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

by leo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나와 입구 오른쪽에 있는 기념품가게에 들어간다. 기독교 신도는 아니지만 조그마한 묵주 하나를 골라 계산대에 올린다. 마침 한국인 수녀 한 분이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여행객이나 순례자에게 물건을 파는 일을 맡고 있다. 표정이 아주 청명하고 다정한 데다 말투가 정겹고 부드러운 수녀다.

수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신도냐”고 묻는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니라고 하자 그녀는 미소가 여전한 표정으로 “신도이든 아니든 하느님의 은총이 늘 곁에 계실 것”이라며 묵주를 봉지에 넣어준다.

수녀의 밝은 미소와 묵주가 든 봉지를 호주머니에 챙기고 온몸에 축복이 충만한 기분을 느끼며 기념품가게에서 나간다. 그리고 성베드로대성당 입구의 계단 위로 올라가 성베드로광장 쪽을 바라본다. 오벨리스크 너머로 시원하게 뻗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거리가 보인다. 멀리 거리 끝부분에는 테베레강과 폰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 그리고 강변의 푸른 나무들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성베드로광장 안으로 젊은 수녀 두 명이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등에 작은 배낭을 메고 있다. 아마 로마의 수녀원에 거처하는 수녀가 아니라 이탈리아 다른 도시, 아니면 외국에서 성베드로대성당을 순례하러 온 수녀인 모양이다.

두 수녀처럼 성베드로대성당은 4세기 건립 직후부터 많은 기독교인이 방문하는 순례 성지가 됐다. 해마다 적지 않은 순례자가 유럽 곳곳에서 몰려들었다. 로마에서는 라테라노대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성당이었고, 특히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든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는 프랑스 파리에서 자동차를 몰고 가면 13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면 두 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다. 현대보다 교통이 불편하고 치안 사정이 불안했던 중세에는 주변 도시, 인근 나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도로가 부족해 교통이 불편하고 도적떼가 곳곳에서 출몰한 데다 위생 상황이 나빠 각종 질병에 노출됐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이탈리아 내 다른 도시 기독교인조차도 로마의 성베드로대성당을 방문하려면 죽을 각오를 다져야 했다.

게다가 대성당까지 때로는 한 달, 경우에 따라서는 수개월~수년이 걸리는 여행에 들어가는 숙박비와 식비도 만만치 않았다. 길거리에서 자는 일은 예사였고, 돈이 없으면 로마로 가다가 도중에 굶어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중세에는 순례자를 포함해 방문객이 지금처럼 연간 수백만 명에 이르지는 못했고 고작해야 수천~수만 명 선에 그쳤다.

사정이 이러하다는 걸 잘 아는 교황청은 어떻게 해서든 신심을 자극해 성베드로대성당 순례자 수를 늘리고, 그를 통해 로마와 대성당의 수입을 확대하려고 특이한 제도를 고안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1300년에 도입한 ‘성년(聖年)’이라는 제도였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10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을 만들었다. 우리말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원래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고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보니파시오 8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속세 권력 장악에 욕심이 많아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에 끊임없이 간섭한 인물이었다. 그가 기독교인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성년이라는 제도를 갑자기 선포한 가장 큰 이유는 ‘돈’이었다. 교황은 프랑스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들어오던 수입을 얻지 못하게 돼 큰 궁지에 몰렸다. 이때 한 측근이 유대교 전통인 성년 이야기를 꺼내면서 많은 신도가 몰릴 것이라고 조언하자 기뻐하며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 준수사항에 따르면 먼저 기독교인은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고해하는 게 필수였다. 이어 반드시 로마를 방문해 세계에 기독교를 퍼뜨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인 성베드로대성당과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을 순례해야 했다. 로마에 머무르는 동안 성당을 딱 한 번만 방문해서는 안 되고, 로마인은 30차례, 외지인은 15차례 이상 찾아가야 했다. 그렇게 하면 살면서 지은 모든 죄를 사면받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짐작할 수 있겠지만, 성베드로대성당 순례는 무슬림에게 이슬람 성지인 메카 순례가 일생의 의무인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추측하건대 교황청이 유대교의 성년과 이슬람의 메카 순례를 적당히 섞어 새로운 성년 제도를 고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니파시오 8세의 조치 때문에 유럽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성베드로대성당 순례는 ‘희망’에서 ‘의무’로 격상됐다. 대부분 신도는 교황의 속셈을 몰랐지만, 대성당을 순례하면 죄를 사면받을 수 있다고 하니 도중에 도적떼에 붙잡히거나 병들고 굶어서 죽을 각오를 하더라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교황의 기대대로 첫 성년인 1300년 순례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해에 로마를 찾은 외지인이 20만 명에 이르렀고, 성베드로대성당으로 이어지는 폰테 산탄젤로 다리가 하루 종일 정체될 정도였다. 그들이 쓴 돈은 엄청났고, 보니파시오 8세는 재정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첫 성년을 맞아 순례 행렬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신곡』을 쓴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도 있었다.

교황청은 나중에는 성년 주기를 100년에서 50년으로, 다시 35년과 25년으로 각각 단축했다. 100년을 주기로 하면 아예 성년을 맞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신도가 생기기 때문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 탓이었다. 처음에 50년으로 줄인 것은 유대교 성년 주기가 50년인 것과 맞추기 위해서였고, 35년으로 단축한 것은 예수가 생을 마감한 나이가 35세였기 때문이었다.


