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전 이탈리아 로마에 처음 갔을 때 성베드로대성당으로 향하면서 선택한 교통수단은 지하철이었다. A라인 오타비아노역에서 내려 10분만 걸으면 대성당에 도착할 수 있어 매우 편리했다. 로마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대성당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하철로 쉽게 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4년 전 세 번째 로마 여행 중 성베드로대성당으로 갈 때 택한 길은 이전처럼 지하철이 아니었다. 이때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지인 대성당에 대해 공부를 해서 제법 많은 내용을 알게 된 이후였다. 나는 조금 힘들더라도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담은 길, 바로 ‘성스러운 순교자의 길’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성스러운 순교자의 길’은 1세기 고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에 로마를 잿더미로 만든 대화재의 범인, 즉 방화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동물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순교한 기독교인들이 처형 장소인 바티카누스의 네로전차경기장으로 끌려갔던 길이었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잔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마저 암살한 네로는 64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지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황제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 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를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시민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정치적 위기의 탈출구를 기독교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멸망을 꿈꾸면서 방화했다고 몰아세운 뒤 수백 명을 바티카누스로 끌고 가 처형한 것이었다.
당시 네로의 기독교인 박해가 왜 일어났고 얼마나 잔혹했는지는 1~2세기 로마 원로원 의원이었고 역사학자였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가 대화재 이후 직접 목격하고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적은 『연대기』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어떤 노력도 불이 누군가의 지시로 일어났다는 소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네로는 소문을 없애기 위해 끔찍한 처벌을 내릴 희생양을 고르기로 했다. 당시 로마인에게서 혐오를 받던 기독교인이었다. 처음에 일부가 체포돼 죄를 자백했고 더 많은 사람이 붙잡혔다. 그들의 혐의는 방화가 아니었다. 로마인을 향한 반감이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끌려가 개들에게 물어 뜯겨 산산조각 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도 했고, 해가 져 어두워지면 밤을 밝히려고 산 채 화형 당했다. 기독교인이 본보기 처벌을 받았다는 연민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광기 때문에 처형당했다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거쳐 로마의 정신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캄피돌리오 언덕을 둘러본 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간다. 언덕 밑의 스페인광장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버스와 승용차가 바쁘게 다니는 코르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가 이어진다. 과거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로마군이 개선하던 길이라고 해서 비아 트리온팔레(개선의 거리)로 불렸던 곳이었다.
네로 시대에 많은 기독교인이 처형장소로 끌려갔던 ‘성스러운 순교자의 길’의 출발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로마인에게는 승리의 길이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죽음의 길이었던 셈이다.
공화정 중기까지만 해도 비아 트리온팔레와 주변 지역은 도시 외곽의 평원이어서 건물이 많지 않았다. 공화정 말기를 거쳐 제정 시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기독교인들이 끌려갈 때에는 이미 적지 않은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고대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가 건설했고 역사에 길이 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폼페이우스대극장이 이 거리에 있었다.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며 세운 신전도 여러 곳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의 2인자였던 아그리파가 만든 아그리파 욕장도 이 거리 인근에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반역 혐의로 기소돼 로마에 간 성 바오로가 죽기 전까지 2년 동안 머물렀던 산타마리아 인 비아 라타 성당과 산파올로 알라 레골라 성당도 근처에 있었다. 물론 네로 시대에는 성당이 아니라 단순한 저택이었고 나중에 세월이 흘러 성당으로 바뀌었다.
