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정치의 기틀을 다지다
신은 물론 인간에게서도 왕으로 선택받은 로물루스는 위대한 군사적 능력과 개인적 용기를 발휘하고, 최고의 정부를 세우는 데 있어서도 엄청난 지혜를 쓸 수 있도록 허가를 얻었다. 역사에서 언급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그러한 정치적, 군사적 업적을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로물루스가 수립한 정부 형태를 보자. 그의 정부는 평화와 전쟁 모든 경우에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최고의 정치 시스템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계획은 이런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모든 주민을 세 개의 부족으로 나눴다. 부족마다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지도자로 세웠다. 이어 세 부족을 각각 10개의 무리로 나눴다. 이 무리에서도 가장 용감한 사람을 지도자로 임명했다. 세 개로 나눈 부족을 트리부스라고 불렀다. 거기서 더 나눈 30개의 무리를 쿠리아라고 불렀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다. 트리부스는 필레나 트리티스, 쿠리아는 프라트라 또는 로코스로 바꿀 수 있다. 로마인은 트리부스의 지도자를 트리부누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어로는 필라르코이 또는 트리티아르코이라고 할 수 있다. 쿠리아의 대장은 쿠리오네스라고 했다. 그리스어로는 프라트리아르코 또는 로카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각 쿠리아는 다시 10개 소단위로 분류했다. 여기에도 각각 지도자를 임명했다. 이런 지도자를 데쿠리오라고 했다.
로물루스는 부족과 쿠리아로 사람들을 분류한 뒤 각 쿠리아에 30개로 똑같이 나눈 땅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신전을 봉양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땅을 나눠준 것이었다. 나라 전체를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땅 일부는 남겨두었다. 이것이 로물루스가 사람은 물론 땅을 나눈 방법이었다. 모든 것은 가장 공평하게 이뤄졌다.
다른 무리가 하나 더 있었다. 능력에 따라 역할과 명예가 부여된 사람들의 무리였다. 로물루스는 당시의 미덕이나 재산에 따라 출생이 고귀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을 출신지가 애매하고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과 구분했다. 미천한 사람들은 플레베이안, 평민이라고 불렀다. 고귀한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뜻인 파테르로 불렀다.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그들이 자녀를 갖고 있거나, 또는 눈에 띄는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로물루스가 당시 아테테의 정치 시스템에서 모델을 찾아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테네 인은 주민을 두 무리로 나눴다. 하나는 ‘출신 성분이 좋다’는 뜻인 에우파트리다이였다. 귀족 가문 출신이이거나, 재산이 많아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정부는 그들이 통치했다. 그리고 농민인 아그로이코이가 있었다. 공적 업무에 발언권이 없는 나머지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공직을 맡을 수 있었다.
로마 정부에 대해 가장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귀족이 파테르라고 불린 이유를 내가 설명한 것과 똑같이 말한다. 하지만 시기심에 사로잡힌데다 비천한 출신을 이유로 로마 건국자들에게 이유로 비난을 퍼붓고 싶어서 다른 설명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일부 사람만이 아버지를 지목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도망자여서 자유인 아버지를 지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족을 파테르라고 불렀다.”
이들은 그 증거로 이렇게 말한다.
“왕이 귀족을 소집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전령은 귀족의 이름과 그들 아비저의 이름을 불렀다. 반면 평민 일꾼은 소뿔을 불어 평민을 집회로 불러 모았다.”
전령이 귀족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들의 고귀함을 설명하는 증거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소 뿔 소리도 불투명한 평민의 출신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이름을 부른 것은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며, 소 뿔을 분 것은 편의에 따른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물루스는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을 구분한 뒤 각 계급이 지켜야 할 법을 만들었다. 귀족은 사제, 행정관, 판사가 됐다. 또 왕을 도와 여러 가지 도시의 일에 헌신하면서 공공 업무를 보게 했다.
