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랜드마크인 콜로세움에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1.5km 정도 걸어가면 큰 오벨리스크가 나타나고, 그 뒤에는 성베드로대성당 못지않게 큰 대성당이 보인다. 성베드로대성당,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 산타마리아 마조레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메이저 대성당)인 라테라노대성당이다.
성베드로대성당의 공식명칭은 그냥 간단하게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인데 반해 라테라노대성당의 공식명칭은 놀라울 정도로 길다. ‘최고의 성 구세주와 성 세례자 요한 및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의 라테라노대성당, 로마와 세계 모든 성당의 머리이며 어머니’이다. 앞의 부분은 대성당을 어떤 성인에게 헌정됐는지를 나타내는 이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뒷부분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곳이 세계의 모든 성당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 같은’ 성당이며, 세상 모든 교회의 모태 격인 ‘어머니 교회’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방문객이 가장 많은 성당인 성베드로대성당이 아니라 라테라노대성당이 ‘어머니 교회’라고?
성베드로대성당은 4대 대성당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는 성소다.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설됐고, 4대 대성당 중에서 유일하게 바티칸시국 안에 자리를 잡았고, 교황청의 각종 행사도 이곳에서 열리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성베드로대성당이 ‘어머니 교회’가 아니라고?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라테라노대성당의 처마돌림띠에 붙은 글은 그냥 성당이 아무렇게나 만든 게 아니다. 함부로 이런 글을 붙였다가는 전 세계 교회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 공식명칭이 보여주듯 4대 대성당 중에서 공식적으로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은 성베드로대성당이 아니다. 성베드로대성당은 교황인 로마 주교의 주교좌성당도 아니다.
그 역할을 맡은 곳은 다름 아니라 라테라노대성당이다. 로마 주교의 공식 의자인 카테드라도 라테라노대성당에 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기독교를 세계로 퍼뜨린 주역인 성 베드로가 들으면 섭섭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라테라노대성당이 성베드로대성당보다 공식적으로 우위에 서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는 이야기다.
라테라노대성당은 318년에 완공돼 성베드로대성당보다 10년 이상 먼저 지어졌으며, 로마뿐 아니라 서유럽에서 최초의 교회였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고대 로마의 기독교인이 개인 저택의 지하실이나 카타콤베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시설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당연히 모든 교회의 머리이며 어머니 교회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라테라노대성당이 이처럼 중요한 성소이다 보니 주변에는 종교적으로 큰 가치를 가진 성당이나 건물이 즐비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 발견했다고 하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조각을 모신 ‘산타크루체 인 게루살렘(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 역시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왔다는 ‘스칼라 상크타(성스러운 계단)’가 있는 상크타산크토룸예배당이 대성당 주변에 있다. ‘빌라도의 계단’이라고도 불리는 스칼라 상크타는 예수가 유대 총독 빌라도의 저택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 내려갔던 계단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성베드로대성당에 있는 교황청도 역사를 되짚어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라테라노대성당에 있었다는 점이다. 1000년 이상 그곳에서 지내다가 바티칸으로 이전한 것이다. 지금도 라테라노대성당 뒤편에는 당시 교황이 거주했던 라테라노궁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교황청은 애초 라테라노대성당에 있었던 것이며, 지금은 어떻게 해서 성베드로대성당으로 옮겨지게 된 것일까?
라테라노대성당 일대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평민 귀족이었던 라테라누스 가문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라테라노라는 이름이 붙었다. BC 1세기~서기 1세기 로마 역사학자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라테라누스 씨족은 평민으로서 최초의 집정관이 된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는 10번이나 호민관을 지낸 평민의 수호자였다.
여기에는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은 물론 다른 귀족이나 일부 황제 가족의 궁전도 있었다. 현재 대성당 뒤편의 비아 데이 라테라니 거리가 저택이 몰려 있던 곳이다. 1959년 라테라노궁전 뒤의 산지오반니병원 지하에서 대형 도무스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현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가 살았던 곳으로 밝혀졌다.
