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성베드로대성당은 한 번만 건설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4세기에 처음 지어졌지만 16~17세기에 여러 교황이 옛 대성당을 허물어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성당은 새 건축물인데, 완공 축성식은 1626년에 열렸으니 내후년이면 준공 400주년이 되는 셈이다.
성베드로대성당을 처음 건립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지금 대성당은 4세기에 처음 지은 ‘원본’이 아니라 16~17세기에 새로 건설한 ‘신축’이지만, 대성당의 역사를 처음 연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이니 지금 대성당의 초석을 그가 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유럽 최초의 성당인 라테라노대성당 건설 전후에 다른 대성당 부지를 고르다 바티카누스의 네로전차경기장 옆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서는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는데, 기독교인들이 훼손을 우려해 오랫동안 무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탓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성 베드로의 지하 무덤에 성지 순례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3대 교황이었던 아나클레토(재임 79~90 또는 79~92년)가 만든 작은 예배당 말고는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어 애를 먹는다’는 하소연과 ‘그곳에 성당을 지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성인의 무덤 위에 성소를 건설하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 성베드로대성당이 처음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신전을 지을 때 신이나 유명인사의 무덤, 혹은 그와 관련된 신화나 전설이 전하는 곳에 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콘스탄티누스가 왜 성베드로대성당보다 라테라노대성당을 먼저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라테라노대성당 부지는 기독교에는 의미가 없는 곳이었지만 바티카누스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기독교는 라테라노대성당보다 성베드로대성당을 먼저 짓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왜 콘스탄티누스는 그러지 않았을까?
여러 자료를 토대로 분석해보면 공사의 어려움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베드로대성당은 성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지어야 했다. 그의 무덤이 대성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야 대성당을 건설하는 의미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 베드로의 무덤은 바티카누스의 전차경기장 안이 아니라 경기장 북쪽 담장에서 수십m 떨어진 비아 트리온팔레 인근의 공동묘지 지하에 있었다. 이런 곳에 대성당을 지으려면 걸림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경사도였다. 전차경기장은 평평한 땅이었지만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공동묘지는 경사도가 작지 않은 언덕이었다. 이런 곳에 건물을 지으려면 언덕 일대에서 땅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부터 벌여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릴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난제는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비아 트리온팔레 일대가 공동묘지라는 점이었다. 그곳에는 로마 귀족의 납골당인 마우솔레움과 서민의 개인 무덤이 가득했다. 그런 곳에서 공사를 하려면 묘지를 싹 쓸어내야 했다. 하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든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헤치거나 유해를 옮길 수 없는 게 법이자 종교적 관습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법과 종교적 관습을 어겨가며 남의 무덤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성 베드로의 무덤 주변에는 성인 근처에 묻히고 싶어 일부러 그곳을 매장지로 고른 기독교인의 무덤도 많았다. 성 베드로의 제자였던 2대 교황 리노(재임 64~79년)와 이후 교황 11명의 무덤도 있었다.
세 번째 어려움은 교황 아나클레토가 성 베드로 무덤 위에 만들었다는 작은 예배당이었다. 성베드로대성당을 제대로 만들려면 이 예배당을 뜯어내야 했지만 예배당은 기독교인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성소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성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대다수 기독교인은 철거에 반대했다. 예배당을 놔두고 공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돈과 시간이 훨씬 많이 드는 것은 불가피했다.
결국 이런 여러 난제 때문에 성베드로대성당 공사는 라테라노대성당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누스가 뚝심을 갖고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공사 지연이 아니라 건설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모든 어려움을 알게 된 뒤 바티카누스에 직접 가 봤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장을 직접 눈으로 봐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실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를 데리고 간 경로는 네로가 기독교인을 전차경기장으로 끌고 간 비아 트리온팔레, 즉 ‘성스러운 순교자의 길’이었다.