평민은 이런 일에서 제외됐다.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또 이런 일을 할 시간을 낼 만큼 생계가 넉넉하지 않았다. 이들은 농업, 목축이나 이익이 많은 상업에 종사했다. 이 덕분에 평민은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행정관이 하위 계급이나 평민을 부당하게 다루거나, 빈민이 행정관을 질시할 경우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다.
로물루스는 평민에게 귀족을 후원자로 고르게 해서 몸을 맡기게 했다. 그리스의 테살리아 인이나 아테네 인이 오랫동안 실시하던 관습을 개선해서 이런 제도를 만들었다. 테살리아 인은 피후원자를 아주 건방진 자세로 대했다. 그들이 자유민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강요하기도 했다. 피후원자가 명령을 무시할 경우 마치 돈을 주고 산 노예인 것처럼 때리거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혔다. 아테네 인은 피후원자를 테테스라고 불렀다. 고용인이라는 뜻이었다. 고용 관계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테살리아 인은 그들을 페네스타이라고 불렀다. 잡일꾼이라는 뜻이었다.
로물루스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에 멋진 이름을 붙였다. 가난한 사람이나 하층 계급을 보호하는 관계를 파트로누스라고 불렀다. 또 양측에 우호적인 공직을 배분함으로써 양측의 관계가 서로에게 친절한 유대로 이어지게 했다.
로물루스가 파트로누스와 관련해서 제정해 이후 로마에 정착된 법률은 다음과 같다. 법을 잘 모르는 피후원자에게 법을 설명하는 일은 후원자의 의무였다. 피후원자가 없을 때에도 마치 지금 있는 것처럼 피후원자를 돌보는 일, 돈이나 돈과 관련된 계약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것처럼 피후원자를 위해 모든 사무를 챙기는 일, 계약과 관련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피후원자를 위해 소송을 도와주는 일, 기소당한 피후원자를 변론해주는 일, 사적으로나 공적인 업무에서 피후원자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후원자가 딸 결혼을 앞두고 지참금으로 줄 충분한 돈이 없을 때 자금을 모아주는 일, 후원자와 그의 아들이 전쟁 중에 포로로 잡히면 적에게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일, 개인 소송에서 패한 후원자의 손실금이나 국가에 내야 하는 벌금을 대신 물어주는 일, 이런 자금 지원을 채무가 아니라 단순히 사례금으로 생각하는 일, 후원자가 행정관으로 일할 때 필요한 비용이나 기타 공공 비용을 분담하는 일 등은 피후원자의 의무였다.
후원자와 피후원자가 서로를 고소하거나, 증인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표를 던지거나, 적의 편으로 간주되는 것은 불경한 행동일 뿐만 아니라 불법이었다. 누구든지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로물루스가 정한 법에 따라 반역자로 간주됐다. 누가 이런 사람을 유피테르 신에게 제물로 바치려 한다면서 죽여도 합법일 수 있었다. 처벌을 받지 않고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 피살자를 신, 특히 지하세계의 신에게 바치는 것은 로마에서 관습이었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는 대를 이어 지속됐다. 혈연관계 때문에 아들의 아들 대에까지 이어졌다. 저명한 가문이 많은 피후원자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칭찬받는 일이었다. 특히 이런 관계를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능력껏 새로운 피후원자를 확보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후원자와 피후원자 사이에 선의의 경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어느 한쪽은 다른 쪽을 친절이라는 면에서 능가하려고 애썼다. 피후원자는 후원자에게 가능하면 모든 것을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후원자는 모든 수단을 다 써서 피후원자가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도왔고, 절대 돈을 선물로 받지 않으려고 했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이런 삶은 인생이 어떤 즐거움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재산이 아니라 미덕으로 평가했다.
평민이 귀족의 보호를 받는 관계는 로마 안에서만이 아니었다. 로마의 모든 식민지,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은 다른 모든 도시, 로마가 전쟁에서 정복한 모든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원하는 귀족을 선택해 파트로누스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도시의 원로원은 논쟁거리가 발생하면 로마의 후원자에게 달려갔다. 그때까지 논쟁의 결론은 유보됐다.
