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첫날(3) 페트린언덕~아기예수

by leo


브레즈브노프수도원 정류장으로 돌아가 다시 22번 트램에 오른다. 이곳까지 온 낯선 외국인이 신기한지 중학생쯤 돼 보이는 여학생이 흘낏 쳐다본다. 돌아갈 때에는 말로스타란스카 정류장에서 내리지 않고 흐라드차니의 포호르젤레츠거리에 있는 포호르젤레츠 정류장에서 내린다.


정류장 맞은편은 우리나라 관광객도 자주 들르는 스트라호프수도원이다. 지금 가려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내일 프라하성을 돌아볼 때 다시 들를 예정이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스쳐 지나간다. 목표는 프라하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페트린언덕 산책이다. 이렇게 하려면 수도원을 지나가야 한다.


1.jpg


수도원 후문으로 나가면 프라하성과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눈과 가슴이 시원해지는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진다. 여기에서부터 페트린언덕 페트린전망대까지 가는 길에는 프라하성과 시내를 찍을 수 있는 멋진 포토 포인트가 적지 않다. 가장 훌륭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은 페트린전망대 꼭대기다. 물론 돈을 내야 올라갈 수 있는 곳이다.


스트라호프수도원에서 페트린전망대로 가는 길은 한적하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 대다수는 현지인이다. 느긋한 여행을 즐기려는 외국인 관광객은 드물다. 본격적인 산책을 시작하기에 앞서 벤치에 앉아 브레즈브노프수도원에서 주워 온 사과를 꺼낸다. 우걱우걱 사과를 베어 먹으며 내려다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나중에 구글 맵에서 찾아보니 하필이면 내가 앉은 자리가 ‘베스트 프라하 오버뷰’라고 표시된 곳이다. 그야말로 우연이 나를 최고의 전망으로 안내한 것이다.


푸른 숲과 파란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찬 중세 저택.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저택들은 선홍색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지붕은 사람의 눈을 자극하듯 하나같이 붉은색이다. 댕~! 댕~! 어디에서인지 나지막하게 종소리가 울린다. 한낮에 평화스러운 수도원 종소리를 들으면서 프라하성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낭만과 환상에 푹 빠지는 기분이다.


111.jpg


작은 사과 한 알을 먹고 약간 쌀랑한 산바람을 쐬면서 프라하성과 시내를 내려다보며 ‘멍 때리기’에 빠져 있는데, 자박자박 단풍을 밟는 걸음소리가 들린다. 정신을 퍼뜩 차리고 주변을 살펴보니 중년 부부가 페트린전망대 쪽에서 수도원을 향해 걷는다. 산책하느라 열기가 오른 탓인지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벤치에서 엉덩이를 들고 그들이 걸어 온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후 갈림길이 나타난다. 한쪽은 계단이고 다른 한쪽은 노란 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산길이다. 페트린전망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계단길이지만 일단 산길로 가 보기로 한다. 초행이어서 길을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더러 오가는 걸 보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택한 길은 그야말로 깊어가는 가을을 푹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단풍길이다. 포플러나무를 포함해 여러 가지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이 이불처럼 길을 덮었다. 바람이 불면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단풍이 땅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가지 않던 단풍놀이를 타향만리 프라하에서 하게 될 줄이야!


118.jpg


구글 맵에서 현재 위치가 어딘지를 찾아보니 길 이름이 ‘십자가의 길’로 나온다. 18세기에 조성된 길이라고 하니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그런데, 이런! 단풍이 덮인 길에서 떨어져 나간 작은 오솔길을 들여다보니 한쪽 구석에 사과나무 서너 그루가 숨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오솔길로 냉큼 내려간다. 바닥에는 아직 상하지 않은 사과 수십 알이 떨어져 있다. 대부분 깨끗한 상태인 걸 보니 아직 산에 사는 동물도 사과가 떨어진 걸 모르는 모양이다.