현장에 간 황제의 눈앞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 많이 허물어진 전차경기장과 경사도가 심한 언덕이 나타났다. 그는 힘든 공사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일단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로마의 빼어난 토목 기술을 활용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결정의 배경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바티카누스 언덕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에 앞서 예배당 문제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기독교인들의 소원대로 예배당을 살리기로 작심한 그는 예배당을 철거하지 않는 대신 대리석과 반암을 교차로 쌓아 만든 보라색 반원형 석재 구조물을 만들어 예배당 위를 덮어버렸다. 이 구조물은 ‘미모리아 페트리’, 즉 ‘성베드로추모실’이라고 불렸다.
구조물 안쪽 벽에는 깊은 벽감을 만들어 지하에 있던 성 베드로의 시신을 옮겨 안치했다. 역대 교황의 행적을 담은 『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의 시신을 옮길 때 관 위에 덧붙인 장식이 묘사됐다.
‘석관은 구리로 덮였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였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혔다.’
성 베드로의 시신을 보호하는 사전 조치를 마친 콘스탄티누스는 주변의 공동묘지를 모두 갈아엎어 평지로 만드는 공사에 착수했다. 그는 무덤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로마인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법과 종교적 관습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황제가 대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자리를 겸직한다는 사실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자격으로 판단할 때 국가의 큰일을 위해 무덤을 이장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무덤 중 일부는 갈아엎고 나머지 일부는 흙만 덮어 평지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로마인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황제는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 불만을 억지로 막았다. 물론 황제라고 해서 설득하거나 달래는 과정을 생략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전히 이교도가 다수인 로마에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무덤 문제로 로마인을 달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인과 역대 교황의 무덤도 모조리 부수거나 흙으로 덮어버렸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들은 성당은 짓고 싶어 했으면서도 무덤을 없애기는 싫어했다. 황제는 교황 실베스테르에게 “기독교인을 설득하라”고 지시해 문제를 해결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무덤 문제를 마무리한 다음 본격적으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했다. 착공 시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319~326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됐다. 완공된 것은 333년 무렵이었지만 이후 완벽하게 마무리되기까지는 40여 년이 더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공식 때 직접 공사 현장에 가서 흙을 나르며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흙을 파내 열두 차례에 걸쳐 날랐는데, ‘12’는 예수의 제자인 12사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콘스탄티누스뿐 아니라 고대 로마의 황제, 귀족은 공공사업을 할 때 돈만 내는 데 그치지 않고 하루 정도 직접 일손을 보탬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성하는 게 관례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테라노대성당은 물론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을 때 기술적으로 가장 고민한 것은 건축 양식이었다. 당시 서유럽에는 교회라는 게 없어 기독교인들은 개인 저택에서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올렸다.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저택 내부를 터서 공간을 확보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활용한 교회라는 게 집뿐이라서 로마 건축가는 성당, 교회를 지어본 경험이 없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로마 건축가가 건설해본 고대 로마의 신전은 기능, 형태라는 측면에서 성당, 교회와 많이 달랐다. 신전의 경우 내부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제의행사는 신전 앞 공터에서 열렸고, 신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제사장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회의 사정은 달랐다. 많은 사람이 실내에서 한자리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야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건축가,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과 고민한 끝에 찾아낸 대안은 바실리카였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가 BC 3세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 로마노에 짓기 시작한 건물 양식이었다.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을 반영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바실리카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실용성을 따지는 고대 로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 양식이었다. 바실리카에는 상가는 물론 각종 오락시설이나, 드물기는 했지만, 개인 주택도 있었다. 신전뿐 아니라 법정, 학교도 있었다.
바실리카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긴 직사각형이었다. 길이는 대개 100m 안팎이었다. 폭은 길이의 2분의 1에서 3분의 1인 30~50m 정도였다. 바실리카는 원래 양옆을 열주 회랑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지붕은 씌웠지만 벽을 만들지는 않아 공기가 잘 통했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바실리카에도 벽을 세우게 됐다. 열주 회랑은 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정면 입구에 있는 기둥만 밖에서 보일 정도였다.
