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베드로광장을 에워싼 콜로네이드 이곳저곳에서 많은 관광객이 나오거나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계단이나 난간에 앉아 쉬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광장 정중앙에는 거대한 바늘 같은 오벨리스크가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높이 25m인 오벨리스크 양쪽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두 거장 마데르노, 베르니니가 각각 만든 분수 두 개가 나란히 물을 뿜어낸다.
여행이 목적이든 순례가 목적이든 성베드로광장 안팎을 오가는 여행객 대부분은 오벨리스크에는 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단순히 기념사진을 찍는 배경으로만 이용할 뿐이다. 이 구조물에 어떤 역사적, 종교적 의미가 담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벨리스크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 깨닫게 된다.
일단 이름부터 알고 보자. 성베드로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오벨리스크의 이름은 ‘바티카노’다. 고대 로마 3대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세웠다고 해서 ‘칼리굴라의 오벨리스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티카노는 원래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서 있었다. 칼리굴라가 도시 외곽인 바티카누스 평원에 건설한 개인용 전차경기장을 장식하려고 서기 40년에 초대형 선박을 만들어 옮겨온 것이었다. 그는 오벨리스크를 전차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는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걸 따라한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어지간한 신전 앞에는 오벨리스크가 늘 두 개씩 서 있었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들었던 태양신 라를 상징한 종교적 구조물이었다. 가느다란 일직선 형태여서 하늘에서 신이 내려 보내는 태양의 빛을 상징하기도 했다. 신이 이 빛을 통해 지상의 인간과 소통한다는 것이었다. 이집트인은 테케누라고 불렀지만 나중에 그리스인이 ‘창’이라는 뜻인 오벨리스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나라 옛 불교 사찰 입구에는 높이가 5m 안팎인 당간지주라는 게 있었는데, 불교를 표시하는 깃발을 단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도입된 당간지주는 인근에 절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당간지주는 한국의 오벨리스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형태와 용도가 비슷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는 다신교 국가여서 외국의 종교라도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으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칼리굴라가 태양신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전차경기장에 세웠더라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신교인 기독교의 사정은 달랐다. 다른 종교를 절대적으로 배타시했고 이교도의 종교적 상징물을 우상이라고 생각해 보는 족족 파괴했다. 고대 로마에 많았던 신과 황제의 조각상이 거의 대부분 부서진 것은 그런 태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왜 성베드로대성당 앞의 광장 한가운데에 이교도의 상징 중에서도 최고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중세 기독교가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이유였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를 파괴하기는커녕 성스러운 건축물로 숭배했던 것이었다. 오벨리스크가 오늘날 성베드로대성당을 바라보는 광장의 정면에 서 있게 된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실제로 오벨리스크는 근세까지만 해도 성 베드로의 순교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많은 기독교인의 숭배를 받았다. 그런 사실을 담은 기록도 있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는 1436~1443년 7년 동안 유럽을 두루 여행한 다음에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직접 본 오벨리스크를 상세히 묘사한 글을 남겼다. 참고로 그가 글을 썼을 때 성베드로대성당은 현재의 대성당이 아니라 이른바 ‘옛 성베드로대성당’이었다. 오벨리스크도 성베드로광장 한가운데가 아니라 바깥쪽에 있었다.
‘성베드로대성당 인근에는 석재로 만든 높은 탑이 하나 있다. 구리로 만든 세 다리로 버티고 선 게 삼각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많은 사람은 탑을 아주 성스럽게 여긴다. 탑을 지날 때에는 마치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의 순교를 목격한 성스러운 건축물이라고 생각했을까? 돌이켜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은 칼리굴라가 건설한 전차경기장 안이었다. 그가 순교할 때 경기장 한복판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성 베드로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던 사람은 다 죽었고, 시설은 모두 파괴돼 없어졌다. 중세 기독교는 성 베드로의 순교를 상징할 만한 기념물을 찾고 싶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우뚝 선 오벨리스크였다. 그들은 오벨리스크를 최후의 목격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의 생각은 이러한 것이었다.