서둘러 사과 한 알을 주워 옷으로 대충 닦은 뒤 사각 베어본다. 역시! 브레즈브노프수도원의 사과처럼 이곳의 사과도 상큼하고 신선하고 달콤하다. 프라하에 와서 시장에서도 사 먹지 않던 사과를 야생 상태 그대로 주워 먹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113.jpg


사과를 두 알 더 주워 가방에 넣은 다음 다시 큰길로 돌아가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여기서 페트린전망대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다. 2~3분만 걸으면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전망대 주변 공원도 그야말로 ‘단풍 바다’다. 나무에 달린 잎들은 노랗고, 바닥에는 노란 잎이 수북이 쌓여 푹신할 정도다. 엄마, 아빠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어린아이들은 단풍을 잔뜩 주워 하늘에 날리며 깔깔 웃는다. 엄마는 그런 아기의 사진을 찍어 주려고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느라 분주하다.


페트린전망대에 올라가면 프라하성과 시내를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다. 전망대로 가는 승강기를 타려면 돈을 내야 한다. 꽤 비싸지만 그래도 좋은 전망과 좋은 사진을 위해서라면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눈높이에서 보는 전망이라면 이곳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이다. 당연히 더 웅장해 보이고 더 멀리까지 보인다. 이곳에 올라가면 프라하가 왜 백탑도시로 불리는지, 프라하가 왜 중세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프라하의 빨간 지붕 저택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20.jpg
14.jpg


페트린언덕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세 가지다. 방금 걸어온 길, 즉 수도원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게 첫 번째다. 미니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가는 게 두 번째다. 마지막은 언덕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는 길이다. 수도원 산책로는 이미 걸었고 푸니쿨라는 10년 전에 타 봤으니 오늘은 산책로를 따라 내려간다. 산책로는 여러 갈래라서 어디를 택하느냐에 따라 도착지가 달라진다. 나는 미국대사관이 나오는 방향을 택하기로 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로비코브츠카정원과 세미나르주스카정원이 나타난다. 둘 다 흥미로운 공간이지만 입장하려면 티켓을 사야 한다. 정원을 지나면 블라슈스카거리가 보이는데 각종 호텔, 레지던스가 많아 관광객이 제법 붐비는 곳이다. 이 거리를 따라 쭉 걷다 보면 카르멜리트스카라는 큰길이 나타난다.


여기로 온 이유 중 하나는 다음 행선지가 이 길 중간쯤에 있는 탓이다. 큰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한국인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 새로운 목표가 나타난다. 이름조차 특이한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이 교회는 도로와 직각으로 길게 생긴 탓에 전체 모습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전경사진을 찍기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겨우 정면만 찍을 수 있다.


126.jpg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라는 독특한 이름이 붙은 것은 1621년 백산전투에서 ‘맨발의카르멜라이트수도회’ 소속인 수도사 도미닉 아 예수 마리아가 가져간 성모 마리아 성화(聖畫)가 오스트리아제국의 가톨릭 연합군에게 승리를 가져다줬다는 이야기 때문에 붙었다. 성화 때문에 전쟁에서 이겼다는 걸 믿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어찌됐든 도미닉이 성화를 전쟁에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성화가 전쟁에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당시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철통같이 믿고, 그것이 통치에 도움이 되면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에서 큰 도움을 준 도미닉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프라하의 교회 하나를 맨발의카르멜라이트수도회에 넘겨주었다. 수도회는 원래 ‘성삼위일체교회’였던 교회 이름을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로 바꾸고 건물을 새로 지었다.


20221009_132444.jpg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는 트램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붙어 있다. 곧바로 눈길을 잡아챌 만큼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도, 그렇다고 장엄하거나 웅장하지도 않다. 건물 외관이나 실내장식이 훌륭한 곳은 아니다. 역사적 또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상, 그림, 기타 장식물이 풍부한 곳도 아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교회 중 하나 같다. 지역 주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동네 교회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왔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은 꽤 많다. 이들은 왜 여기에 왔을까??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가 프라하는 물론 세계 각국 가톨릭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조그마한 조각상인 ‘밤비노 디 프라가’, 즉 ‘프라하의 아기예수’다. 프라하의 아기예수는 13세기 말~14세기 초에 스페인 코르도바와 세비야 사이의 수도원에 있던 조각가 출신의 이름 없는 수도사가 만든 작품이다. 아기예수가 그의 꿈에 나타나 “기도하라. 그리고 나의 모습을 본 대로 만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아기예수 조각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해마다 수천~수만 명이 아기예수를 참배하러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다. 대부분 병을 낫게 해 달라거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빈다. 때로는 아기를 낳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아기예수에게 드린 기도가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20221009_132549 (2).jpg