바실리카에는 애프스(후진·後陣)라는 부분이 있었다. 맨 안쪽에 만들어진 반원 또는 반원에 가까운 다각형 모양의 내부 공간이었다. 바실리카에서 재판이나 대형 행사가 열릴 때 재판장이나 행사 주최자는 애프스에 설치된 의자에 앉거나 제단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이것이 나중에는 성당, 교회의 애프스로 발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최고 건축가를 모두 성베드로대성당 공사에 투입했다. 그들은 바실리카를 지어본 경험이 풍부해 바실리카 형태의 대성당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신경 써야 했던 것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설계와 건축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성직자들이 원했던 것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솔로몬의 성전’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엄청난 성베드로대성당 건립비를 로마의 속주인 아시아 지역에서 걷은 세금으로 충당했다. 개인 재산도 털어 공사비로 사용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이 사재를 털어 공사비로 보탰다고 하지만 그 돈만으로는 대성당을 짓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지원이 없었다면 대성당을 짓는 것은 어려웠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성베드로대성당은 길이 106m, 폭 60m, 중앙 높이 30m의 긴 십자가 모양 바실리카였다. 대성당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건설됐는데, 성 베드로의 시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누웠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느라 그렇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사에 앞서 전차경기장도 대부분 철거했는데, 대성당은 전차경기장과 완전히 겹치지 않고 일부분만 겹친 채 조금 북쪽에 똑같은 방향으로 건설됐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전차경기장 안이 아니라 북쪽 바깥의 도로변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대성당 중앙에 넣으려면 조금만 겹칠 수밖에 없었다.
성베드로대성당의 중앙에는 신도석이 있었고, 신도석 양쪽에는 두 줄 통로가 설치됐다. 두 통로는 고대 로마의 다른 신전에서 뜯어온 22개의 기둥으로 나뉘어졌다. 대성당은 3000~4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한꺼번에 최대 1만 4000여 명이 모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베드로대성당 서쪽 끝부분은 바실리카의 특징인 애프스였다. 십자가가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가운데 부분 지하에는 석재 구조물 ‘미모리아 페트리’로 덮인 아나클레토의 예배당이 자리를 잡았다. 대성당 안에는 등불 700개가 설치됐는데 그중 120개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달려 1년 365일 하루 종일 불을 밝혔다.
콘스탄티누스는 16~17세기에 새로 지은 성베드로대성당에서는 나르텍스 바깥으로 밀려나는 홀대를 받았지만, 4세기에 직접 만든 성베드로대성당에는 그가 등장하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던 데다 대성당 건설의 일등공신이었고 공사를 수시로 챙긴 점을 감안하면 그의 모습이 대성당에 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세기에는 성베드로대성당 정면으로 들어가는 공간에 대성당 면적의 절반 규모로 ‘천국의 정원’이라는 아트리움, 즉 안마당이 만들어졌다. 아트리움 동쪽 벽 아래에 천국을 상징하는 야자수, 삼나무, 올리브 같은 여러 나무가 심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유럽 곳곳에서 성베드로대성당을 방문한 가난한 순례자는 ‘천국의 정원’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이곳에는 음식,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인이 몰렸다. 정원 가운데에는 분수가, 분수 안에는 솔방울 모양 조각이 있었다. 이 조각은 지금은 바티칸박물관의 솔방울 정원으로 옮겨졌다. 박물관에 들어가자마자 관람객을 맞이하는 거대한 솔방울이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는 성베드로대성당을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맡긴 명확한 증거이자 성경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나오는 ‘너는 베드로로다. 내가 이 바위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니라. 지옥의 문도 여기에 맞서지 못할 것이니라’라는 예수의 예언이 실현된 곳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성베드로대성당을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로 신성한 기독교 성지라고 생각했고, 이곳을 순례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대성당이 생기자마자 유럽 곳곳의 기독교 순례자가 대성당으로 모여들었다.
대성당이 완공된 뒤 내부에 교황의 무덤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여러 교황의 열망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대성당에 묻힌 교황은 5세기 레오 1세(재임 440~461년)였다. 이후 여러 교황은 수 세기 동안 안마당, 예배당까지 뜯어내 무덤을 마련했다. 무덤은 나중에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만들 때 대부분 없어졌다.
왜 역대 교황은 성 베드로의 무덤 근처에 묻히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것일까?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올라갈 때 좋은 자리를 예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곳에서 성 베드로를 만나고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들이 무덤에 신경을 쓴 만큼 정작 교회와 신도의 문제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