‘전차경기장 한가운데에 선 오벨리스크는 밧줄에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온 성 베드로의 모습은 물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 간 그의 얼굴도 지켜보았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에 시달리던 성 베드로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오벨리스크였는지 모른다.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가리키던 곳이 천국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숨진 곳 인근에 몰래 묻히는 모습은 물론 매일 밤 기독교인이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도 목격했을 것이다.’
기독교가 ‘순교의 목격자’로 숭배하기 시작할 무렵만 해도 오벨리스크는 현재 위치에 있지 않았다. 콜로네이드로 둘러싸인 현재 성베드로광장의 바깥에 서 있었다.
오벨리스크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콜로네이드 밖으로 나가면 ‘우피치오 스카비’라는 곳이 나온다. 번역하면 ‘발굴 사무소’다. 사무소 앞에 작은 광장이 있는데 이름은 ‘초기순교자광장’이다. 이곳이 바로 네로 시대에 성 베드로는 물론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오벨리스크가 원래 섰던 장소도 여기였다.
성베드로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의 왼쪽 부분에는 성 베드로 조각상이 있다. 오벨리스크 앞에 서서 조각상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줄을 그어보자. 조각상을 지나 줄을 더 그으면 초기순교자광장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줄이 그어지는 방향은 서쪽~동쪽으로 누운 현재의 성베드로대성당과는 달리 서남쪽~동북쪽이다.
이 방향이 고대 로마 시대에 바티카누스에 존재했던 네로전차경기장의 방향이었다. 지금은 텅 빈 초기순교자광장은 당시에는 전차경기장의 정중앙이어서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지금 오벨리스크가 서 있는 성베드로광장의 정중앙은 당시에는 전차경기장의 동쪽 끝이었다.
오벨리스크가 초기순교자광장 자리에서 성베드로광장의 정중앙으로 옮겨진 것은 17세기에 성베드로대성당을 새로 짓던 도중이었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성스러운 건축물을 새로 건설하는 대성당과 광장 바깥에 방치할 수 없다는 게 교황청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건설하던 중세의 자료를 찾다 보니 이해하기 힘든 게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성당 인근에는 오벨리스크 외에 전차경기장 잔해가 더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최후의 목격자가 더 있었다는 뜻이 된다.
2세기에 저술된 『베드로 행록』을 보면 ‘성 베드로는 두 메타 사이에서 순교했다’고 돼 있다. 메타는 전차경기장에서 마차가 달리는 트랙의 양쪽 끝에 세운 원뿔형 기둥이었다. 마차가 선회할 지점을 알려주는 게 메타의 역할이었다. 두 메타도 성 베드로 순교의 목격자였는데,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지을 때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들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전차경기장의 모든 흔적이 완전하게 사라져 버린 것은 성베드로대성당을 새로 지을 때였다. 그때 모든 잔해를 완전히 치워버린 것이었다. 교황청은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성 베드로의 목격자들을 왜 없애버린 것일까? 그러면서 오벨리스크는 왜 남겨두고 목격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퍼뜨린 일등공신인 성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를 부수지 않고 일부분이라도 보존했다면 최고의 순례 성지가 됐을 텐데 왜 굳이 없애 버린 것일까?
새 성베드로대성당을 짓기 전 광장 바깥에 서 있었을 때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금으로 도금한 공이 하나 달려 있었다. 공에는 고대 로마의 영웅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가 들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은 존경했던 카이사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는 중세에는 ‘카이사르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모두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그 높은 꼭대기에 올라가 공을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소문의 진실’은 13개월에 걸쳐 오벨리스크를 성베드로광장 한가운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던 16세기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가 공사 도중 공을 열어 봄으로써 밝혀졌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원했던 것은 진실을 환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저녁 술자리나 수다 자리에서 ‘내가 맞니, 네가 맞니’ 하며 다툴 소재가 필요했다. 폰타나가 진실을 밝혀낸 다음 날 로마 밤거리에는 당장 다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공에 예수의 유해가 들어 있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