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제도와 부부 관계 규정
로물루스가 세운 체제 이야기로 돌아가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역사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로물루스는 신을 경배하는 일을 담당하도록 많은 사람을 임명했다. 시작 단계부터 그렇게 많은 사제를 임명한 신생 국가의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로물루스 통치 기간 중에 부족이나 쿠리아에 의해 공동 희생제례를 거행할 사제로 가문 자체가 사제인 집안을 제외하고도 60명이나 임명됐다. 이것은 동시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테렌투스 바로가 『유물』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고 사려 깊지 않은 방식으로 선출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명예를 공표나 추첨으로 나누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로물루스는 사제 자리를 돈으로 매매하거나 추첨으로 나누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각 쿠리아에 이렇게 지시했다.
“저명한 가문 출신이며 우수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행운을 늘 몰고 다니면서 신체적 결함이 없는 50세 이상 된 남자 두 명을 고로시오. 앞으로 이것을 법으로 정할 것이오. 사제로 임명된 사람에게는 평생 이 같은 명예를 주도록 하리다. 사제에게는 군 복무를 면제해주고고, 모든 법적 부담도 벗겨줄 것이오.”
일부 의식은 여성들이, 다른 의식은 부모가 살아 있는 어린이가 거행했다. 그래서 사제의 아내는 사제 업무에서 남편과 협조해야 했다. 법으로 남자가 축하할 수 없는 의식의 경우에는 사제의 아내가 의식을 수행하고, 자식이 그것으로 도왔다. 자식이 없는 사제의 경우 각 쿠리아의 다른 가족 중에서 가장 잘 생긴 남녀 어린이를 고를 수 있게 했다. 소년은 어른이 될 때까지 의식에서 보조 역할을 맡고 소녀는 결혼하지 않는 한 계속 보조로 일했다.
로물루스는 이런 제도를 그리스의 관행에서 빌려온 것 같다. 그리스에서는 카네포로이 또는 아르헤포로이라고 불린 여성들이 이런 일들을 거행했다. 로마에서는 투툴라타이라고 부르는 여성들이 치렀다. 투툴라타이는 머리에 왕관을 썼다. 그리스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석상 머리를 장식하는 것과 똑같은 왕관이다.
에트루리아 인 사이에서, 또는 좀 더 먼 시대로 가면 펠라스기 인 사이에서 카드밀리라고 불린 사람들이 쿠레테스의 의식과 그리스 신들의 의식에서 수행한 모든 보조적 업무를 로마에서는 카밀리라고 부르는 사제 보조인이 수행했다.
로물루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부족에서 희생제례 때마다 점쟁이 한 명을 뽑으라고 지시했다. 이 점쟁이를 그리스에서는 ‘장기 감시자’라는 뜻인 히에로스코포스라고 부른다. 반면 고대의 이름을 보존하는 로마인은 아루스펙스(내장 감시자)라고 부른다.
로물루스는 또 모든 사제는 쿠리아에 의해 선출돼야 하며, 그들의 선출은 점을 통해 신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입증돼야 한다는 법도 만들었다.
로물루스는 신의 사제와 관련된 규정을 만든 뒤 적당한 방법으로 희생제례를 여러 쿠리아에 분담시켰다. 그들이 항상 섬겨야 하는 신을 하나씩 맡긴 것이었다. 그리고 국고에서 지출해야 하는 희생제례의 비용도 결정했다.
각 쿠리아의 구성원은 분담된 희생제례를 자체 사제와 함께 진행했다. 성스러운 날에는 공동의 식탁에서 축제를 즐겼다. 각 쿠리아는 자체 연회장도 만들었다. 연회장 안에는 쿠리아의 모든 구성원을 위한 공동 식탁인 프리타니아가 설치됐다. 이 연회장도 쿠리아라고 불렸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로물루스는 이런 방식을 스파르타의 관습에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크레타에서 이런 제도를 배운 리쿠르구스가 스파르타에 도입해 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평화로울 때에는 시민들이 매일 식사시간에 절약하고 절제하도록 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모든 남자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불어넣었다. 신주와 희생제물을 함께 바치고 의식을 공동으로 진행했던 동료를 버리지 않게 만들려는 뜻에서였다.
로물루스는 이런 문제를 다룬 리쿠르구스의 지혜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신을 경배하기 위해 도입한 희생제례의 검소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관례 중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고대 방식 그대로 남아있다.
신성한 건물에서 옛날에 만든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신에게 바친 식사를 직접 본 적이 있다. 식사는 바구니와 작은 토기 접시에 담겨 있었다. 보리 빵과 떡, 귀리, 과일, 그리고 단순하고 값싸고 온갖 추잡한 장식 없이 자연스러운 것들이었다.
와인 신주도 봤다. 은잔이나 금잔이 아니라 작은 토기 잔이나 주전자에 들어 있는 술이었다. 조상의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고대 의식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타락시키지 않는 이들을 높이 찬양했다.
이런 것 외에도 기억하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다른 규정도 있었다.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로마를 다스린 누마 폼필리우스가 창안한 것들이다. 그는 완벽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고, 신이 뜻을 해석하는 데 보기 드문 현명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누마의 다음 왕인 툴루스 호스틸루스가 다른 규정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다른 모든 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규정의 씨가 뿌려지고 기초가 다져진 것은 로물루스에 의해서였다. 그는 모든 종교적 의례의 원칙을 확립했던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또한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훌륭한 원칙을 만든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은 이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여러 세대 동안 공동체의 번영을 지킬 수 있었다.
