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첫날(1) 아네슈카수녀원~유대인지구

by leo


어린 시절 시골집 굴뚝에서 피어나던 것과 비슷한 연기 냄새를 맡으며 이른 아침에 눈을 뜬다.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난다. 프라하에서는 아직도 난로나 화덕으로 요리, 난방을 하는 곳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약간 매캐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지는 연기를 맡으며 한껏 기지개를 켠다. 1층 식당에서 간단하게 빵과 주스로 아침을 챙긴 뒤 나갈 준비를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프라하에 여행을 가서 둘러보는 곳은 뻔하다. 프라하성, 카를교, 구시가지광장, 바츨라프광장, 비셰흐라트언덕이 고작이다. 대개 당일치기 코스이거나 조금 여유를 두더라도 1박2일 정도가 고작이니 이 정도만 둘러볼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프라하를 제대로 알려면 최소한 3박4일은 머물러야 한다. 프라하의 속살까지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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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침 구시가지 거리는 한가롭다. 숙소 앞 들로우하 거리의 샛골목인 리브나 거리로 들어간다. 프라하를 이리저리 다니다 보면 알게 되지만 구시가지 길은 정말 미로 같다. 곧은 골목인 줄 알고 따라가다 보면 끝이 막혔거나 엉뚱한 곳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구시가지광장과 블타바강 사이 지역이 가장 심하지만 들로우하 거리 일대도 다르지는 않다. 구글 맵을 켜놓고 보면 구시가지 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한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중세에 구시가지에 국제무역시장인 운겔트가 생기자 외국상인에게 물건을 팔고 싶어 하는 지역 상인들이 인근 공터에 모였다. 장사꾼이 많아지자 체계를 갖춘 시장, 광장으로 발전했고 나중에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생겼다.


귀족들은 앞다퉈 저택을 건설했고, 예배를 드리러 가기 쉽게 교회도 만들었다. 각 저택은 계획적으로 건설된 게 아니었다. 빈자리가 생기면 아무 곳에나 대충 집을 지었고 집과 집 사이 공간은 골목길이 됐다. 그러다 보니 길은 좁고 구불구불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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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나 골목길을 벗어나자마자 하슈탈스카 거리가 나오고 왼쪽에 작은 교회가 하나 보인다. 프라하에서는 유일하게 성 카스툴루스에게 바친 성하슈탈교회다. 성 카스툴루스는 3세기 고대 로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기독교인을 숨겨줬다 들켜 순교했던 성인이다. 그의 체코식 이름이 하슈탈이어서 거리 이름은 하슈탈스카 거리, 교회 이름은 성하슈탈교회가 됐다. 프라하에 하슈탈에게 바친 교회가 건설된 것은 그의 유해 중 일부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13세기에 처음 만들어졌고 14세기에 중건된 성하슈탈교회 주변에는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잎이 수북이 쌓여 깊어가는 가을을 대변한다. 짙은 노란색 은행잎과 연한 베이지색 교회 벽은 서로 잘 어울려 마음을 푸근하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아직 오전이어서인지, 아니면 미사 시간에만 문을 열기 때문에 늘 그런 것인지 교회 문은 굳게 닫혔다. 프라하의 작은 교회는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첫날 가장 먼저 가 보고 싶었던 곳은 아네슈카수녀원이었다. 관광객이 드문 이곳에 가려는 이유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었기 때문이다. 아네슈카수녀원에는 체코 수호성인 중 한 명인 성 아네슈카, 즉 ‘보헤미아의 아그네스’ 스토리가 담겼다. 바츨라프광장에 가면 성 바츨라프 기마상이 있는데 체코 수호성인 네 명이 기마상을 에워싸고 있다. 그중 하나가 성 아네슈카다. 프라하 중심지에 선 체코 역사상 최고 성인의 기마상을 꾸민 인물이라는 것은 그만큼 체코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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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슈카는 13세기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1세의 딸이었다. 왕은 어릴 때부터 미인으로 소문난 딸을 결혼카드로 이용해 외교적 입지를 다지려고 했다. 처음엔 여덟 살인 딸을 독일 왕 헨리와 약혼시켰지만 파혼 당했다. 나중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헨리의 아버지인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레데릭 2세가 아들 대신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틀어져 버렸다. 결혼이 미뤄지는 바람에 나이가 든 아네슈카는 정치의 제물로 이용되지 않겠다며 수녀가 됐고, 아네슈카 수녀원을 직접 만들었다.


