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왕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을 가졌다. 먼저 종교 행사와 희생제례는 물론 신 숭배와 관련한 모든 행위에서 우위권을 가졌다. 또 법과 국가 관습 집행권, 자연법과 민법에 근거하여 정의를 일반적으로 감독할 권한을 확보했다. 중대한 범죄에서는 재판관을 맡았다. 덜 중요한 범죄는 원로원에 맡겼다.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실수가 벌어지지 않도록 원로원을 소집하고 민회를 소집했다. 거기에서 가장 먼저 견해를 밝히고 다수결로 결정된 사항을 집행했다. 전쟁에서 절대적 지휘권도 확보했다.
로물루스는 원로원에는 다음과 같은 권한과 영예를 수여했다. 먼저 왕이 맡긴 모든 일을 심의해서 투표할 권리였다. 결정은 다수결로 이뤄졌다. 이것은 스파르타의 법에서 배운 것이다. 스타르타의 왕은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결정할 자의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원로원은 공적 사안에 대해 완벽한 통제권을 행사했다.
로물루스는 민중에게는 세 가지 특권을 주었다. 행정관을 선출할 권리, 법을 인가할 권리, 전쟁과 관련된 일을 결정할 권리였다. 민중의 권리는 무제한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결정이 효력을 내려면 원로원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민중은 언제나 다함께 동시에 투표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쿠리아별로 모였다. 각 쿠리가 다수결로 결정한 내용은 무엇이든지 원로원에 보고됐다. 지금 이 관습은 뒤집어졌다. 원로원은 민중이 통과시킨 결의안을 심의하지 않는다. 거꾸로 민중이 원로원의 의결에 완전한 권한을 행사한다.
권력 분립을 통해 공공 업무는 사려 깊고 질서 있는 방식으로 집행됐다. 전쟁도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수행됐고, 모두가 엄격하게 복종했다. 왕이 군대를 끌고 나가야할 때라고 생각할 때마다 구대장을 부족에서, 백인대장을 백인대에서 선출할 필요가 없었다. 기마대장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라 군대 병력을 세거나 백인대로 나누거나, 모든 병사를 적당한 위치에 배치할 필요도 없었다.
왕이 구대장에게 지시를 내리면 구대장은 백인대장에게, 백인대장은 다시 십인대장에게 지시를 전달했다. 이들은 부하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기만 하면 됐다. 또 전 군대 또는 일부 부대에 대해 소집령이 내리면 병사들은 무기를 든 채 정해진 장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러한 규정을 통해 로물루스는 평화로울 때나 전쟁을 할 때나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적당하게 배치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로마를 더 크고 더 인구가 많은 도시로 성장시켰다.
모든 남자 아이와 가장 먼저 태어난 여자 아이는 반드시 양육하도록 했다. 아이들이 장애인이 되거나 태어날 때부터 흉측하지 않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아이들을 죽이지 못하게 했다. 단 부모가 먼저 가장 가까운 이웃 다섯 명에게 아이들을 보여주고 허락을 받으면 아이들을 노출시키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이 법을 어기면 다양한 벌칙을 부과했다. 재산 절반을 몰수하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로물루스는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에서 독재나 과두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이 도시에서 도망친 사람들을 환영하거나 직접 끌어들였다. 그 수는 상당히 많았다. 도망자들이 자유민이기만 하면 그들이 달아난 이유가 불행이든 행운이든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로마의 힘을 키우고 이웃의 힘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추진하면서 그럴 듯한 핑계거리를 만들어냈다. 마치 신에게 영광을 바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과 성채 사이에 공간을 확보했다. 이 공간은 로마어로 인테르 듀오스 루코스, 즉 ‘두 숲 사이의 공간’으로 불린다. 당시 이 지역의 상태를 잘 설명해주는 용어다. 말 그대로 이곳은 짙은 숲으로 가려져 있었다.
