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대성당에 들어가려고 많은 사람이 이미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선다. 줄은 대성당 앞의 계단을 지나 콜로네이드 아래까지 둥글게 이어진다. 성베드로광장에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는 탓에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을, 콜로네이드가 뻥 뚫린 탓에 겨울에는 찬바람을 견디면서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줄이 길게 서는 것은 특정일만 그런 게 아니다. 성베드로대성당은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1년 내내 붐빈다. 대성당은 계절에 따라 오전 7시부터 오후 6~7시까지 문을 여는데, 하루 평균 방문객은 4만~5만 명, 연평균 방문객은 10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사람마다 성베드로대성당을 방문하는 이유는 다르지만 대부분은 르네상스 최고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찾아간다. 대성당은 르네상스가 기독교와 손을 잡고 인류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이다.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브라만테, 마데르노 같은 거장들이 설계하고 건축하고 조각한 최고의 건축물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데, 이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대성당을 일생에 한 번이라도 안 보고 가면 얼마나 아쉬울까?
물론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독교의 성지를 순례하는 감격을 누리려는 교인도 적지 않다. 이곳은 기독교를 서유럽에 전파해 세계 종교로 격상시킨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이어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일생에 한 번은 둘러봐야 하는 성소다.
긴 줄 사이에 끼어 성베드로대성당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도중에 ‘교회 자유의 수호신’이라는 별칭을 가진 스위스근위병이 지키는 청동문이 보인다. 교황이 거처하는 바티칸궁전, 즉 사도궁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출입문 중 하나인 ‘포르토네 디 브론조’다.
성베드로대성당 입장을 기다리는 여행객의 눈에는 고색창연한 청동문보다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스위스근위병의 유니폼이 더 선명하게 들어온다. 바티칸의 스위스근위병은 대성당 신축을 시작한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513년)가 취임 세 번째 해인 1506년 1월에 만들어 올해로 창립한 지 500년을 넘는다. 대성당 착공식은 같은 해 4월에 열렸으니 그들과 대성당은 같은 해에 태어나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제’인 셈이다.
성베드로대성당 정면 위쪽 페디먼트에는 조각상 13개가 나란히 서서 대성당 입장을 기다리는 여행객을 환영한다. 한가운데에는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가, 양옆에는 12사도 중 성 베드로를 제외한 11명과 세례자 요한이 섰다. 예수가 가장 아꼈다는 성 베드로는 페디먼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성 베드로는 대성당의 주인공이자 주인이다. 그런 사람이 손님을 맞을 때 건물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은 올바른 예의가 아니다. 그는 주인답게 건물 꼭대기에서 내려와 왼손에 열쇠를 든 채 대성당 입구 왼쪽에 서서 여행객을 반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성베드로대성당에 들어가려는 손님들은 모두 오른쪽에 줄을 서는데 성 베드로 조각상은 왜 왼쪽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모인 많은 여행객이 한참이나 줄을 선 끝에 대성당 계단을 올라갈 때 그들에게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은 성 베드로 조각상이 아니라 긴 칼을 든 성 바오로 조각상이다. 기독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성 바오로가 성 베드로인 것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성베드로대성당의 실제 주인은 성 베드로이지만 엉뚱하게도 성 바오로가 주인 행세를 하는 셈이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줄이 왼쪽으로 선다면 성 베드로 조각상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될 테인데, 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른쪽으로 선다.
성베드로대성당은 바티칸의 핵심 성소일 뿐만 아니라, 대성당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바티칸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바티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 베드로와 그의 순교가 없었고 그가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면 대성당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성 베드로가 대성당일 뿐 아니라 바티칸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성 베드로는 1세기 중엽 고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에 발생한 기독교인 박해 때 바티카누스의 네로전차경기장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그의 죽음을 다룬 당대의 기록은 하나도 없다. 기독교인 박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여러 사람이 관련된 글을 남겼지만 성 베드로라는 이름을 적은 글은 전무하다.
성 베드로의 죽음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수십 년 뒤 제4대 교황이었던 클레멘스(재임 88~97년)가 늘 다투기만 하던 그리스 코린트의 교회를 화해시키기 위해 보낸 편지였다. 거기에는 ‘베드로는 부당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많은 고역을 겪어야 했다. 결국 나중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장소를 향해 떠났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성 베드로가 순교하고 100년 이상이 지난 2~3세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작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전갈 우화』란 책에 드디어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는 네로가 기독교인을 처형할 때 순교했다. 기독교인 처형은 네로전차경기장 근처 황제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도 순교 당시의 기록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테르툴리아누스와 비슷한 2~3세기 기독교 학자 오리겐 아다만티우스가 남긴 책에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라는 내용으로 처음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베드로 행록』에도 ‘베드로는 사형집행인에게 머리를 거꾸로 해서 십자가에 매달아달라고 부탁했다’라고 적혔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4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기독교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팜필은 아다만티우스의 기록을 베껴 똑같은 글을 남겼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정리’됐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는 물론 테르툴리아누스, 아다만티우스가 쓴 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학자들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
먼저 클레멘스의 기록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사망 연도, 일시, 장소, 이유가 없다. 성 베드로가 언제 죽었는지, 로마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순교했는지 여부도 명확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책을 쓴 것은 기독교 박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무려 150년 이후였다. 당연히 그가 직접 봤거나 확인한 것은 아니었고, 남에게서 들었거나 다른 책에서 본 걸 베껴 쓴 데 불과했다. 아다만티우스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어느 책에서 봤는지, 어떻게 해서 알게 됐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두 학자의 글에는 객관적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성 베드로가 정말 로마에 갔는지, 로마에서 순교했는지, 로마에 묻혔는지를 입증할 당대의 문서나 고고학적 자료를 찾아내 실증하려고 노력했다. 독일 문헌학자 오토 즈비어레인이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09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 베드로를 다뤘을 법한 문헌을 조사했다. 하지만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거나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문서 기록, 고고학적 자료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성 베드로가 기독교 주장대로 로마에 가서 여러 신도를 만나 활동했다면 왜 당대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그는 평민뿐 아니라 귀족과도 교류했다고 하는데, 신도가 된 여러 귀족 중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선교, 순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한 가지 더. 기독교는 ‘성 베드로가 예수와 똑같은 죽음을 당할 자격이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일부러 고통을 자초했다’면서 이것이 매우 희귀한 일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고대 로마 시대에 ‘거꾸로 십자가형’은 드물지 않았다.
