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모독

by leo


교황청은 4세기에 건설된 성베드로대성당을 끊임없이 보수, 수리했다. 때로는 소규모였고 때로는 대규모였다. 그런데 보수, 수리만으로는 대성당을 유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대성당이 이런 위기에 빠진 것은 14세기였다. 교황 7명이 아비뇽유수(1309~1377년) 때문에 로마를 떠나 프랑스에 가서 67년이나 머무르는 바람에 관리할 사람이 없어진 게 원인이었다.

아비뇽유수에 종지부를 찍고 로마로 돌아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임 1370~1378년)는 피폐해진 로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교황이 자리를 비운 60여 년 사이 로마 인구는 크게 줄었고 경제력도 매우 약해졌다. 당시 로마 인구가 얼마나 많이 감소했던지 2만 명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상태가 엉망진창인 것은 성베드로대성당을 포함한 로마 시내의 모든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성베드로대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곳곳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고, 나무로 만든 문과 제단에서는 썩어 문드러지는 악취가 났고, 곳곳의 유리창이 깨져 찬바람이 거침없이 들어왔고, 벽이나 천장은 부식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골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잘 아는 일이다. 집이라는 게 정말 특이해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 체온을 느끼고 함께 호흡하면서 튼실하게 유지되지만,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서 빈집이 되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정신적으로 무너진 연인처럼 급속도로 낡고 심지어는 무너져버린다.

성베드로대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교황이 아비뇽유수 탓에 로마를 60여 년이나 비운 사이에 대성당의 상태는 엉망진창이 됐다. 얼마나 아수라장이었던지 관리, 보수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거나 아예 새로 지어야 했지만 당시 로마와 교황청 사정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탈리아의 강국이던 피렌체 등 여러 도시는 프랑스 출신인 그레고리오 11세가 교황 자격으로 로마로 돌아오는 것에 반대했고, 화난 교황은 이들에게 전쟁과 파문을 연거푸 선언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게다가 성베드로대성당은 황폐해졌든 부서졌든 그 자체만으로 성소였다.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지 않으면 무너질 판일지라도 여기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은 신성성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비판이 두려워 아무도 대성당을 크게 고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단순히 썩은 문을 바꾸고 깨어진 창문을 새로 달고 부식한 벽과 천장에 새로 칠을 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다. 이런 사정은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 이후 70여 년이 지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1436~1439년 7년 동안 여러 나라를 두루 여행한 다음에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당시 로마와 성베드로대성당의 처참한 모습이 담겼다.

‘성베드로대성당은 엄청나게 크다. 지붕은 화려하게 장식됐다.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고 지저분하다. 많은 곳이 부식됐다. 로마는 크기에 비해 인구가 무척 적다. 거의 내버려진 도시처럼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큰 건물 잔해는 여기저기 널브러졌고, 공기는 정말 나빠 사람의 건강에 큰 해를 줄 정도다.’


세상에는 늘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15세기의 계몽주의자라고 불러도 될 만한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가난한 의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젊었을 때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여러 인문학자와 교류한 데다 교황의 외교관으로 많이 활동해 학식이 풍부했고, 국제정세에도 탁월해 열린 식견도 가졌다.

교황이 된 그는 피렌체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로마에 도입했고, 비잔틴제국에서 가져온 고서를 포함해 장서 5000권을 갖춘 도서관을 열었다. 이곳은 발전해 나중에 바티칸도서관이 됐다. 그는 늘 주변에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다. 르네상스가 로마에서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적극 후원한 덕분이었다.

니콜라오 5세는 또 오랫동안 방치됐던 로마의 수도시설을 개량했고 도로를 포장하고 성벽을 보강했다. 오늘날 트레비분수로 유명한 고대 로마의 수도시설 아쿠아 비르고를 1000년 만에 되살리고 무너진 산탄젤로를 재건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니콜라오 5세는 자금 부족으로 방치됐던 로마의 여러 성당 수리 사업도 진행했다. 그가 손을 댄 성당은 6세기에 건설된 산토 오피스톨리 성당, 성 바오로가 묻힌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 4세기에 건설된 산타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성당 등 10여 개에 이르렀다. 기득권 세력이던 성직자, 로마 귀족이 교황청과 로마 형편에 맞지 않는 과다 지출이라며 비난했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니콜라오 5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베드로대성당을 사실상 새로 짓다시피 재건축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렇게 다짐한 것은 엄청난 두 사건을 경험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 사건은 1450년 폰테 산탄젤로 다리에서 발생한 대참사였다. 그해는 5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이었는데 유럽 곳곳에서 죄를 사면 받으려는 순례자가 얼마나 많이 몰렸던지 성베드로대성당부터 폰테 산탄젤로 다리까지 인파로 꽉 막힐 정도였다. 이때 사람들이 서둘러 대성당에 들어가려고 서로 미는 바람에 다리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해 무려 200명이 숨졌다.

두 번째 사건은 다리 사고로부터 3년 뒤인 1453년에 일어난 비잔틴제국의 멸망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란 니콜라오 5세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피렌체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비잔틴제국의 팔레올로구스 황제가 참석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십자군 원정은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교황은 두 사건을 계기로 로마를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중심도시로, 성베드로대성당을 기독교 최고의 성소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니콜라오 5세는 처음에는 수리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끊임없이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건축가이자 사제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대성당 상태를 조사한 뒤 만들어 올린 충격적인 보고서가 그의 마음을 바꿨다.

‘한 번 더 충격을 받으면 대성당 남쪽 벽이 무너질 것이다. 다른 벽이 연쇄적으로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

니콜라오 5세는 보고서를 읽고 너무 놀란 나머지 대대적인 재건축공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먼저 보수에 필요한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해체하기로 했다. 그는 1차분으로 콜로세움에서 수레 2522대 분량의 석재를 뜯어 대성당 앞으로 옮겼다. 구체적 보수 계획이 세워지면 공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때 교황청은 물론 로마 곳곳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대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니콜라오 5세는 결국 죽을 때까지 대성당 재건축 작업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성베드로대성당에 손을 대지 못한 게 너무 안타까웠던 그는 눈을 감기 직전 침대에서 유언을 남겼다.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대중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눈에 호소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해.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신앙이라는 것은 너무 허약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일 뿐이야. 만약 교황청이 신의 힘으로 이뤄진 엄청난 건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념물을 되살린다면 그러한 신앙은 자라나서 더 강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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