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나와 운겔트로 가는 길에 아주 흥미로운 성당이 보인다. 규모가 크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성당 이름은 체코어로 ‘코스텔 스바테호 야쿠바’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성야쿠바성당’이다. 야쿠바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제자 ‘야고보’의 체코어다. 그러니 이곳은 ‘성야고보성당’인 셈이다.
성야쿠바성당 주변은 좁은 골목이어서 전경 사진을 찍기가 매우 어렵다. 겨우 세로로 맞출 수 있지만 그다지 훌륭한 장면은 아니다. 성 야쿠바 성당은 평소에는 문을 닫는다. 미사 시간에 맞춰 찾아가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동네 성당이어서 미사 참가자는 많지 않다. 이곳이 흥미로운 것은 성당 입구 쪽 벽에 붙은 특이한 물건 때문이다. 놀랍게도 사람의 팔이다.
수백 년 전 성 야쿠바 성당에 도둑이 침입했다. 그는 성당에서 가장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훔치려고 했다. 그때 성모 마리아의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도둑은 팔을 빼려고 했지만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성당의 신부가 인기척을 느끼고 나와 도둑을 발견했다. 그도 성모 마리아의 손에서 도둑의 팔을 빼지 못했다.
신부는 할 수 없이 성당 인근에 사는 신도를 불러 그의 팔을 잘라 버렸다. 졸지에 팔을 잃은 도둑은 그대로 달아났다. 신부는 성당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뜻으로 도둑의 팔을 성당 벽에 걸어놓았다. 수백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도둑의 팔은 성당 벽에 걸려 있다.
마침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느라 문이 열려 있어 성당에 들어가 보았다. 정말 벽에는 팔이 붙어 있었다.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더 머물렀다가는 웃음을 터뜨릴지도 몰라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벽에 걸린 것은 정말 도둑의 팔일까? 높이 걸려 있으니 팔인지, 아니면 다른 물건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내려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침에 크게 웃으면 몸이 깨어나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에 좋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성당을 지나 운겔트로 들어갔다. 아직 오전이어서인지 운겔트의 식당, 상점은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 코로나19 영향으로 아직 재개장하지 않는 곳이 있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운겔트는 우리나라 단체 관광객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프라하에 여러 번 다녀온 사람이라도 이런 곳이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운겔트는 중세에는 외국 상인이 모여 물건을 사고 팔던 곳이다. 프라하가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운겔트에 많은 외국 상인이 모여 대규모로 무역을 한 덕분이었다. 왕이 이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시가지광장 쪽에서 운겔트로 가려면 틴성모마리아교회 옆의 틴스카라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낮에도 어둡게 보이는 좁은 길 안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하얀 벽을 가진 2층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건물에는 검은색 돌을 사용해 아치 모양으로 만든 문이 있다. 이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꽤 널찍한 광장이 나온다. 바닥에는 햇빛에 반사돼 빤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검은색 돌이 깔려 있다. 광장 주변은 다양한 색깔과 형태의 건물 18채가 에워싸고 있다. 출구와 입구는 단 두 개뿐이어서 아무나 함부로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었다.
운겔트는 지금은 아주 은밀한 상업구역으로 변했다. 고급식당, 호텔, 기념품 가게 등이 많이 들어선 것이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프라하의 옛 모습을 상상하면서 음식을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일부러 이곳을 찾는다.
지금은 복잡한 시내 관광에 지친 여행객들에게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흥미로운 소규모 광장이지만 1천 년 전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당시에는 유럽 최고의 코스모폴리탄, 즉 국제 도시 프라하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번화한 구역이었다.
운겔트에서 나가면 프라하 여행의 중심지인 구시가지광장이다. 광장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빈다. 곳곳의 골목에서 많은 사람이 들락날락한다. 옛 청사의 시계탑 앞에는 다양한 색깔의 깃발을 든 관광 안내원들은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을 이리저리 이끈다.
프라하에 단체관광을 온 사람은 구시가지 광장을 대충 훑어본다. 천문시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운이 좋다면 인형 행진을 지켜보고, 구시가지광장을 배경으로 또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광장 곳곳에 숨은 골목을 통해 다른 행선지로 이동한다. 단체관광객은 구시가지광장이 어떤 곳인지,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그냥 휙 지나간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간단히 나열해 보자. 우선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생가가 있고, 그가 다녔던 학교를 포함한 인생이 숨은 곳이다. 보헤미아 종교개혁의 상징 틴성모마리아교회, 카프카와 아인슈타인의 단골 카페였던 유니콘의 집, 보헤미아의 전성기를 열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태어난 석종의 집, 소녀 유령의 전설이 서린 골즈-킨스키궁전, 종교개혁과 사회 변혁을 꿈꾼 얀 후스 동상,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 동상에도 엄청난 스토리가 숨어 있다.
구시가지광장 한가운데에는 얀 후스 동상이 서 있다. 맞은편에는 성모 마리아 기둥이 보인다. 얀 후스는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를, 성모 마리아 기둥은 가톨릭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유럽이든 아시아든 어느 나라의 도시에 갔을 때 중요한 장소에 설치한 동상을 잘 살펴보면 그 나라, 그 도시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동상이 설치될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물론 그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현대인 즉 그들의 후손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15세기 종교개혁 및 민족주의 운동의 선구자였던 얀 후스를 기리기 위해 20세기 초에 건립한 전신상인 얀 후스 동상도 그런 곳이다.
얀 후스 동상 주변의 풍경은 늘 한가롭다. 동상 앞 벤치에는 언제나 여행객들이 모여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들 주위에는 비둘기 수십 마리가 몰려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으려고 머리를 숙이고 구구거린다. 뒤에서는 관광용 마차 여러 대가 손님을 기다린다. 마차를 끄는 말들은 꽤 지친 것처럼 보인다.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다 이제 겨우 쉴 시간을 얻은 모양이다.