기독교를 탄압한 네로 황제 시대의 정치인 세네카가 쓴 글 중에 ‘십자가를 봤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형태였다. 일부는 머리를 땅 쪽으로 거꾸로 한 채 매달려 못 박혔다. 일부는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못 박혔고 다른 일부는 ‘은밀한 부위’에 못 박혔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기독교인 외에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기독교는 ‘성 베드로가 바티카누스 네로전차경기장의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고, 비밀리에 매장됐다’고 믿었다.
성 베드로가 묻힌 곳은 그가 순교한 전차경기장 바로 옆 비아 코르넬리아, 즉 비아 트리온팔레 주변의 지하 공동묘지 네크로폴리스였다. 기독교인들은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야 하는 그곳에 그의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넣은 석관을 안치했다.
전차경기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사람을 굳이 근처에 묻은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기독교인에게는 망인이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는 게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베드로는 순교 장소인 전차경기장 옆을 지나던 도로 주변에 묻힌 것이다. 또 당시에 로마인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기독교인은 그들과는 달리 시신을 화장하지 않고 매장했다.
전차경기장 바로 옆의 도로에 시신을 묻으면 의심을 사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비아 트리온팔레 주변은 공동묘지여서 무덤이 즐비했다. 기독교인만의 공동묘지가 아니라 원래 평범한 로마인도 묻던 곳이었다. 그곳에 성 베드로를 포함해 순교한 여러 기독교인을 묻더라도 어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아 트리온팔레뿐 아니라 로마에서 외곽으로 이어지는 비아 아피아, 비아 플라미니아 같은 모든 도로도 사정은 다 비슷했다.
게다가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세상을 떠나면 무덤을 갖게 해 주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로마인은 ‘적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무덤도 만들어주어야 망자가 저승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저승에 못 가서 유령으로 떠돌아다니는 낭패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신이 테베레강에 내던져졌던 네로처럼 최악의 ‘악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죽은 뒤 무덤을 가질 수 있었다.
기독교인은 지하 공동묘지 성 베드로 무덤의 지상 부분에 붉은 바위를 하나 놓아 그의 무덤이라는 걸 표시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하기 때문에 바위는 그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부터 시작해 역대 교황의 일대기를 담은 『교황들의 책』에 따르면 교황 아나클레토(재임 79~91년)는 나중에 지하 무덤 바로 위에 작은 예배당을 지었다. 이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순례자들이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모여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기독교인들로부터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363년에 쓴 저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예배의 장소가 됐다. 물론 비밀리였지만.’
성 베드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무덤에 잘 모셔졌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또 다른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로마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남의 무덤을 손상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남의 무덤에서 몰래 유해를 옮기는 것은 더 심각한 범죄였다. 이 경우에는 범죄자를 사형시키거나 로마에서 영구 추방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고대 로마가 평화로웠던 오현제 시대가 지나고 온 세상이 어지러웠던 군인황제 시대에 상황은 돌변했다. 군인 출신으로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3세기 중엽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인은 제외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제국에 협조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으며, 불손한 기독교인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성 베드로의 유해가 훼손될지 모른다고 걱정한 일부 기독교 성직자는 비밀리에 성 베드로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 깊숙한 곳에 숨겼다.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인은 유해가 원래 묘지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성베드로대성당으로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오벨리스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이집트의 바늘’도 처형당하기 위해 전차경기장에 끌려온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는 가여운 처지다. 로마를 빛내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니라, 이집트의 신전 앞에서 태양신 라를 숭배하는 많은 신도의 추앙을 받다 2000년 전 강제로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다.
오벨리스크는 낯선 이국의 언덕에서 2000년 동안 수많은 역사를 경험하고 목격했다. 초보운전자처럼 비틀거리며 전차를 모는 칼리굴라는 물론 하프 연주에 맞춰 서툴게 노래를 부르는 네로의 모습도 지켜봤을 것이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동물에게 잡아 먹혀 죽어가는 기독교인들의 눈물도 보고 비명도 들었을 것이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성 베드로의 눈도 보았을 것이다.
오벨리스크는 그의 눈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목격했다는 성 베드로의 최후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성 베드로의 순교와 그 이후 2000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알아보려면 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지만, 그는 그날부터 입을 꼭 다문 이후 절대 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