로물루스는 이곳을 도망자들의 피난처로 삼았다. 그리고 신전을 하나 지었다. 어떤 신에게 바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는 종교라는 명분을 앞세워 적의 손에서 달아나 로마로 온 모든 사람을 보호했다. 그들이 로마에 남아있기를 언하면 시민권을 주고, 적에게서 빼앗은 땅도 나눠 주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조국에서 벌어진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나중에 다른 곳으로 옮겨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교성과 친절 덕분에 그곳에 눌러 앉았다.
로물루스의 세 번째 정책도 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인이 다른 무엇보다도 반드시 실천했어야 하는 최고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왜냐 하면 이 정책 덕분에 로마인이 자유를 위한 가장 튼튼한 초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데 이것은 결코 사소한 요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내용이다.
로마는 군에 복무할 나이가 된 어떤 남자도 살해하지 않고 또 전쟁에서 정복한 도시의 주민들을 노예를 삼지 않으며, 그들의 땅이 양들을 위한 목초지로 전락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로마는 정복한 땅을 소유하도록 추첨을 통해 정착단을 보내거나 정복한 도시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때로는 정복한 시민 모두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런 저런 정책을 통해 로물루스는 처음에는 작았던 식민지를 거대하게 확대했다. 그가 로마를 건국할 때 합류했던 사람의 수는 3천 명을 넘지 않았다. 말도 300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사라졌을 무렵 로마 인구는 5만 6천 명을 넘었고, 말도 1천 마리를 헤아릴 정도였다.
로물루스가 이런 정책을 수립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로마를 다스린 여러 왕은 물론 공화정 시대 행정관들도 그의 정책을 그대로 유지했다. 오히려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이 정책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로마인은 인구가 가장 많다고 알려진 어떤 도시와 비교해도 인구에서 밀리지 않게 됐다.
그리스의 관습과 로마인을 관습을 비교해 보면 스파르타인이나 테베인, 또는 아테네인의 관습을 칭찬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들은 가장 지혜롭다고 자랑하지만 고귀한 출생을 너무나 소중히 생각한 탓에 외국인에게는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았다.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런 거만한 태도에서 어떤 이득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됐다.
스파르타인은 루크트라에서 패해 1천700명을 잃은 이후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테베인과 아테네인은 카이로네아에서 똑같은 재앙을 겪은 뒤 마케도니아인에게 그리스의 주도권뿐만 아니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자유까지 모두 빼앗겨 버렸다.
반면 로마는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 큰 전쟁을 치르는 동안 반란을 일으킨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회복하는 전쟁까지 벌였다. 당시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도 주도권 경쟁에 다시 나섰을 때였다.
또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이 드러내놓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큰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로마는 불행에 굴복하기는커녕 이전보다 더 큰 힘을 끌어 모아 위험에 대처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병사의 수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행운의 신 포르투나 덕분이 아니었다.
모든 게 포르투나의 행운 덕분이었다면 로마는 칸나에에서 맛본 단 한 번의 재앙으로 완전히 무너졌어야 했다. 그 전투에서 로마의 기병 6천 명 중 370명만 살아남았다. 또 보병 8만 명 가운데 3천 명이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내가 경탄해마지 않는 것은 로물루스가 만든 이런 제도만이 아니다. 이제부터 말하려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좋은 정부를 입으로만 떠들 뿐 성공하지는 못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라는 걸 로물루스는 잘 알고 있었다.
먼저 신의 가호다. 이것은 인간의 모험이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으로 신중함과 정의다. 이 것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해칠 생각을 덜하게 된다. 조화를 이루게 되고 부끄러운 즐거움보다는 힘든 명예를 찾는다. 마지막으로 전쟁에서의 용기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모든 미덕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장점 중 어떤 것도 우연히 생기는 것은 아니다. 좋은 법이 있고, 여기에 사람들이 가치 있는 일을 두고 서로 경쟁하게 되면 국가는 경건해지고 차분해지고 신에게 헌신하게 되고 전쟁에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로물루스는 이런 것들을 장려하기 위해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 시작은 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전, 템플룸(성스러운 구역), 제단을 건설했다. 석상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고, 신의 형상과 상징물을 만들었다. 신들의 능력을 널리 알리고, 신들이 어떤 우호적인 선물을 주는지도 알렸다.
