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씨앗

by leo


개혁이라는 것은 처음에 물꼬가 터지는 게 어려울 뿐 길이 한번 열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이뤄지게 마련인 게 세상의 이치였다. 대부분이 신성모독이라면서 손도 못 대던 성베드로대성당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로부터 50여 년 뒤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513년)는 니콜라오 5세보다 더 획기적인 방안을 발표했다. 대성당을 수리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대성당을 아예 허물고 새로 짓겠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전운에 휩싸인 시기에 교황 자리에 오른 율리오 2세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 장군 같은 성격을 더 많이 가진 인물이었다.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를 앞두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뿌려 화제를 모았고, 이탈리아를 차지하려던 여러 나라와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스만투르크로 십자군 원정을 가려고 했다. 그 때문에 별명조차 ‘전사 교황’이었다.

율리오 2세는 심지어 교황청을 지킬 군대를 만들었다. 오늘날 ‘바티칸’ 하면 떠오르는 스위스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군대를 만든 것은 첫째는 자존심, 둘째는 자주국방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청에는 병력이 없다 보니 이탈리아의 소국조차 교황을 무시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지어 창칼로 교황을 위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율리오 2세가 군대를 만들면서 스위스용병을 고른 것은 불굴의 용기를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난한 나라여서 스위스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그들은 기율이 엄격하고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고용주을 지키려는 충성심이 강해 인기가 많았다.

율리오 2세는 1503년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첫 근위병 150명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3년 뒤인 1506년 1월 22일이었다. 이날은 지금까지도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로 지켜진다. 율리오 2세는 근위대 규모를 6000명으로 키웠고,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율리오 2세는 예술도 매우 좋아해서 라오콘 군상 조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바티칸 궁전을 바티칸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궁전의 시스티나성당에 ‘천지창조’를 그리게 했고, 라파엘로에게 ‘라파엘로의 방’을 꾸미게 했다. 음악도 무척 좋아해 바티칸에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그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라고 호평했다.

율리오 2세는 원래 성격이 독단적이고 단호하고 호전적이었다. 할 일이 눈에 보였을 때 서둘러 해치우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추진력이 강했다. 그가 성베드로대성당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겠다고 했을 때 대다수 성직자와 신도가 과격하게, 한목소리로 반대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반대론자가 내세우는 신성모독을 도리어 재건축 이유로 내세웠다.

“성베드로대성당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대성하의 무덤을 모신 대성당을 엉망으로 놔두는 게 더 신성모독입니다.”

율리오 2세는 니콜라오 5세가 성베드로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하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실패한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새 대성당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서둘러 열었다. 공모전에는 곳곳에서 여러 설계안이 참가했다. 그중에서 율리오 2세에게 새 대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부추긴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 르네상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율리오 2세는 최종결정을 내린 뒤 공사에도 속도전을 적용했다. 그는 1506년 4월 18일 새 성베드로대성당의 초석을 놓는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는 직접 초석을 들어 기존 대성당 바닥 7m 아래로 내려가 놓았다. 기록에 따르면 성베드로대성당 지하로 내려간 교황은 신성모독 행위에 분노한 지상의 추기경, 신도들이 흙을 덮어 자신을 산 채로 묻어버릴지 모른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지상의 스위스근위대 대장이 서둘러 올라오라고 권유하자 그는 초석만 놓고 재빨리 지상으로 돌아갔다.

율리오 2세는 솔직히 교황이기에 앞서 민족주의자로서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진 인물이었다.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이면서도 이교도 제국이었던 고대 로마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매우 좋아했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남들에게는 “율리오라는 교황 칭호를 고른 것은 4세기 교황 율리오 1세를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늘 좋아했던 고대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율리오 2세는 성베드로대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면서 ‘복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복원’은 대성당 복원이 아니라 ‘고대 로마 황제 시절의 복원’을 의미했다. 대성당은 ‘고대 로마의 전성기’였던 4세기 콘스탄티누스 시절에 완성됐으니 이곳을 새로 짓는다는 것은 고대 로마의 복원이라는 게 교황의 속셈이었다.

율리오 2세가 성베드로대성당을 급진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자금과 많은 예술가 덕분이었다. 당시 유럽 각국은 ‘신세계 발견’과 식민지 개척으로 외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교황청도 그에 걸맞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그는 교황청의 돈을 활용해 건축가, 조각가, 화가, 음악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덕분에 유럽 곳곳에서 탁월한 예술가들이 앞다퉈 로마로 몰려들었다.

신념에 가득 차고 추진력이 탁월한 교황에서 교황청 금고에 가득 찬 막대한 자금, 로마 골목을 가득 메운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까지, 율리오 2세가 성베드로대성당 공사를 자신감 있게 시작할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셈이었다. 그는 공사를 마무리한 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초대형 마우솔레움을 만들게 해 그곳에 묻힐 ‘사심’도 꿈꿨다.