당시에는 아네슈카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부분 왕족, 귀족은 아들과 딸의 결혼을 통해 유대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군사적, 외교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때 딸이 미인이면 아버지는 좀 더 유리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아네슈카의 불행은 당시 유럽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미인이었다는 데 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도 아네슈카수녀원과 비슷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있다. 16세기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끈 카를로스 5세 국왕의 막내딸인 후안나가 지은 곳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요 때문에 포르투갈 후안 마누엘 왕세자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아들마저 버리고 귀국해 데스칼자스레알레스수도원을 직접 만들어 평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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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아네슈카수녀원은 13세기에 지은 건물과는 완전히 다르다. 상당 부분은 전쟁과 세월 탓에 다 부서졌고 성프란티슈카교회 등 일부만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국립미술관 분관이 된 이곳에는 ‘1200~1550년 보헤미아 및 중부유럽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당시는 종교가 가장 중요한 시대였던 데다 수도원이기 때문에 이곳 전시품은 대부분 기독교 관련 작품이다.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성가족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어두운 수도원 미술관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곳을 한 바퀴 돌아보면 종교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의 가슴에도 깊은 신심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아네슈카수녀원에서 인근 하슈탈스카광장을 지나면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유대인이 밀집해 살았던 유대인지구, 즉 요제포프로 이어진다. 유럽에서 온 단체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어디에 다녀오는 것인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걸어가는 방향을 봐서는 유대인지구로 향하는 모양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가려다 문득 오른쪽에서 특이한 건물을 발견한다. 문에는 ‘SPECULUM ALCHEMIAE’라는 문패가 붙었다. 아! 여기로구나! 나는 머리를 탁 친다. 프라하 역사, 전설 공부를 하다 이곳에 관한 자료를 본 적이 있다. 문패 글자는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스페쿨룸 알케미에. 우리말로 번역하면 ‘연금술의 거울’이다. 이곳은 17세기에 비밀스럽게 연금술을 연구하던 실험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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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블타바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프라하에 홍수가 발생했다. 하슈탈스카 거리의 한 저택도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다. 집주인은 물을 빼낸 다음 집을 고치려고 땅을 팠다. 그런데 지하에서 생각하지도 않았던 시설이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세기 말~17세기 초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시대에 사용됐던 연금술 실험실이었다.


루돌프 2세는 유럽 각국에서 많은 연금술사를 채용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프라하성은 물론 도시 곳곳에 연금술 실험실을 차리거나 자금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왜 이 실험실은 유독 지하에 만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황제가 비밀리에 개인적으로 운용하던 실험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아마 ‘어둠의 기술’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건물 지하를 더 조사해 보니 구시가지광장의 구시청사와 틴성모마리아교회 등으로 연결된 지하 터널이 나왔다. 여기서 일하던 사람은 어디든 손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 이런 터널을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서는 무슨 실험을 했던 것일까? 스페쿨름 알케미에가 세워진 자리는 유대인지구와 기독교인 구역이 나뉘는 접경이었다. 황제는 왜 이런 위치에 비밀 실험실을 세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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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쿨룸 알케미에는 지금 ‘연금술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요금을 내면 둘러볼 수 있다. 지하계단으로 이어지는 연금술 연구의 현장은 매우 신비한 분위기를 준다. 넓지는 않아서 20~30분만 둘러보면 되지만 꽤 재미있는 공간이다.