코르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거리를 걷고 있으려니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돌로 덮인 인도는 빗물에 젖고, 좁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저택의 유리창에는 따스한 온기가 수증기로 서린다. 포근한 집안에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비친다. 저들은 2000년 전 창문 바깥의 거리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통곡하며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로마 곳곳에서 붙잡힌 기독교인들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아 트리온팔레를 통해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쇠사슬에 묶이고 밧줄로 결박당한 채 터벅터벅 걷던 사람들의 표정은 절망스러웠다.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조금이라도 공감해 보려고 애쓰며 20분 정도 거리를 따라 걷는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테베레강이 나타나고 강물 위로 다리가 하나 보인다. 줄여서 폰테 비토리오라고 불리는 폰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다. 다리를 건너려다 왼쪽 아래에서 홍수에 무너져 내린 것처럼 보이는 콘크리트 더미를 발견한다. 거의 내버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이 덩어리는 폰스 네로니아누스, 즉 네로 다리의 잔해다.
성 베드로를 포함해 당시 기독교인들은 비아 트리온팔레의 일부 구간인 네로 다리를 건너 테베레강을 건넜다. 당시에는 넘어가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다리였는데, 지금은 부서져 언제 강물에 떠내려갈지 모르는 흉물스러운 모습만 남은 것이다. 3세기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를 에워싸는 성벽을 만들 때 방어를 강화하려고 다리를 부숴버렸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인들이 네로 다리를 통해 순교 장소로 끌려간 것은 당시에는 이 다리 외에는 로마 시내에서 바티카누스로 곧바로 이어지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폰테 비토리오는 이탈리아 통일 50주년이던 1911년에 완공됐고, 아래쪽의 폰테 프린시페 아메데오 다리는 1949년에 생겼다. 로마의 많은 다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산탄젤로 앞의 폰테 산탄젤로 다리는 네로 사후인 2세기에 만들어졌다. 로마 최초의 다리인 폰테 수블리키우스와 BC 2세기에 만든 폰테 로토가 있었지만 네로전차경기장에서 너무 멀었다.
여기서 누구나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네로는 왜 공간이 넓고 시내에서 가까운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 같은 대형 시설에서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당시로서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인 바티카누스로 기독교인을 끌고 가 처형했을까?
네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대화재였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오늘날 나보나광장에 있었던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대규모 처형장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로마’ 하면 떠오르는 검투사경기장인 콜로세움은 네로가 죽은 이후에 건설됐다. 결국 네로가 분노한 로마인을 달래기 위해 기독교인을 대거 처형할 수 있던 장소는 로마 외곽에 있어 화재 피해를 면했던 바티카누스 전차경기장뿐이었다.
바티카누스의 전차경기장은 네로에 앞서 로마 제정의 3번째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만든 시설이었다. 전차경주를 매우 좋아했던 그는 전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어 어머니 땅이었던 바티카누스에 경기장을 건설했던 것이었다. 당시 로마 시내에는 전차경기장을 새로 지을 땅이 없었던 데다 황제 혼자서만 이용하는 사설 경기장을 시내에 만들면 반발을 살 우려가 커서 이곳을 건설 부지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은 제5대 황제 네로는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기장을 매우 좋아해 자주 이용했다. 사람들은 이 경기장을 네로전차경기장 또는 칼리굴라-네로전차경기장이라고 불렀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폰테 비토리오 다리 난간을 잡은 채 처참한 모습의 네로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로마 병사가 휘두르는 창칼의 위협 아래 벌벌 떨며 네로 다리를 건너는 기독교인들의 슬픈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테베레강은 그런 여행객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곳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무심하게 하류로 흐를 뿐이다.
테베레강은 로마 한가운데를 ‘S’자 모양으로 지나간다. 이탈리아 중부 아펜니노 산맥 푸마이올로 산의 너도밤나무 숲에 있는 두 샘에서 발원해 로마를 거쳐 서부 피우미치오와 오스티아 사이를 통해 티레니아해로 빠져 나가는 총길이 406km의 긴 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테베레강을 로마와 동일시했다. 로마가 태어나 망할 때까지 1200년 역사를 지켜본 강이었기 때문이다.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따르면 멸망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로마의 조상’ 아이네이아스 일행이 이탈리아에 도착해 첫발을 디딘 곳은 테베레강의 종점이었고,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가 늑대에게 구조돼 젖을 먹은 곳은 팔라티노 언덕 아래 테베레강 언저리였다. 로마가 여러 차례 야만족의 침탈에 시달리다 5세기에 끝내 멸망하는 장면을 지켜본 최후의 목격자도 테베레강이었다.