라테라누스 저택은 세월이 흘러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는 도무스 파우스타라고 불렸다. 여러 역사학자는 ‘사두정치 때 서방의 황제였던 막스미니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가 저택의 주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기독교 기록에 따르면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와 결혼할 때 도무스 파우스타를 결혼 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라테라노대성당 앞에는 원래 ‘철인 황제’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세워져 있었다. 153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를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교황 바오로 3세(재임 1534~49년)의 지시를 받은 미켈란젤로가 캄피돌리오 언덕을 광장으로 재단장하면서 기마상을 광장 한가운데로 옮겼다. 중세 기독교는 고대 로마의 황제나 장군 기마상을 모조리 부수었는데, 라테라노대성당 앞에 있던 이 기마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오해해서 부수지 않았다. 그리고 기마상을 ‘콘스탄티누스 기마상’이라는 뜻인 카발루스 콘스탄티니라고 불렀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파우스타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제국의 단독황제가 된 이후 교황 밀티아데스(재임 310~314년)에게 도무스 파우스타를 선물했다. 그는 또 같은 해에 라테라노대성당을 짓기 시작해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 시대이던 318년 11월 9일 축성식을 치렀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테라노대성당을 지었다는 기록은 4세기 아프리카 누미디아 밀레비스의 주교였던 기독교 역사학자 성 옵타투스가 남긴 문서에 담겼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에 입성한 직후 기마 근위대 기지와 도무스 파우스타를 교황 밀티아데스에게 선물해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9일에 정문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성 옵타투스와 비슷한 4세기 종교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도 『교회의 역사』에 라테라노대성당 봉헌식 모습을 기록했다.
‘라테라노대성당이 건립되자 모든 기독교인은 신을 숭앙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여러 도시에서 봉헌 축제가 열렸다. 새로 지은 집을 축성하는 행사는 새 대성당에서 진행됐다. 주교들이 모였고, 외국인도 몰려들었다.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보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완벽한 조화로 뭉쳤다.’
이때부터 도무스 파우스타는 라테라노궁전으로 불렸으며, 역대 교황은 아비뇽유수 이전까지 ‘도무스 데이(신의 궁전)’라고도 불린 라테라노궁전에서 살았다. 성베드로대성당과 달리 라테라노대성당과 라테라노궁전은 당시 로마를 보호하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에 있어 외적의 침략에서 안전했기 때문에 교황이 거처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4세기부터 라테라노대성당과 라테라노궁전에 살던 교황이 바티칸궁전으로 가게 된 것은 14세기 교황의 아비뇽유수(1309∼1377년)와 연이은 화재 때문이었다. 아비뇽유수는 라테라노대성당에는 재앙 그 자체였다. 교황이 아비뇽에 가버리자 대성당을 관리하는 대부분 성직자도 떠나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08년 6월 6일 라테라노대성당에 큰 불이 났다. 사흘 동안 이어진 불 때문에 대성당의 신도석 지붕과 라테라노궁전이 큰 피해를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360년에 다시 불이 나 대성당을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교황이 로마에 없으니 대성당을 보수하거나 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임 1370~1378년)가 1377년 긴 아비뇽유수를 끝내고 로마로 돌아왔지만 라테라노대성당에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성당의 위상을 더욱 떨어뜨리는 일에 불과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의 처소였던 라테라노궁전이 화재로 전소돼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이 귀족의 집을 빌려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교황은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제단과 수행단을 거느렸다. 아무리 적어도 수십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이 로마 곳곳의 귀족 집에 흩어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게 뻔한 일이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에 돌아간 것은 날씨가 서서히 싸늘해지는 가을인 9월이었다. 서둘러 숙소를 구하지 않으면 겨울 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일단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성당의 사제 숙소에 임시 처소를 마련했다. 나중에는 산타마리아 마조레대성당으로 옮겼다. 최종적으로는 성베드로대성당 곁에 있던 바티칸궁전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옮겨 다닌 걸 보면 각 성당의 임시 숙소가 좁거나 초라해서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당시 성베드로대성당 옆에는 성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지내거나 각종 행사를 준비할 때 이용하던 바티칸궁전이 있었다. 궁전을 처음 지은 사람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제56대 교황 심마쿠스(재임 498~514년)였다. 그가 건물을 지은 계기는 교황청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심마쿠스는 498년 11월 22일 라테라노대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런데 숙적인 라우렌티우스가 비잔틴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같은 날 산타마리아 마조레대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세력 싸움에서 밀린 심마쿠스는 라테라노궁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성베드로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사람이 지낼 방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그는 할 수 없이 대성당 바닥에 누워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밝자 대성당 밖에 당분간 거처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쫓겨난 교황이 갈 곳이 없이 임시로 지은 이 집이 나중에 교황의 처소이자 교황청과 바티칸시국의 시초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날 바티칸시국의 시작은 결국 교황의 정치적 욕심이 빚은 교회의 분열이었던 셈이다.
