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처음 로마에 여행하러 갔을 때 구한 숙소는 지하철 A라인 키프로역 근처 호텔이었다. 다음날 아침식사에 앞서 혼자 호텔 주변을 산책했는데 갑자기 눈앞에 상당히 높은 성벽이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로마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 성벽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로마 여행 첫날이어서 성베드로대성당과 바티칸박물관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당일치기 가이드투어에 참여했다. 안내인은 방문객이 붐비기 전에 바티칸박물관부터 먼저 가는 게 효율적이라면서 대성당 콜로네이드 앞에 모인 가이드투어 참가자들을 박물관 쪽으로 데리고 갔다.
성베드로대성당에서 바티칸박물관으로 가려면 두 개의 아치 같은 성문을 지나야 한다. 성문을 나가면 비아 디 포르타 안젤리카 거리가 나오고, 거리 오른쪽에 붙은 기다란 3층 건물이 보인다. 겉모습만으로는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사실 건립한 지 수백 년을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숨겨진 보물이다. 지금은 스위스근위대 숙소인 바티칸 엔트리 포르타 산타나다. 교황청 출입문과 성안나성당을 지나면 담벼락이 이어지고 담벼락 끝부분에 다시 3층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바티칸시국 치안을 담당하는 바티칸경찰대 본부다.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국방을 이탈리아에 의존하기 때문에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자체 경찰과 스위스근위대, 소방대만 유지한다. 스위스근위대는 바티칸시국 내에서 교황 경호를 맡고, 1816년 창단돼 총인원이 130명인 경찰은 치안, 질서 유지, 국경 통제, 교통 통제, 범죄 수사를 담당한다. 교황이 바티칸시국을 벗어나 시찰할 경우 경호 업무도 담당한다.
경찰은 있지만 바티칸에는 교도소가 없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할 경우 이탈리아가 교도소 시설을 빌려준다. 범죄자 수감에 드는 비용은 바티칸에서 부담한다. 바티칸은 인구도 적고 대부분 사람이 성직자여서 범죄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연간 1000건 안팎의 범죄가 발생한다. 대부분 범죄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소매치기 등이지만 가끔 살인, 횡령 사건도 일어난다.
안내인을 따라 비아 디 포르타 안젤리카 거리를 걸어가다 피아자 델 리소르지멘토, 즉 리소르지멘토광장에서 왼쪽으로 꺾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혼자 산책할 때 봤던 그 성벽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안내인을 따라 5분 정도 더 걸어가자 ‘바티칸박물관’이라는 글이 새겨진 출입문이 나타났다. 그제야 나는 아침에 봤던 성벽이 바로 바티칸시국을 에워싼 성벽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대부분 여행객은 성베드로광장과 성베드로대성당을 둘러본 뒤 바티칸박물관만 관람하고 돌아가기 때문에 바티칸시국이 완벽하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 이곳을 성벽으로 에워싼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성벽 건립 및 확충 역사는 교황청, 바티칸궁전, 바티칸시국 발전의 역사이기 때문에 기왕에 성베드로대성당과 바티칸박물관을 여행한다면 미리 알아놓는 게 좋다.
바티칸시국을 보호하는 성벽의 총길이는 5km에 이르며 명칭은 ‘레오 성벽’이다. 이곳을 처음 만든 9세기 교황 레오 4세(재임 847~855년)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로도 성벽 공사에 참여했는데, 리소르지멘토광장에서 바티칸박물관 입구까지의 성벽 구간이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이다.
레오 성벽을 따라 바티칸시국을 한 바퀴 돌아볼 수도 있다. 바티칸박물관 출입구에서 시작되는 비알레 바티카노 거리를 따라 30분 정도만 걸으면 반대쪽인 성베드로광장 콜로네이드 남쪽에 도착한다. 바티칸시국을 한 바퀴 둘러보는 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정말 이 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국가’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니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여행 코스다.
바티칸시국과 성베드로대성당이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된 것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말하는 외적에는 이슬람 같은 이교도뿐 아니라 같은 기독교인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레오 성벽은 교황 레오 4세 혼자서 다 만든 것은 아니었다.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교황이 정치적, 안보적 필요에 따라 조금씩 건설하면서 확충한 결과가 오늘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성베드로대성당만 에워쌌지만 나중에 교황이 바티칸궁전으로 옮긴 뒤에는 궁전도 포함하는 식으로 확장된 것이었다.