로물루스의 법에 따라 탄생한 로마의 조화는 너무나 탄탄한 것이어서 로마인들은 638년 동안 내부의 유혈사태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로마에서도 다른 도시들처럼 공공정책과 관련해 평민과 행정관 사이에 크거나 작은 논쟁이 많이 벌어졌다. 그러나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설득함으로써, 또는 일부 사안에서는 양보하고 다른 사안에서는 양보를 받음으로써 동료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했다.
하지만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호민관으로 일할 때부터 정부의 조화는 깨졌다. 이후 영원히 서로를 죽이고 도시에서 추방하는가 하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삼가지 않게 됐다.
로물루스는 후원자 관련 규정을 정비한 뒤에는 원로원을 임명해 공공업무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각 귀족가문에서 100명의 의원을 선발했다. 그들을 고른 방법은 이런 것이었다.
먼저 로물루스는 전체 귀족 중에서 가장 빼어난 한 명을 지명했다. 전쟁을 하러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갈 때마다 도시 행정을 맡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어 세 부족에서 나이로 보아 가장 현명하고 출생으로 보아 가장 뛰어난 사람을 세 명씩 뽑으라고 했다.
이렇게 9명을 선출한 다음에는 30개 쿠리아에서 가장 적합한 사람을 세 명씩 지명하게 됐다. 세 부족에서 선발한 9명에 30개 쿠리아에서 선발한 90명을 합친 다음 가장 먼저 그가 선발한 1명을 그들의 대표로 임명했다. 이렇게 해서 1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완성됐다.
이 모임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게루시아, 라틴어로는 세나투스로 불렸다. 지금까지도 로마인은 이 모임을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지명된 사람들의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이 모임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어떤 고대 역사학자들은 나이든 사람들 또는 큰 장점을 가진 사람들을 게론테스 즉 원로라고 불렀다. 원로원 의원들은 파트레스 콘스크립티라고 불렸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이름을 갖고 있다.
원로원은 그리스 제도다. 그리스 왕들은 조상의 영토를 물려받았건, 시민들로부터 선출됐건 최고의 시민으로 구성된 의회를 갖고 있었다. 호메로스와 다른 고대 시인들이 증언하듯이 고대 왕들의 권력은 독단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았다.
로물루스는 100명으로 이뤄진 원로원 구성을 마무리한 뒤 경호는 물론 긴급한 사안에서 활용할 젊은이들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그는 가장 저명한 가문에서 총 300명을 선발했다. 30개 쿠리아에서 원로원을 뽑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300명을 뽑았다. 각 쿠리아가 10명씩 선발한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이들을 항상 주변에 두었다.
이들은 켈레레스라고 불렸다. 업무를 수행할 때 켈레리티 즉 민첩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은 아주 민첩하게 재빨리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켈레레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대장의 이름을 따서 그런 명칭을 얻었다”고 말한다. 젊은이 중에서 가장 탁월한 청년이 대장 자리를 맡았다. 3개 백인대장이 그의 지휘를 받았다. 3개 백인대장 아래에 다른 하급 지휘관이 또 있었다.
켈레레스는 도시에서 언제나 로물루스를 호위했다. 창을 들고 다니면서 그의 명령을 수행했다. 전쟁에서는 로물루스보다 앞서 공격했고, 로물루스를 보호했다. 전투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끄는 것은 대체적으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맨 먼저 전투에 나섰고 맨 나중에 후퇴했다. 기마 전략이 유리하면 평지에서도 말을 타고 싸웠고, 말을 타기 힘들 때에는 보병처럼 싸웠다.
로물루스는 이런 전투 방식을 스파르타에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가장 존귀한 젊은이 300명을 뽑아 왕의 경호원 노릇을 하게 한 점, 전쟁에서 왕을 보호하게 한 점, 기마병 또는 보병으로 싸우게 한 점 등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