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오바디스

by leo


루드비히 카스 추기경이 벽감에서 발견해 나무상자에 담은 유해가 세상의 관심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였다. 인류학자이자 금석문 전문가인 로마대학교의 마르게리타 과르두치 교수였다. 50대 초반 여성이었던 과르두치는 1953년 평소 잘 알던 교황청 관계자의 도움 덕분에 교황청의 공식허가를 얻어 발굴현장을 둘러보게 됐다. 발굴 작업을 책임졌던 카스 추기경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과르두치는 처음에는 수년간 지하 공동묘지와 미모리아 페트리 벽에서 발견한 각종 글자를 분석했다. 그곳에서 ‘호민부스 크레스티아누스 아드 코르푸스 투움 세풀티스(기독교인이 당신 근처에 묻혔다)’는 문구는 물론 ‘인 혹 빈체(이것으로 승리하리라)’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 ‘인 혹 빈체’는 고대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2년 막센티우스와 패권을 건 결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다 하늘에서 키로(☧)와 함께 봤다는 신비한 문구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지만 과르두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작업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는데 분명하게 성 베드로와 관련된 내용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적이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1960년 어느 날 현장에 내려갔다. 그때 하필이면 세고니가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과르두치는 세고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벽감에서 뼈와 함께 흙, 빨간 회반죽 조각, 품질이 좋은 섬유 조각을 발견해 넣어둔 나무상자가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세고니의 도움을 받아 지하 공동묘지 한쪽 구석에 보관된 나무상자를 보러 갔다. 나무상자에는 그의 말대로 뼈 등은 물론 거기에 든 유해가 성베드로대성당 지하의 벽감에서 발굴한 것이라는 내용을 적은 쪽지도 들어 있었다.

과르두치가 교황청과 미리 상의하지 않고 뼈가 든 상자를 독단적으로 연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1963년 새 교황이 된 바오로 6세(재임 1963~1978년)를 만나 새로 발견한 뼈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다행히 바오로 6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과르두치 집안과 친하게 교류했고 과르두치와도 잘 알던 사이여서 만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과르두치가 교황청에서 바오로 6세를 만난 것은 교황이 임기를 시작한 첫날인 1963년 6월 21일이었다. 그녀가 연구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자 교황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유해에 묻은 흙과 섬유의 화학적 성분 분석을 위해 추가연구가 필요하니 허가해 달라고 했다.

단순히 축하 인사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허가해 주었다. 만약 탁월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축하 선물은 있을 수 없었다.

과르두치는 유해에 묻은 흙과 섬유를 로마대학교 연구실로 가져가 1964년 봄, 여름에 걸쳐 화학적 성분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섬유 조각은 뿔고동에서 추출한 보라색으로 염색됐고, 섬유 조각에 수놓인 실은 순금이며, 섬유 조각에 묻은 흙은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의 흙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흙의 존재를 ‘뼈가 토장묘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성 베드로는 순교 이후 화장되지 않고 땅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르두치는 교황청에 이 사실을 보고한 뒤 코렌티 교수에게 유해 감식을 맡겼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더 놀라웠다. 카스 추기경의 발굴단이 수습했던 3명의 뼈와 달리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육체적 특징과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한 명의 뼈다. 성별은 남자다. 몸이 건장하고 꽤 나이가 들었다. 60~70세 사이다. 흙으로 덮였다.’

과르두치는 중세에 동쪽에서 벽감이 열렸다는 1940년대 발굴단의 추론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로마의 벽 건설 전문가를 불러 벽감의 내부를 상세히 살펴봤더니 콘스탄티누스 시절부터 시작해서 발굴 작업이 이뤄진 1940년대까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는 게 밝혀졌다. 1940년대에 실시한 발굴 작업이 1600년 만의 첫 개봉이었던 셈이다.

과르두치는 교황을 다시 만나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라테라노대성당에 모셔진 이른바 ‘성 베드로의 머리’에서 일부를 뜯어내 나무상자 안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8세기 무렵 시칠리아를 점령한 사라센이 로마 성벽 밖에 있던 성베드로대성당과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을 약탈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교황청은 두 성인의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만 떼어내 성벽 안의 라테라노대성당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두 머리는 라테라노대성당 대제단 위에 설치된 시보리움(발다키노)에 보관됐다.