레오 성벽이 최초로 건설된 것은 이슬람 해적 때문이었다. 대성당은 830년과 846년 두 차례에 걸쳐 시칠리아에 자리를 잡았던 사라센 해적의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교황청과 교황의 처소였던 라테라노대성당과 라테라노궁전은 3세기에 고대 로마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만든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쪽에 있어 사라센 해적 침략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성베드로대성당은 성벽 바깥에 위치해 피해를 면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성 베드로의 유해를 훔쳐가려던 사라센 해적이 무덤을 찾지 못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점이었다.
레오 4세는 사라센 해적이 언제든 수시로 쳐들어올 것이고 언젠가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내 유해를 훔쳐갈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성베드로대성당과 성 베드로의 무덤을 보호할 수 있는 성벽을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성밖의성바오로대성당도 성베드로대성당처럼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있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교황은 그곳에는 성벽을 건설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성 베드로에게 집중됐던 것이다.
레오 4세는 처음에는 교황청의 재정난 때문에 공사비를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로타르 1세가 자금을 지원해주겠다고 나선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교황은 848년에 시작한 공사를 서둘러 진행해 불과 4년 만인 852년에 마무리했다. 첫 성벽의 총 둘레 길이는 3㎞에 높이는 12m였고, 곳곳에 모두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바티칸시국은 존재하지 않았고 바티칸궁전도 건물 한 채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성벽은 성베드로대성당을 보호하는 데에 집중해서 건설됐다. 그런데도 길이가 3km나 됐던 것은 성벽이 성베드로대성당만 동그랗게 에워싸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벽은 대성당에서 600m 떨어진 산탄젤로에서 출발해 대성당을 한 바퀴 돈 뒤 비아 트리온팔레를 따라 다시 산탄젤로 앞의 테베레강까지 연결됐다. 이때만 해도 산탄젤로는 바로 앞의 폰스 아일루스, 즉 하드리아누스 다리를 통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이어져 로마를 지키는 감시탑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성당 성벽을 산탄젤로와 연결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도 이어질 수 있었다.
레오 4세는 새로 만든 성벽을 레오 성벽으로, 그 안의 공간을 ‘레오의 도시’라고 부르기로 했다. 성베드로대성당과 성 베드로의 무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돼 감격한 교황은 성벽 완공 축하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했다. 축하행사는 852년 7월 27일에 열렸는데, 교황은 모든 성직자와 함께 맨발로 성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성문이 나타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며 신의 보호를 간청했다. 교황이 기도를 드리는 사이 주교 7명이 주변에 서서 성벽과 성문에 성수를 뿌렸다.
레오 성벽이 본격적으로 확충된 것은 14세기에 아비뇽 유수(1309∼1377년)를 종식시키고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임 1370~1378년)가 로마로 돌아온 이후부터였다. 그는 화재와 지진으로 폐허가 된 라테라노대성당과 라테라노궁전을 떠나 성베드로대성당 옆의 바티칸궁전으로 교황 처소를 옮겼다.
그의 후임인 우르바노 6세(재임 1378~1389년)와 이후 교황들이 애쓴 덕분에 바티칸궁전은 조금씩 나아져 교황 거주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됐다. 현재의 바티칸궁전은 특정 교황이 종합적 계획을 갖고 단번에 만든 곳이 아니었다. 역대 교황이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신축하고 보수한 결과 오늘날 수십 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레고리오 11세 이후 모든 교황은 라테라노궁전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티칸 궁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5세기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는 바티칸궁전을 아예 공식 교황 사무실로 선언했다.
교황청 건물이 늘어나고 부지가 확충되자 기존의 레오 3세 성벽만으로는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런 와중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임 1492~1503년) 시절이던 1499년 샤를 3세가 이끈 프랑스군 2만 5000명이, 이어 클레멘스 7세(재임 1523~1534년) 시절이던 1527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황제가 보낸 3만 5000명의 대군이 로마를 침탈해 교황이 성벽에 만들어진 비밀통로인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로 달아나는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인으로 이뤄진 군대가 기독교 성지를 약탈하는 비극이 발생한 것이었다.
