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발굴

by leo


새 성베드로대성당이 생길 때 옛 성베드로대성당은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성 베드로가 묻혔다는 지하 무덤만은 옛날 그 자리에서 옛날 그 모습을 유지했다. 맨 처음 새 성베드로대성당 사업을 맡은 건축가 브라만테가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513년)에게 무덤을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새 대성당 건축 사업에도 반대가 극심한 판국에 성 베드로 무덤까지 옮기려 하다가는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율리오 2세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다. 사실 교황청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이 측근에게 암살당한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9세기 사라센 해적이 성베드로대성당을 침탈하는 걸 막지 못한 요한 8세(재임 872~882년)가 측근이 준 독약을 먹고 몽둥이로 얻어맞아 암살당한 걸 시작으로 생전에 퇴임했다가 감옥에 갇혀 살해당한 13세기 첼레스티노 5세(재임 1294년)까지 무려 13명이 암살당했거나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새 성베드로대성당이 완공됨으로써 성 베드로는 ‘새집’을 얻게 됐지만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옛 성베드로대성당을 만들 때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있던 아나클레토 예배당을 ‘미모리아 페트리’, 즉 ‘성베드로추모실’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무덤으로 가는 게 어려워졌는데,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은 뒤에는 길이 더 복잡해져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길을 아는 사람은 길을 설명하는 지도나 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죽어버렸다.

이후 역대 교황이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정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성 베드로의 무덤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발굴 작업을 해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겠다고 발굴 작업을 하려면 성베드로대성당의 일부분을 부수어야 했다.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발다키노 바로 앞의 ‘성베드로고해성사실’을 들어내고 길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는 게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성 베드로가 순교해서 묻혔다고 옛 기독교 성인들이 ‘말씀’을 후세에 전했으면 믿을 일이지 왜 의심을 품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다. 무덤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대성당을 파헤치겠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무덤을 찾기 위해 대성당을 지하까지 파내려가다가 대성당 바닥이 붕괴되는 사고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발굴결과에 따라 인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길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실수했다간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여러 교황이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고 싶어 했으면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교황 비오 12세(재임 1939~1958년)는 이런 점에서 용감했던 데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 직전인 1940년 무덤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성 베드로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후원해 거의 10년간에 걸쳐 성베드로대성당 지하를 두 차례 발굴하게 했다. 그가 무덤 발굴 작업에 나선 것은 종교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선임 교황 비오 11세(재임 1922~1939년)를 묻기 위해 대성당 바닥을 파헤치는 작업을 하다 공동묘지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교황이라도 성베드로대성당을 함부로 파헤치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오 12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때문에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가려진’ 덕분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에서 다들 살아남는 데 급급하다 보니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하는 일을 몰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교황은 그 덕분에 1949년까지 10년 가까이 성베드로대성당 지하를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성베드로대성당이 꽤 파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굴단장은 독일 출신의 성직자인 루드비히 카스 추기경이었다. 카스 추기경과 발굴대원들은 성베드로고해성사실 옆을 부수고 아래로 내려가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지하에서는 높이에 따라 여러 제단이 차례로 나왔다. 옛 교황들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묻히겠다며 층층이 만든 무덤의 제단이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클레멘스 13세(재임 1758~1769년), 갈리스토 2세(재임 1119~1124년), 대 그레고리오(재임 590~604년)였다.

제단을 지나 지하를 더 파들어 간 발굴단은 지하 5~12m 깊이에서 마침내 고대 로마의 공동묘지인 네크로폴리스를 찾아냈다. 이곳에서는 처마돌림띠 조각이 나왔는데, 고대 로마 이교도의 석조 납골당인 마우솔레움에 사용된 처마돌림띠로 추정됐다. 이런 석조 납골당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각 납골당에서는 납골 항아리, 관, 무덤, 아름답게 장식한 벽화가 나왔다. 그야말로 ‘죽은 자의 도시’였다. 1세기부터 4~5세기까지 납골당 건설 연도는 다양했다. 그곳에서 1000구 이상의 유해가 발견됐다. 유해는 대부분 겹겹이 쌓인 상태였다.