로물루스는 훌륭하고 유용한 법을 여럿 만들었다. 그 중 대다수는 불문법이었고 일부만 성문법이었다. 여기서 법 대부분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감탄할 만한 일부만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로물루스의 나머지 법률의 성격을 가장 드러내는 내용들이다. 정말 소박하면서 악을 배척하며 영웅 시대의 삶과 밀접하게 닮은 것이었다.
국가는 수많은 가정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각 개인의 삶이 안정돼야 국가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거꾸로 시민의 개인적 상황이 나쁜 길을 걷고 있을 때에는 국가도 거센 폭풍에 휘말린다는 게 일반적인 원칙이다.
왕이든 법률가이든 모든 신중한 정치인은 시민의 삶을 올바르고 온건하게 만드는 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도 일반적 원칙이다. 야만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제도를 세웠던 모든 지도자는 이런 일반적 원칙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관행이나 법을 통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는 그들이 다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 중 일부는 법률의 원칙적이고 기본적인 부분에서 정확하지 않고 완전히 헤맸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여자와의 결혼이나 관계에 대해 짐승으로부터 사례를 찾는 일부는 남자들이 자유스럽고 난잡하게 여성과 성교를 하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사랑의 열정에서 남자들을 해방시키고,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질투에서 남자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때문에 모든 가정과 국가 전체에 번질 수 있는 많은 악으로부터 남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사람들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을 연결시킴으로써 음탕하고 짐승 같은 성행위를 국가에서 추방했다. 그들은 또 결혼 관계를 존속시키고 여성의 순결을 보호하려는 목적의 법률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거꾸로 이런 생각을 비현실적이라며 포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야만인처럼 결혼하지 않은 채 성행위를 갖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 스파르타인처럼 여자를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자를 규제 안에 넣어두기 위해 많은 법률을 만들었다.
일부는 여자의 올바른 행동을 감독할 행정관을 임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부도덕한 천성을 가진 여성을 온건한 행동으로 이끄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자들을 지키는 목적을 달성하기에 불충분하고 약한 조치였기 때문이었다.
로물루스는 남편으로 하여금 아내의 부정이나 무단가출에 대해 어떤 조치도 할 수 없게 했다. 거꾸로 아내에게도 부당하다는 이유로 또는 설명 없이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에게 어떤 조치도 할 수 없게 했다.
로물루스는 지참금을 돌려주거나 돌려받는 법을 만들지 않았고, 이런 종류의 어떤 규정도 만들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을 포괄해서 처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법을 통해 여자들이 정숙하게 행동하도록 이끌었다.
법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신성한 결혼에 의해 남편과 합류한 여인은 남편의 모든 재산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신성한 의식을 함께 거행해야 한다. 고대 로마인은 신성하고 합법적인 결혼을 파레아티아라고 불렀다. 부부는 ‘파(귀리)’를 공유한다는 데서 나온 용어였다. 귀리는 아주 오래된 곡식이고 오랫동안 로마인에게 아주 일상적인 식량이었다. 그리고 로마는 아주 우수한 귀리를 대량으로 생산한다.
그리스인이 보리를 가장 오래된 곡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이유로 오울라이라고 부르는 보리와 옥수수를 가지고 희생제례를 시작하듯이, 로마인은 귀리를 가장 가치 있고 오래된 곡식이라고 믿으며 태운 귀리를 갖고 희생제례를 시작한다.
이런 관습은 여전히 남아 있다. 로마인은 더 비싼 첫 공물을 바치는 방식으로 타락하지 않았다. 가장 신성하고 가장 먼저 얻은 식량을 처리하는 일에 남편과 아내가 함께 참여하는 것, 모든 재산을 공유하는 것에 근거를 둔 유대감은 귀리를 공유하는 데에서 이름(콘파레아티오)을 얻었다. 그리고 해체할 수 없는 유대감이라는 끈끈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들의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법은 피신처를 갖고 있지 않은 기혼여성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남편의 뜻에 따르도록 했다. 남편에게는 부인을 반드시 필요하고 분리할 수 없는 소유물로 다스리게끔 했다. 이에 따라 만약 부인이 모든 문제에서 남편에게 순종한다면 그녀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가정의 안주인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딸이 상속자격을 얻는 것처럼 남편이 죽은 뒤에는 부인이 남편의 유산을 상속할 자격을 가졌다. 만약 남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유언 없이 죽으면 부인은 남편이 남긴 모든 재산을 독차지했다. 만약 남편이 후사를 남겼으면 부인과 자식은 재산을 똑같이 나눠 물려받았다.
만약 부인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피해자가 재판관 자리에 앉아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간통이나 음주 같은 잘못은 여자의 친척이 남편과 함께 판결했다. 로물루스는 간통을 부주의한 어리석음의 결과로, 음주를 간통의 원인으로 봤기 때문에 두 잘못을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처벌은 오랫동안 자비 없이 엄격하게 계속 이뤄졌다.
이 법의 효과는 법이 시행된 기간에 의해 입증됐다. 로마에서 520년 동안 결혼이 파탄을 맞은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파피리우스가 집정관이던 BC 231년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라는 유명한 사내가 아내와 이혼했다. 로물루스가 법을 만든 이후 첫 사례였다. 그는 법무관 앞에서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했다고 맹세를 했는데 아내가 불임이었다. 이런 행동 때문에 그는 죽을 때까지 로마인으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이 법은 로물루스가 여성과 관련해 제정한 것 중에 가장 뛰어난 법이었다. 그는 이 법을 통해 아내가 남편에게 예의를 잘 지키도록 만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