각 신을 위해 치러야 할 특별한 축제, 신들이 인간에 의해 바라는 희생제례, 또 휴일과 축일 모임 등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그리스에서 행해지던 최고의 관습을 따라했다. 로물루스는 신성모독과 신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전통 신화는 거부했다.
“이런 것들은 신에게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사악하고 무용하고 경건하지 못하며 무가치하다. 신의 말 중에서 최고의 말을 늘 생각하면서 따라하라. 신들의 축복받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하지 말라.”
로마인에게는 여러 아들에게 거세당한 카일루스(로마신화에 나오는 하늘의 신. 그리스신화의 우라노스)나 안전을 지키려고 자식을 파괴한 사투르누스(그리스신화의 크로노스), 또는 아버지 사투르누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타르타로스의 지하감옥에 가둔 유피테르(그리스신화의 제우스) 같은 전통은 없다.
그리스에서는 페르세포네의 납치, 디오니소스의 모험이나 여러 가지 자연적인 일을 기념하는 이벤트를 열곤 한다. 이와는 달리 로마에는 추모의 날이 없다. 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검은 옷을 입거나 동물을 폭행하거나 여성들이 애통해하는 일도 없다.
요즘 들어 로마인의 행동이 부패했지만 그래도 그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도취, 종교를 앞세운 애걸, 디오니소스 식의 비밀스러운 의식, 신전에서 남녀의 밤샘 기도, 또는 여러 가지의 비밀 의식 같은 것을 볼 수 없다. 다만 신을 경배하는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그리스인이나 야만족에게는 없는 숭배 같은 게 보인다.
내가 가장 경탄하는 것은 전통에 따라 조상의 신을 숭배해야 하는 수많은 민족이 유입됐음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과거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외국 관습 중 어느 것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는 신탁에 따라 외국에서 특정한 의식을 받아들이곤 했지만, 쓸모없거나 우화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 로마의 고유한 전통에 맞추어 그런 의식을 거행했다.
이다 산(그리스 크레타 섬에 있는 산)의 여신을 모시는 의식은 좋은 사례다. 법무관은 로마 전통에 따라 해마다 여신을 기리는 축하 경기대회나 희생제례를 거행한다. 여신을 모시는 남녀 사제는 프리기아 인이다. 로마 시내에게 벌어지는 행진 때 여신 그림을 들고 가는 사람은 바로 이 사제들이다. 이들은 전통에 따라 여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기부를 요청한다. 또 가슴에 여신의 형상을 그린 채 탬버린을 친다. 신들의 어머니인 키벨레를 기리면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뒤를 따른다,
법 또는 원로원 결정에 따라 토착 로마인은 단색 옷을 입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행렬을 따라 걸을 수 없다. 그들은 외국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나 신중하다. 또 예의가 부족한 화려한 연출에 대한 거부감은 정말 엄청나다.
그리스 신화 중 일부는 인간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 중 일부는 자연 현상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며, 다른 일부는 인간의 불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도 하다. 일부는 사람의 마음에서 불안과 공포를 씻어주며, 건전하지 못한 견해를 정화해주기도 한다. 다른 일부는 여러 가지 유익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다른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지만 신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신중하자는 것이다. 나의 마음은 로마의 신화에 더 끌린다. 그리스 신화의 장점은 매우 작으며, 많은 사람에게보다는 신화를 만든 의도를 검토한 사람에게만 득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철학에 익숙하지 않은 대다수는 신의 이야기를 나쁜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또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신을 많은 불행을 퍼뜨리는 존재로 멸시하거나, 신도 그랬다면서 부끄럽고 무법적인 행동을 삼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