성당을 건설했다. 건설 연도를 보면 콘스탄티누스가 아주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성당을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뿐 아니라 중동 곳곳에도 성소를 건설했다. 성베드로대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성묘교회를 건설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 안장된 골고다 언덕 위의 묘지에 세운 교회였다. 베들레헴에는 예수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동굴 위에 예수탄생기념성당을 건설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건설한 성당, 교회의 중요성을 굳이 따지자면 성묘교회나 예수탄생기념성당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가 로마에 성베드로대성당을 건설할 때에는 로마를 기독교의 중심 성지로 삼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역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성베드로대성당은 그의 의도를 넘어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바꾸는 과정의 첫걸음이자 변화의 상징이 됐으며, 나중에는 모든 성당의 완벽한 본보기가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