심마쿠스는 당시 서로마의 왕이던 서고트족 출신의 테오도리크에게 누가 교황인지 판결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도리크는 ‘그날 시간을 따져 누가 먼저 선출됐는지, 그리고 교황청에 누구의 지지자가 더 많은지를 보고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테오도리크는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라 심마쿠스의 지지자가 더 많은 걸로 결론짓고 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심마쿠스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던 많은 성직자에게 1인당 금화 400솔리디를 뇌물로 제공했다. 금화 1솔리디 무게는 4.5g이었기 때문에 400솔리디는 오늘날 시세로 환산하면 1억 5000만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심마쿠스가 라테라노궁전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버려진 바티칸궁전은 약 300년 뒤 교황 레오 3세(재임 795~816년)에 의해 재건축됐다. 그는 800년 프랑스 국왕 샤를 대제, 즉 샤를마뉴의 초대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거행했는데, 대관식에 참석한 샤를마뉴의 수행단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궁전을 화려하게 개축한 것이었다.
이후 역대 교황은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오후 또는 밤늦게 열린 행사에 참석한 뒤 라테라노궁전으로 돌아가는 게 어렵다고 판단되면 바티칸궁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런 역사를 고려할 때 바티칸궁전도 꽤 넓고 멋진 곳이었지만 교황이 장기간 숙박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을 때 바티카누스 언덕에는 성베드로대성당과 바티칸궁전 외에 건물이라고는 보기 드물었다. 그로부터 70년 뒤인 1450년에 그려진 성베드로대성당 그림을 봐도 대성당과 교황 숙소, 시스티나성당 외에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교황청 건물과 정원이 들어선 모습은 없고 헐벗은 언덕에 불과하다.
라테라노궁전에 잘 곳이 없어 바티칸궁전으로 간 그레고리오 11세는 현장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황당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모몽에서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1352년)의 조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삼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아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깔끔하고 우아한 숙소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 처지인 그에게 바티칸궁전은 심하게 말하면 마구간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어쩔 수 없이 바티칸궁전을 숙소로 삼아야 했다.
나중에 우르바노 6세(재임 1378~1389년)와 후임 교황들이 애쓴 덕분에 바티칸궁전은 조금씩 나아져 교황 거주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됐다. 현재의 바티칸궁전은 특정 교황이 종합적 계획을 갖고 단번에 만든 곳이 아니었다. 역대 교황이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신축하고 보수한 결과 오늘날 수십 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레고리오 11세 이후 모든 교황은 이후 라테라노궁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티칸궁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5세기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는 바티칸궁전을 아예 공식 교황 사무실로 선언했다.
‘역사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교황청이 라테라노에서 바티칸으로 이전한 과정이야말로 이 표현에 딱 들어맞는다고 볼 수 있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가 없었다면, 라테라노대성당에 불만 나지 않았다면 기독교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고, 교황청 ‘성좌(Holy See)’의 주소는 바티칸시국이 아니라 라테라노시국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