테베레강은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3000년 전 고대에도 로마 일대를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놓았다. 동쪽은 로마인이 모여 살던 일곱 언덕과 마르스 평원이었고 서쪽은 나지막한 야니쿨룸 언덕과 황무지나 마찬가지인 바티카누스 언덕·평원, 즉 오늘날 바티칸이었다.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고대 로마를 창건한 BC 8세기 무렵만 해도 테베레강 너머 바티카누스 언덕·평원 일대는 에트루리아 영토였기 때문에 로마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로마가 연이어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고 제4대 국왕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테베레강에 첫 다리인 폰스 수블리키우스를 건설한 이후에야 로마인은 비로소 강을 마음 놓고 건널 수 있게 됐다.
무표정하기 짝이 없는 테베레강을 등 뒤로 하고 폰테 비토리오 다리를 건넌다. 다리가 끝나는 곳에 ‘화합의 길’이라는 뜻인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거리가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1929년 교황청과 종교, 정치 분리의 원칙을 담은 ‘라테라노 조약’을 맺은 걸 기념하기 위해 기존 도로를 확충한 길이었다.
오늘날에는 콘칠리아치오네 거리로 불리지만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 비틀거리던 기독교인들이 네로 다리를 건넜던 고대 로마 시대에는 북쪽의 에트루리아 도시인 베이이로 연결되던 비아 트리온팔레의 연장선이었고, 비아 코르넬리아 또는 비아 아우렐리아라고도 불린 길이었다.
비아 트리온팔레는 네로 다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은 뒤 일직선으로 뻗어 전차경기장 북쪽으로 지나갔다. 현대 지도에 대입해 보면 콘칠리아치오네 거리를 거쳐 성베드로광장 한가운데를 지난 다음 성베드로대성당 북쪽과 바티칸궁전 사이로 빠져나간 셈이었다.
콘칠리아치오네 거리는 중세에는 ‘성스러운 길’이라는 뜻인 ‘비아 상크타’라고 불렸다. ‘순교자의 길’이라는 ‘카레이라 마르티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네로 시대에 기독교 순교자들이 끌려간 길이라는 역사를 담은 이름이었다.
지금 콘칠리아치오네 거리 한가운데에 선 여행객의 눈에는 500m 앞에 웅장한 성베드로대성당이 보이지만, 네로 시대에 비아 트리온팔레에 선 기독교인들의 눈에는 그들의 처형 장소가 될 거대한 전차경기장이 악몽처럼 나타났을 것이다. 성 베드로는 많은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이름을 붙인 기독교 성전이 건설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겁에 질린 다른 기독교인들을 위로하며 주님을 되뇌었을 것이다.
울부짖으며 끌려가던 기독교인들의 귀에는 먼저 붙잡혀간 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야수에게 잡아먹힐 때마다 구경하던 로마인들이 내지른 쾌락의 함성도 들렸을 것이다. 전차경기장에서 엄청난 아우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기독교인들은 공포 때문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끼고 두 다리를 떨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그것도 끔찍하고 잔혹한 종말을 맞을 장소로 강제로 걸어가야 하는 그들의 비극적인 심정을 ‘참담’이라는 단어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중에 성베드로대성당을 짓느라 무덤조차 모두 파괴돼 지금은 유해는커녕 흔적조차 남지 않은 당시 기독교인들을 굳이 위로하자면 그들이야말로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밀알이었다는 사실이다. 대성당은 그들의 피와 눈물이 피워낸 화려한 꽃송이였다. 그들은 고통스럽게 죽는 순간까지도 몰랐겠지만, 그 같은 고난과 순교가 있었기에 기독교는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고, 바티카누스는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성스러운 순교자의 길’은 ‘기독교 영광의 길’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