바오로 6세는 뜻밖의 요청을 받고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유해를 교황청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니 교황청 담당 추기경의 감독을 받아 교황청에서 분석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라테라노대성당의 ‘성 베드로의 머리’는 바티칸 실험실로 옮겨졌고 코렌티 교수가 그곳에 가서 분석 실험을 진행했다. 아쉽게도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발견된 유해와 라테라노대성당의 두개골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같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성 베드로가 아니라는 것이며, 최악의 경우 둘 다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두 개가 일치했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라테라노대성당에 수백 년 이상 보관된 두개골과 직선거리로 5km 떨어진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무덤에서 발굴된 뼈의 유전자가 일치하다니! 기독교 기록과 전설로 전해진 ‘사라센 침략을 피하기 위해 두개골을 잘라 따로 보관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가 아닌가!

과르두치의 연구 결과를 담은 보고서는 1965년 초 교황청 출판사에서 발간됐다.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교황청 출판사에서 책을 찍었다는 것은 사실상 교황청이 보고서 내용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책의 요점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발굴 때까지 한 번도 훼손된 적이 없다. 이곳에서 뼛조각 등이 발굴돼 나무상자에 담겨 1953년까지 지하무덤 인근에 훼손 없이 보관됐다. 뼛조각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옮겨진 성 베드로의 유해로 확인됐다. 뼛조각은 황금실로 짠 보라색 옷감으로 싸였는데 뼛조각의 주인이 최고위급 인사라는 걸 입증한다. 뼛조각을 분석한 결과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육체적 특징과 완전히 일치한다. 60~70대의 건장한 남성이다. 섬유에 묻은 흙은 시신이 화장된 게 아니라 매장됐다는 걸 입증한다.’

책이 나오자 세계 곳곳의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에게서 반발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과르구치의 책은 구체적 근거가 부족한 허점투성이이며, 오직 그녀의 추정만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인, 유대인이 한둘이 아니었고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공동묘지에서 유해가 1000구 이상 나왔는데 그 유해를 모두 조사하면 ‘건장한 남자 60~70대’가 한두 명이겠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옷이 고급스럽다고 해서 성 베드로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박도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나무상자에 담겼다는 뼈와 흙, 섬유의 신뢰성이었다. 1940년대 발굴단 보고서에는 없던 내용인데 과르두치가 기적처럼 발견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유해가 오염됐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자료를 인용한 반박도 있었다. 교황청이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건설하기 전인 16세기에 발간한 『폰티피칼레 로마눔(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의 원래 묘지에 덧붙인 관의 장식이 묘사됐다.

‘석관은 구리로 덮였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였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혔다.’

이 책을 인용한 반박의 핵심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 한 번도 훼손되지 않았다면 이 관과 황금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찬반 논쟁은 1968년까지 이어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오랜 고민과 검토 끝에 그해 6월 26일 공식적으로 “성 베드로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유해는 교황의 발표가 나온 다음날 투명아크릴수지 상자에 담겨 원래 자리인 벽감 은신처로 돌아갔다. 유해를 돌려보내는 행사에는 교황과 여러 추기경 외에 과르두치 교수와 코렌티 교수도 참석했다. 요한 바오로 6세가 ‘성 베드로의 것으로 믿어지는 뼈’라고 쓴 두루마리가 상자 안에 함께 담겼다. ‘성 베드로의 뼈’가 아니라 ‘믿어지는 뼈’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벽감에 ‘은거하던’ 뼈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13년 11월 24일이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 처음 뼈 6개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었다.

기술이 50년 전보다 더 발달한 지금이라도 두 뼈의 유전자를 다시 검사해볼 수도 있겠지만 교황청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혹시 더 당혹스러운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황청에서 이미 몰래 검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과르두치가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무덤에서 발굴한 뼈를 조사하기 시작한 1953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놀랍고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의 동굴에서 1세기 것으로 보이는 납골 항아리 수백 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현장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물질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항아리에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중 ‘시몬 바 요나’라는 글이 적힌 항아리가 모두를 흥분시켰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는데, 바로 성 베드로의 옛 이름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이 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하자 천주교 계열 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항아리에 세파, 또는 베드로라는 분명한 글자가 없다’는 게 그들이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만약 항아리 유해의 주인이 정말 성 베드로라면 어떻게 될까? 성베드로대성당 지하에 묻혔다는 성 베드로의 무덤과 유해는 무엇인가? 성베드로대성당을 포함해 기독교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 하는 것일까?

질문을 더 던져보자. 1940년대 발굴단이 성베드로대성당 지하 무덤에서 발굴했다는 뼈는 과연 누구일까? 과르두치의 연구는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예루살렘의 항아리는 사실이 아닌 것일까?

어느 게 사실이고 진실인지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연구가 가려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실인지 아닌지를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는 2000년 전 로마에서 피신하다 아피아 가도에서 만난 예수에게 “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성베드로대성당에서 기도 중인 성 베드로를 우연히 만난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쿠오바디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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