기존 성베드로대성당 파괴와 새 대성당 기초공사는 교황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브라만테가 맡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던 브라만테는 인부 2500명을 동원해 대대적인 대성당 파괴 작업을 진행했다. 여러 교황의 무덤에서 조각, 모자이크, 그림, 제단에 이르기까지 남아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브라만테가 얼마나 심하게 대성당을 파괴했던지 당시 로마인은 그에게 ‘파괴자’라는 뜻인 ‘일 루이난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심지어 성 베드로의 무덤도 옮기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교황이 꾸짖으며 만류한 덕분에 무덤은 그대로 남게 됐다.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에 건설한 성베드로대성당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벽화 같은 각종 장식도 거의 대부분 파괴됐다. 새 건물을 지을 때 기존 건물의 문화재, 유적을 이전해서 살려야 한다는 현대적 개념이 당시에도 있었다면 지금도 옛 성베드로대성당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때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원래 13~14세기 피렌체 출신의 대화가 지오토가 그려 옛 성베드로대성당의 외벽에 걸었던 ‘작은 배’라는 뜻의 ‘나비첼라’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가 이 작품을 만든 것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1300년에 도입한 첫 ‘성년(聖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에게 갔다’는 성경 ‘마태복음’ 14장 29절의 장면을 담았다.

원래 길이 13m 모자이크였던 ‘나비첼라’도 브라만테에 의해 파괴됐는데 운 좋게 총 길이를 합쳐 2m 정도인 작은 조각 여러 개만 살아남았다. 조각 일부는 바티칸박물관에 보관됐고, 나머지는 라치오주 보빌 에르니카 마을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성베드로대성당 나르텍스에 가면 회랑의 상부에 달린 반원형 공간인 루네트에 모자이크 ‘나비첼라’가 붙어 있는데, 나중에 복제돼 대성당에 걸린 것이었다.

‘교회의 구세주’였던 콘스탄티누스를 담은 모자이크도 나비첼라와 함께 부서져 없어졌다. 8세기에 ‘공현대축일’을 주제로 만든 모자이크도 비슷한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조각 일부는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성당으로 옮겨졌고, 다른 조각 일부는 피렌체의 산마르코대성당 제단 장식에 사용됐다.

옛 성베드로대성당의 안마당에 있었던 솔방울 조각은 뜯겨 바티칸박물관의 솔방울정원으로 옮겨졌다. 옛 대성당 복도에 세워졌던 기둥 중 일부는 베르니니가 발다키노를 만들 때 사용했다. 다른 일부는 새 대성당의 돔을 받치는 기둥으로 이용됐다.

그나마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물은 바티칸박물관 피나코테카관에 전시된 ‘스테파네시의 트립틱’이다. 트립틱은 우리나라 병풍처럼 그림 세 점을 나란히 그린 것을 말한다. 13~14세기 추기경 스테파네시가 옛 대성당 제단 뒤편을 장식하기 위해 지오토에게 의뢰해 만든 것이었다.

율리오 2세는 성베드로대성당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교황이 된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새 성베드로대성당은 크기와 웅장미에서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를 넘어설 것이다. 대성당 공사비에 자금을 보태는 자비로운 후원자에게는 면죄부를 추가 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그가 대성당에 남긴 마지막 공헌이면서 나중에 기독교의 신교와 구교 분열을 초래하게 될 ‘갈등의 씨앗’이었다.


율리오 2세 이후 여러 교황은 성베드로대성당 신축계획을 철폐하지 않고 계속 공사를 이어갔다. 공사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계속 찍어내는 바람에 반발을 사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공사비가 천문학적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성베드로대성당을 짓는 데에는 금화 4680만 듀캇이 들어갔다. 이 돈의 현대적 가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환산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여러 가지 계산법을 골고루 동원해 보면 9조~10조 원 정도라고 한다. 여기에 당시의 구매력이 21세기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현대적 가치는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16세기 초 유럽의 직업별 연봉을 보면 저소득층인 비숙련노동자 15~20듀캇, 중산층인 교사나 사제 25~30듀캇, 숙련노동자 50듀캇 정도였다. 고위층인 귀족이나 고위 사제 1000~2000듀캇을 벌었다. 이걸 보면 4680만 듀캇이라는 돈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 비숙련노동자 230만~300만 명, 귀족과 고위 사제 2만 3000~4만 6000명의 1년 수입이었다.

당시 유럽의 경제력을 감안했을 때 교황이 전 유럽에서 면죄부로 돈을 빼앗다시피 긁어모으지 않았다면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가혹했고 지나쳤으면, 평민은 물론 귀족까지 종교개혁에 가담할 정도가 됐을까?

각종 전쟁과 내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중단되기도 했지만 공사가 포기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마침내 대성당은 착공 120년 만인 1626년 완공됐고, 우르바노 8세(재임 1623~1644년)가 11월 18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율리오 2세가 초석을 놓은 지 120년,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옛 성베드로대성당이 축성된 지 1300여 년 만이었다.

비극적인 사실은 성베드로대성당을 짓느라 발행한 면죄부 때문에 신교와 구교로 갈라진 기독교가 성베드로대성당 축성식을 치른 해에는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년)을 8년째 이어가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성 베드로가 묻힌 대성당의 축성식은 모든 기독교인의 축복 속에 치러지지 못했던 것이다.

신교와 구교는 전쟁 동안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며 이슬람과 전쟁할 때보다 더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기독교인 450만~800만 명이 죽었다. 주요 전장이었던 독일의 인구는 절반이나 줄었다. 양측은 심지어 교회와 성당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성상까지도 훼손했다.

율리오 2세가 옛 성베드로대성당을 없애겠다고 했을 때 모든 추기경과 로마 시민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그들이 내세운 반대 근거는 신성모독이었다. 그들은 “성베드로대성당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여진 직후에 생겨 1200년 동안 모든 신도의 존경을 받아왔다. 새 성당을 만든다는 핑계로 이 성당을 파괴한다면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과연 그들의 걱정대로 율리오 2세가 옛 대성당을 파괴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해 기독교가 갈라지고 같은 교인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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