연금술박물관을 지나 쭉 걸어가면 유대인지구가 나온다.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유대인은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았다. 그래서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는 유대인 밀집거주지, 즉 게토가 생겼다. 습격당할 위험을 줄이려고 유대인이 의도적으로 모여 살기도 했고, 교황이나 지역 통치자가 유대인을 관리하기 쉽게 모여 살게 만든 곳도 있다. 전자의 사례로는 프라하의 유대인지구나 스페인 코르도바와 세비아의 유대리아를 꼽을 수 있다. 후자의 사례로는 이탈리아 로마, 베니스의 게토를 들 수 있다.


프라하에 유대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9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11세기 무렵에는 프라하 세 곳에 유대인 거주지역이 흩어져 있었다. 1096년 보헤미아를 지나가던 십자군이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충격을 받은 유대인은 블타바강변에 모여 살게 됐다. 한쪽으로는 강이 흐르고, 다른 쪽은 집을 빼곡하게 붙여 세워 성벽처럼 만들었다. 출입구 한 곳만 잘 막으면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곳이 유대인지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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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유대인지구는 18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요제프 2세 황제가 재개발을 지시하는 바람에 완전히 사라졌다. 요제프 2세가 새로 만든 곳이라는 뜻에서 이름도 요제포프로 바뀌었다. 지금은 유대인이 모여 살지 않는다. 대신 수준 높은 식당과 바가 넘쳐나 도시에서 많이 붐비는 프라하인의 핫스폿이 됐다. 곳곳에 맛있는 수제 맥주와 체코 전통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미슐랭 별을 받은 수준급 식당은 물론 음식을 포장해서 갈 수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옛 요제포프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스타로노바 시나고그와 유대인 회당 사이에 있는 체르베나 골목이 그곳이다. 이 골목을 보면 19세기 이전 요제포프의 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금술박물관 인근에 아주 이색적인 조각상이 보이는데, 이 조각상이 선 곳부터 유대인지구라고 보면 된다. 조각상 주인공은 현대 프라하 유대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프란츠 카프카다. 조각상은 프라하 시청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지구 동쪽 끝부분인 스페인 시나고그 앞에 세운 것이다. 가슴이 뻥 뚫린 거대한 사내의 어깨에 작은 사내가 올라탄 조각이다. 조각이 워낙 특이해서 유대인뿐 아니라 다른 나라 관광객도 여기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많이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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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지구를 찾는 사람은 대부분 외국에서 온 유대인이다. 다른 나라 관광객도 오기는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이곳에는 유대인의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다른 나라 관광객에게는 둘러볼 만한 가치가 크지 않는 곳이다.


유대인지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데다 과거에는 사방이 꽉 막힌 은밀한 곳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신비로운 전설이 수없이 전해 내려온다. ‘신구시나고그’로 해석할 수 있는 스타로노바 시나고그에는 블타바강 진흙을 퍼서 만든 괴물 골렘의 전설이 전한다. 지금도 이곳 다락에는 골렘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유대인이 다시 위기에 빠지면 되살아나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마이셀로바 시나고그에는 황금 요정 전설이 전한다. 마이셀이라는 청년이 요정에게서 받은 황금으로 시나고그를 지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전설만 전하는 것은 아니고 악몽 같은 실화도 전한다. 바로 독일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야기다. 다른 유럽에서처럼 이곳에서도 학살이 이뤄졌다. 체코의 경우 유대인을 프라하 인근 테레친수용소에 가둬 학살했다. 그곳에 갇힌 어린이들은 공포를 잊으려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대인지구의 핀카스 시나고그로 옮겨졌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당시 어린이들의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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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유대인의 삶은 언제나 롤러코스터 같았다. 잠시 좋았다가 다시 나빠지고, 다시 안정을 되찾았나 싶으면 곧장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지금 평온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언제 쫓겨나고 언제 학살당할지 알 수 없었다.


오늘날 프라하 유대인 수는 3천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 중에서 요제포프에 사는 사람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프라하 곳곳에 흩어져 산다. 여러 가지 이유로 등록하지 않은 유대인도 적지 않아 실제로는 1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왜 등록을 하지 않는 것일까? 다시 비극이 도래하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게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