단테처럼 로마를 방문한 순례자가 성베드로대성당에 가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순교의 목격자’ 오벨리스크였을 것이다. 그는 오벨리스크 앞에 무릎을 꿇거나, 오벨리스크를 붙잡고 통곡하며 성 베드로의 순교를 고통스러워했다.

순례자는 이어 성 베드로의 무덤 앞에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성베드로대성당 안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대성당 안에 가더라도 무덤을 볼 수는 없다. 무덤은 대성당 지하에 있는데 지하로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친견할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었고, 지금은 미리 신청해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면 무덤을 볼 수 있다.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5~12m 깊이의 공동묘지를 둘러보는 ‘바티칸 네크로폴리스 투어’가 바로 그것이다. 투어 시작 장소는 ‘발굴 사무소’라는 뜻을 가진 우피치오 스카비다. 사무소는 성베드로광장 바깥의 ‘초기순교자광장’에 있는데, 이곳은 성 베드로를 포함해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던 원래 장소다.

순교 현장이 광장 바깥에 있는 것은 현재의 성베드로대성당이 고대 로마의 네로전차경기장 바로 위에 포개지듯이 지어진 게 아니고 성 베드로가 묻힌 무덤을 중심으로 건설됐기 때문이다. ‘초기순교자광장’은 지금은 텅 비었지만, 고대 로마 시대에는 전차경기장의 중간 지점이어서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지금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성베드로광장의 중간 부분은 당시에는 전차경기장의 동쪽 끝이었다.

가이드 투어를 따라 지하 공동묘지에 가는 대신 중세의 순례자를 따라 성베드로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첫 성년이 발표됐던 1300년에는 없었지만 지금 성베드로대성당 중앙에는 ‘성 베드로의 발다키노’가 있다. 발다키노는 한자로는 ‘천개(天蓋)’, 순 우리말로는 ‘닫집’이라고 한다. 미사를 올리는 제단이나 교황의 옥좌, 또는 교황이 나들이를 갈 때 타고 다니는 마차의 의자가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먼지에 시달리기 않도록 위를 가려주는 지붕이다.

발다키노 지하에는 고대 로마 때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발다키노 왼쪽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면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예배당’이 보인다. 이 예배당 바깥 부분이 바로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 즉 오벨리스크가 서 있던 곳이었다. 물론 지금은 ‘초기순교자광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성 베드로 예배당’ 벽에는 이름에 걸맞게 귀도 레니가 만든 ‘십자가가 거꾸로 매달리는 성 베드로’ 모자이크가 붙어 있다.

17세기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1623~1644년)가 베르니니에게 지시해 무덤 위에 발다키노를 세운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발다키노 위를 쳐다보면 미켈란젤로가 만든 돔이 나온다. 돔은 천국의 영광이 빛의 형태로 대성당 안을 환히 비출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이다. 돔과 발다키노를 일직선으로 연결한 뒤 지하로 선을 더 늘리면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로 간다. 즉 돔~발다키노~성 베드로의 무덤은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돔은 ‘신의 나라’, 발다키노는 ‘인간의 나라’를 상징하고 성 베드로의 무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의미하니 천국-지상-성인은 서로 연결됐다는 뜻이다.

발다키노 앞에는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이 있다. 이 시설도 첫 성년 때에는 없었고,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건설하던 중이던 17세기에 조각가 겸 건축가 카를 마데르노가 교황 바오로 5세(재임 1605~1621년)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것이다. 대성당을 찾아온 순례자가 성 베드로의 무덤에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그 위에서 기도나마 드릴 수 있게 해주자는 게 교황의 생각이었다.

고해성사실에는 뿔 모양의 황금색 기름등잔이 설치돼 옛날부터 지금까지 1년 356일 내내 불을 밝힌다. 종교적 신앙의 밝은 길을 찾으려고 성인의 무덤 위에서 기도하는 순례자가 어둠 속에서 헤매며 기도를 드리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해성사실 안쪽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조각상이 있다. 두 조각상 사이에는 팔리움을 보관하는 ‘팔리움의 벽감’이 만들어졌다. 팔리움은 우리말로 ‘영대’라고 번역되는데, 대주교가 제복 위 어깨에 걸치는 흰 양털 띠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교황이 대주교를 서임할 때 팔리움을 어깨에 걸어주었다. 교황청은 평소에는 팔리움을 다른 곳에 보관하다 대주교에게 걸어줄 때가 되면 벽감으로 옮겼다. 일부 신도나 관광객은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이 성 베드로의 무덤이며 벽감에 성 베드로의 유해가 안치됐다고 착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성 베드로 조각상 위의 천장에는 아나클레토가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바치는 작은 예배당을 만드는 그림이, 벽감 위의 천장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고대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가 제단 봉헌식을 거행하는 그림이 있다. 성 바오로 조각상 위의 천장에는 바오로 5세가 새로 단장한 고해성사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첫 성년을 맞아 성베드로대성당을 찾아간 중세의 순례자는 안타깝지만 지하의 성 베드로 무덤에는 갈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순례자 사이에 끼어 대성당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 종일 수없이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면서 눈물을 한없이 쏟을 뿐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가 사라져 영혼이 정화된 기쁨을 느끼며 밝은 표정으로 대성당에서 나갔다.

순례자는 다음날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똑같은 일정을 반복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거꾸로 안색은 더 창백해졌고 몸은 수척해지기만 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이제 여기서 쓰러져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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