이런 장면만 보면 이곳은 옛날부터 매우 평화로운 장소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얀 후스가 살았던 15세기 보헤미아와 프라하의 현실은 비둘기가 구구거리고 관광용 마차가 돌아다닐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탄압과 수탈, 전쟁과 학살이 판을 치고 있던 시대였다. 얀 후스는 이런 시대에 태어난 민족주의자이자 개혁적 종교인이었다.
얀 후스가 살던 시대 보헤미아의 정치, 경제, 종교는 독일인이 장악했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베들레헴 예배당의 설교사로 임명됐다. 그는 파렴치한 독일 기업인과 종교인에게 유린당한 조국 보헤미아의 아픈 현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교회와 대학 강단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체코어로만 강의했다. 체코어를 다듬고 철자법을 개혁했으며,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했다. 그는 신학자였지만 종교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농민에서부터 부유한 귀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계각층으로 늘어났다.
얀 후스의 활동에 부담을 느낀 교회는 그에게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하라고 요구했다. 얀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지크문트에게서 신변을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콘스탄츠로 갔지만 교회는 그를 ‘악마’라고 몰아세우며 화형시켜 버렸다.
얀 후스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의 추종자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프라하의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성전을 선포하고 십자군을 동원했다. 이렇게 해서 15년 동안 이어지는 후스 전쟁(1419~34년)이 시작됐다.
얀 후스에 대한 관심의 불길이 되살아난 것은 19세기 말 체코 독립운동이 가속화될 때였다. 1889년부터 그의 동상을 만들자는 운동이 벌어져 국민 모금 운동이 진행됐다. 동상 제작은 1903년에 시작해 1911년에 끝났다. 추진위원회는 후스 화형 500주년인 1915년 7월 6일에 동상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제막식을 4년 뒤에 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1915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뒤흔들던 중이어서 대대적인 제막식을 치를 상황이 아니었다. 추진위원회는 행사를 ‘적당한 시점’으로 미루기로 하고 1915년 7월 6일 일부 인사만 모인 가운데 구시청사 회의장에서 조촐하게 제막식을 거행했다. 나중에 치르기로 했던 ‘대대적인 제막식’은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끝내 거행되지 못했다.
얀 후스 동상을 잘 살펴보면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체코 민족주의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동상 오른쪽에는 그를 지지하는 전사들이, 왼쪽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보인다. 전사들은 백산전투에서의 패배로 프라하에서 쫓겨난 프로테스탄트의 고난을 상징한다. 아기를 안은 여인은 고난을 딛고 일어선 ‘체코의 재탄생’을 의미한다. 동상 아래 부분에는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기원하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후스의 가르침인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체코 민족주의의 기본 이념을 의미한다.
따스한 가을 햇살을 즐기면서 목을 축이기 위해 얀 후스 동상 주변의 벤치에 앉는다.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도 많이 보인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나와 잠시 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딸과 함께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 동상 주변을 계속 맴돌며 록음악을 시끄럽게 부르는 젊은이.
잠시 숨을 돌린 뒤 얀 후스 동상 맞은편에 선 성모 마리아 기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코로나19 이전에 왔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기둥이다. 왜 프라하는 저곳에 난데없이 기둥을 세운 것일까? 정확히 표현하면 새로 세운 것이 아니라 100년 만에 복구한 것이다.
긴 기둥 끝에 성모 마리아가 달린 단순한 구조인 성모 마리아 기둥은 17세기에 처음 건설됐다. 이 기둥은 보헤미아의 좌절, 프로테스탄트의 몰락을 상징한다.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는 후스 전쟁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그 덕분에 보헤미아는 200년 동안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620년 프라하 외곽에서 벌어진 백산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가 이끈 가톨릭연합군에게 패하는 바람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는 사실상 절멸됐다. 보헤미아를 점령하고 프로테스탄트를 몰아낸 황제는 프라하의 중심인 구시가지 광장에 가톨릭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 기둥을 세웠다. 이후 수백 년간 프라하 시민은 구시가지 광장을 지나다닐 때마다 이 기둥을 보면서 끔찍한 수모와 엄청난 좌절을 느꼈다.
1915년 얀 후스 동상이 제막된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체코인은 가톨릭의 상징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체코 침략을 상징하는 구조물인 성모 마리아 기둥을 그냥 놔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얀 후스 동상 제막 3년 후인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하고 제1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창립되자 성모 마리아 기둥을 허물어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을 상징하는 성모 마리아 기둥이 무너지는데 체코의 가톨릭 성당과 신도들은 무엇을 했을까? 하지만 수치를 보면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볼 때 체코인 중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57%에 이른다. 가톨릭 신도는 겨우 9.3%에 불과하다. 17세기 가톨릭연합군이 체코를 점령했지만 그들의 정신과 종교적 영혼까지 점령하지는 못했던 것이었다.
20세기 후반부터 성모 마리아 기둥을 재건하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주로 가톨릭 성당과 신도를 중심으로 내세운 주장이었다. 이를 두고 해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둥을 재건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물을 하나 복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체코의 침략과 수모를 상징하는 기둥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맞섰다. 프라하 시청과 시의회도 “기둥을 재건하면 체코를 통합하기보다는 오히려 분열시킨다”며 반대했다.
체코의 가톨릭뿐 아니라 교황청과 외국에서도 끊임없이 기둥 복구를 건의하자 시의회는 할 수 없이 2020년 복귀를 허가했다. 기둥이 구시가지 광장에 다시 선 것은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려 관광객이 프라하에 가지 못하던 2020년 8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