레오 성벽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었던 데다 교황청을 지키는 군대 규모는 수천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만 대군의 침략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에 쳐들어갔을 때에는 스위스근위대 병사 189명이 성베드로대성당 계단에서 교황을 지키기 위해 황제군대에 맞서 싸웠는데, 살아남은 병사는 42명에 불과했다.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은 바오로 3세(재임 1534~1549년)는 성벽의 허점 때문에 프랑스군과 황제군대가 로마를 손쉽게 침탈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성벽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나섰다. 적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직립형이었던 성벽을 약간 기울어진 형태로 바꾸었고, 성벽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응회암 대신 담수석회함인 트래버틴과 벽돌을 재료로 사용했다. 교황청 군대의 장점인 대포를 활용하기 위해 대포 설치용 보루를 곳곳에 만들고, 적군이 접근하기 어렵게 성벽 주변에는 해자를 파고 제방을 쌓았다. 이처럼 성벽을 전쟁용으로 보강하는 공사를 할 때 자문을 해준 사람은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바오로 3세로부터 10년 뒤에 교황이 된 비오 3세(재임 1559~1565년)는 더 넓고 더 획기적인 성벽 공사를 실시했다. 그는 바오로 3세가 리소르지멘토광장까지 늘린 성벽을 더 확충해 바티칸시국을 완전히 에워싼 형태의 성벽을 만들어냈다. 그가 늘린 성벽은 오늘날 레오 성벽의 모습 그대로였다.
레오 성벽을 한 바퀴 돌아보는 출발점은 리소르지멘토광장일 수도 있고 바티칸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온 출입문 앞일 수도 있다. 이곳에서 비알레 바티카노 거리를 따라 걸으면 흥미로운 여행이 시작된다. 비알레 바티카노 거리 일대는 대부분 주택가여서 조용하고 한적한 편이다. 최근 들어 주택을 개량한 소규모 호텔이 많이 생긴 데다 지역주민이 애용하는 식당, 카페도 많아 바쁘지 않게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다.
비알레 바티카노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성베드로광장의 콜로네이드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광장을 가로질러 바티칸박물관으로 갈 때 지나갔던 성문 앞으로 이동한다. 잘 살펴보면 성문이 세워진 성벽은 왼쪽으로는 교황 처소인 사도궁전과 연결돼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반대쪽으로는 길게 성벽이 이어진다.
이 성벽이 바로 1499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1527년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군과 황제군대의 로마 침탈을 피해 산탄젤로로 달아날 때 사용했던 비밀통로인 파세토다. 영화 ‘천사와 악마’ 후반부에서 주인공 톰 행크스가 범인을 추격할 때 지나갔던 통로가 이곳이었다. 처음에는 레오 성벽의 일부였지만 니콜라오 3세(재임 1277~1280년)가 성벽 위에 파세토를 추가한 것이었다.
클레멘스 7세가 파세토를 통해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파세토의 문은 굳게 닫혀 버렸다. 아무도 파세토를 재건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상태는 매우 나빠지게 됐다. 파세토가 다시 깔끔해진 것은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재임 1978~2005년)가 새 천년 시작을 축하하면서 보수하라고 지시한 덕분이었다.
파세토는 평소에는 문을 닫고 대중 접근을 막는다. 여름철 일정기간에만 소수의 그룹 투어 신청자에게 부분적으로 관람을 허용한다. 평소에는 스위스근위대가 열쇠를 보관한다. 만일의 경우가 다시 발생해 교황이 또 대피해야 할 경우 스위스근위대가 문을 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스위스근위대 숙소 앞에서 출발한 파세토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피아자 피아, 즉 피아 광장을 건너 작은 숲을 지난 뒤 산마르코탑을 통해 산탄젤로로 들어간다.
500년 전 클레멘스 7세가 로마 시민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며 달아날 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물론 대성당 계단에서 황제군 병사들에 맞서 싸우는 스위스근위대의 절망적인 함성도 들려왔다. 달아나던 교황은 파세토 창 틈새로 불타오르는 로마의 잔혹한 풍경을 보면서 끊임없이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너진 교황의 위상이었을까, 아니면 로마 시민의 고통이었을까?
한마디 더. 산탄젤로 꼭대기에는 조각상이 하나 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가 천사장 미카엘을 만난 기적’이라는 전설을 담아 만든 ‘칼을 든 미카엘’ 조각상이다. 미카엘의 칼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인간을 벌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성 미카엘은 하느님의 성전을 지키던 교황이 ‘배교자’의 무리에 밀려 산탄젤로로 도망쳐오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