발굴단은 지하로 더 파고 내려가다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있던 아나클레토의 예배당을 덮어씌운 미모리아 페트리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발견했다. 구조물을 뚫고 들어가자 ‘붉은 벽’이 나타났고, 벽에서는 아주 인상적인 벽감이 드러났다. 벽을 일부러 파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벽감은 길이 77cm, 폭 28cm, 높이 31.5cm의 비밀스러운 은신처였다.

벽 바깥 부분은 온통 기독교와 관련된 그라피티로 덮여 있었다. 기독교의 영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을 담은 그라피티였다. 예수는 물론 성모 마리아와 성 베드로의 이름이 분명히 새겨졌고 그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벽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즉각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카스 추기경이 독단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바람에 고고학자들이 반발해 추기경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일까지 벌어졌다. 카스 추기경은 발굴단장인 만큼 모든 발굴 작업을 직접 통제하려 했고, 고고학자들은 발굴단장은 행정업무만 처리하고 발굴현장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반발했다.

카스 추기경은 하루일과를 마친 뒤 매일 늦은 저녁 지오반니 세고니라는 인부 한 명만 데리고 발굴현장으로 내려가 상황을 살펴보곤 했다. 어느 날 카스 추기경은 미모리아 페트리의 벽감에서 흙이 묻은 뼛조각과 마른 회반죽 조각, 섬유 조각 등을 발견했다.

이럴 경우 다음날 고고학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발견 내용을 알려서 기록, 사진 촬영을 맡겨야 했지만 고고학적 경험이 전혀 없었던 카스 추기경은 세고니에게 “뼛조각 등을 모아 나무상자에 넣어 위로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와 세고니 말고는 아무도 그 나무상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며칠 뒤 미모리아 페트리에 돌아간 고고학자들은 벽감에서 발굴 작업을 이어갔다.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카스 추기경과 세고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벽감에서 발견한 뼛조각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고고학자들은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조사했지만 벽감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에 쌓인 뼈 수백 개를 수습해 상자 3개에 나눠 담았다. 처음에는 “의학적으로 볼 때 성 베드로처럼 건장한 체구의 노인의 뼈”라는 추정이 나왔다.

발굴단의 소견을 들은 교황청은 환호했다. 그들은 ‘드디어 성 베드로의 무덤도 발견하고 성 베드로의 유해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때 교황청에서 좀 더 신중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뼈가 성 베드로의 것이라는 걸 발표하기 전에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는 신체적 기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뼈에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뼈는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에 내버려진 것처럼 쌓인 모습으로 발견됐다. 객관적 시각으로 볼 때 누군가 무덤을 파헤쳐 바닥에 버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뼈가 성 베드로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게 신중파의 주장이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팔레르모대학교 인류학과 학장이던 베네란도 코렌티 교수에게 뼈를 조사해 보게 했다. 일부의 우려대로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뼈의 주인은 1명이 아니라 3명이었으며, 동물 뼈도 섞인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코렌티 교수가 3명의 뼈를 나눈 다음 더 정밀하게 조사해 보니 한 명은 여성이고 두 명은 남성이었다. 두 남성 중 한 명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50대, 다른 한 명은 건장한 체격의 70대 이상으로 조사됐다.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나이, 육체적 특징과 일치하지 않았다.

코렌티 교수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교황청에 내용을 미리 알렸는데, 교황청은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유해를 ‘성 베드로일 수 있다’가 아니라 ‘성 베드로가 아닐 수 있다’라고 보는 게 옳기 때문이었다.

실망한 발굴단은 발굴 보고서에서 ‘벽감의 은신처는 콘스탄티누스가 대성당을 만들 때 조성한 것이다. 성 베드로의 뼈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성 베드로의 뼈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고서의 추론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추론’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스 추기경이 빼돌린 나무상자를 빼놓고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다 보니 엉뚱한 추론이 나오고 말았다. 그들은 성 베드로의 유해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중세에 은신처가 열렸고 누군가 유해를 가져갔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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