<연금술사>를 쓴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 작가인 파올로 코엘료도 무명작가 시절이던 1982년 아내와 함께 이 교회에 들러 무릎을 꿇고 아기예수를 참배했다. 그는 ‘소설이 성공하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했다. 그것이 통했던 것인지 그의 소설은 6년 뒤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쿠엘류는 20여 년 뒤 교회에 돌아가 감사의 뜻으로 아기 예수에게 옷을 선물로 바쳤다.


승리의성모마리아교회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모인 곳이 있다. 교회의 중심인 신도석 중간 부분 오른쪽 앞이다. 프라하의 아기예수는 이곳에 세워져 있다. 어떤 사람은 아기예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기도를 드린다. 신도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도 보인다. 그들을 곁눈질하면서 조용히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아기예수를 쳐다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다.


교회는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30cm 정도 크기인 아기예수 조각상을 은제 상자에 넣어 보관한다. 조각상 표면은 아주 약한 컬러 왁스로 덮여 있다. 아기예수는 항상 긴 옷을 입고 있다. 황금색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하며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있다. 사실은 왕관을 쓴 것처럼 보일 뿐이고, 실제로는 머리 위쪽에 살짝 걸쳐 놓은 것이다. 아기예수는 한 손에는 작은 지구를 들고 있다. 그가 세상 모든 일에 관여한다는 걸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빈 다른 손으로는 축복을 빈다.



교회 입구에는 아기예수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체코어는 물론 영어, 스페인어 등 여러 나라 언어로 적혀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오! 주 예수여! 우리는 아기로 나타난 당신을 봅니다.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걸 믿습니다. (중간 생략) 우리 가족을 보호하소서. 세상의 모든 어린이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당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사랑이 항상 우리에게 깃들게 하시고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소서.’ 옆에는 한글 번역본도 있는데 자세히 읽어 보면 영어 번역본과 내용이 조금 다르다.


성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박물관이 있다. 아기예수의 옷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만든 아기예수 조각상 등을 보관한 곳이다. 아기예수는 옷 마흔여섯 벌을 갖고 있다. 아기예수 소문을 들은 18~19세기 황제, 황후나 귀족 등이 선물로 보낸 것이다. 코엘료가 보낸 것도 그중 하나다. 2011년 한국에서 보낸 연두색 한복도 보인다. 옷은 그냥 보관용으로 비치해 놓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축일에 따라 해마다 약 열 차례 아기예수에게 옷을 갈아입힌다.


박물관에서 내려와 성당 안쪽으로 걸어가자 작은 방이 보인다. 문패가 붙어 있지만 체코어라서 읽을 수 없다. 방 안에서는 신부 한 분이 외국에서 온 여성 관광객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나를 보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나는 머뭇거리다 그의 재촉에 못 이겨 안으로 들어간다.


신부는 나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 주더니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라고 한다.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무어라고 중얼거린다. 아마 축복의 말씀을 내리는 모양이다. 두 여성은 나에 앞서 똑같은 절차를 거쳤다. 신부는 우리에게 나란히 서라고 하더니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준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돼 가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고 재미있는 이벤트임에는 틀림이 없다.


20221009_135356 (2).jpg


나는 신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성당 문을 열고 나가려다 까먹은 게 있어 다시 돌아가 아기예수 앞에 선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속으로 중얼거린다.


‘제가 쓸 책이 인기를 얻어 잘 팔릴 수 있도록 기적을 일으켜 주십시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