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지광장 일대는 프란츠 카프카가 평생을 보냈던 곳이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사용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식 이름은 안셀이었다. 그는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장편소설 ‘아메리카’ ‘재판’ ‘성’을 썼으며 단편과 중편도 여러 편 썼다.
카프카는 태어난 이후 마흔한 살 생일을 한 달 남겨놓고 오스트리아 빈의 병원에서 죽을 때까지 평생을 프라하에서만 살았다. 그와 그의 가족은 프라하에서 열네 번 이사했는데 대부분 구시가지광장과 유대인지구(요제포프) 인근에 ‘갇혀’ 살았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에 여러 차례 여행을 다녀왔지만 인생 말년에 베를린에서 수개월 산 것을 제외하고는 늘 프라하에서 지냈다. 그에게 프라하는 고향이자 감옥 같은 곳이었다.
카프카 생가로 가려면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얀 후스 동상 뒤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그쪽으로 걷다 보면 광장 끝부분에 성미쿨라시교회가 나온다. 미쿨라시는 영어로는 니콜라스다. 그는 수많은 기적을 이룬 4세기 그리스 출생의 주교였다. 카를교 건너편 말라 스트라나에도 성미쿨라시교회가 있는데, 두 교회는 이름만 같은 뿐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구시가지 광장의 성미쿨라시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인데, 강 건너편 교회는 가톨릭 교회다.
성미쿨라시교회를 지나면 왼쪽에 작은 광장이 보인다. 이름은 ‘프란츠카프카광장’이다. 그가 이곳에서 태어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광장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광장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 붙은 건물은 성미쿨라시교회이고, 북쪽에 달린 건물이 바로 카프카의 생가다.
카프카는 1883년 6월 3일 태어났다. 1주일 뒤에는 유대인 전통에 따라 할례를 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당시에는 ‘탑의 집’이라고 불리던 건물이었다. ‘탑의 집’은 원래 성미쿨라시교회 성직자가 살던 숙소였다. 18세기부터 성직자뿐 아니라 평범한 가정도 들어가 살아 공동주택으로 변신했다.
카프카의 부모는 1882년 9월 3일 골다머 호텔에서 결혼한 뒤 ‘탑의 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성미쿨라시교회 다음 구역부터는 유대인지구인 요제포프다. 교회는 유대인지구와 기독교인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카프카의 부모가 이곳에 들어가 산 것은 유대인지구 바로 인근이었기 때문이다.
카프카 가족은 1885년 5월까지 3년 가까이 이곳에서 살았다. 카프카의 부모가 꾸리던 장사는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그래서 더 안락하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카프카 가족이 이사를 가고 2년 뒤 건물에 불이 나 문만 빼고는 전소돼 버렸다. 지금은 1902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새 건물 외벽에는 1966년 조각가 카를 흘라딕이 만든 카프카 흉상이 붙어 있다. 건물 안에는 카프카를 기념하는 어떤 시설도 설치돼 있지 않다. 외벽에 붙은 흉상이 이곳이 그의 생가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시설물이다. 생가 맞은편에 ‘카프카의 세계’라는 사설 박물관이 있는데, 들어가 보지 않아서 어떤 곳인지는 알 수 없다.
카프카 가족은 ‘탑의 집’에서 살다가 인근으로 이사를 갔다. 여러 곳을 돌다 다시 안착한 곳은 천문시계 바로 옆에 있는 ‘둠 우 미누티’였다. 이 집은 외관이 정말 특이해서 지금도 눈에 금방 띈다. 벽에 희한한 회색 벽화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름은 ‘소량의 집’ 또는 ‘담배 한 개비의 집’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의 세 여동생 가브리엘(엘리), 발레리(발리), 오틀리(오틀라)가 태어났다.
‘우 미누티’는 15세기에 처음 고딕 양식으로 건설했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원래는 ‘하얀 사자의 집’으로 불렸고 약국으로 사용됐다. 지금도 집의 벽에는 하얀 사자 조각이 붙어 있다. 19~20세기에 이곳 1층에 있던 가게에서 담배를 개비로 나눠 팔았기 때문에 ‘작은 집’이나 ‘담배 한 개비의 집’으로 불리게 됐다.
20세기 초 프라하시청은 구시가지광장 인근을 재개발하기 위해 ‘작은 집’을 철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화유산보존위원회가 반대해 철거하지 못했다. ‘작은 집’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스그라피토로 불리는 벽화 그라피티다. 벽화 때문에 ‘작은 집’은 주변 여러 건물 중에서 특히 눈에 띈다.
그라피티는 처음에는 16세기 말에, 두 번째는 17세기 초에 새로 그려졌다. 여기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합스부르크 왕실의 막시밀리안 2세, 루돌프 2세 등 왕과 황제들이 담겼다.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셀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행진, 금단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에서 사슴과 함께 있는 아담과 이브 같은 그림도 있다.
도덕적 교훈을 담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야기도 보인다. 세 아들이 유산을 놓고 갈등하다 아버지의 시체에 화살을 가장 잘 쏘는 아들이 유산을 많이 갖기로 했다. 두 아들은 화살을 쐈지만 막내아들은 울면서 포기했다. 유산은 결국 막내에게 돌아갔다. 고대 로마 시대에 로마에 쳐들어간 클루시움의 왕 포르세나를 암살하러 갔다 붙잡히자 뜨겁게 불타는 화로의 숯덩이를 맨손으로 잡아 왕을 놀라게 한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는 물론 정의와 용기, 지혜, 다산을 상징하는 비유적 인물도 그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카프카 생가나 그의 세 여동생을 낳은 집을 둘러보는 관광객은 드물다. 건물에 들어가 볼 수 없는 데다 흉상이나 벽화 말고는 특별히 볼 게 없다. 다들 천문시계에만 관심을 둘 뿐 ‘작은 집’으로는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이 집 앞에서 벽화 그라파티를 쳐다보면서 카프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우리 일행뿐이다.
카프카는 둠 우 미누티에 살 때 처음 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가장 먼저 입학한 학교는 방금 지나온 성야쿠바성당 뒤편 마스나거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곳에 학교가 존재하고-물론 카프카가 다닌 학교 건물은 아니지만-체육시설도 있으니 ‘있었다’가 아니라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카프카가 학교에 가던 길을 지금도 따라 가볼 수 있다. 그는 학교에 갈 때 둠 우 미누티에서 나와 천문시계를 지나 구시가지광장을 가로질렀다. 이어 틴성모마리아교회 옆의 골목인 틴스카거리로 들어가 때로는 운겔트를 지나가거나, 다른 경우에는 운겔트 왼쪽으로 굽어지는 틴스카거리를 계속 따라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면 바로 앞에서 마스나거리를 만난다. 그의 학교는 거리 입구에 있었다. 오늘 아침에 구시가지광장을 둘러보기 위해 숙소에서 걸어온 길은 카프카가 학교에 가던 길과 거의 겹친 셈이었다.
카프카 가족은 1896년 9월 첼레트나거리 602-3번지에 있는 ‘세 왕의 집’으로 이사했다. 틴성모마리아교회 바로 오른쪽 골목에 붙은 집이다. 카프카가 문학에 관심을 갖고 글을 처음 쓴 곳은 여기였다. 그는 학생 시절의 대부분을 이 집에서 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사무실, 법원에서 훈련생으로 일할 때도 여기서 살았다.
구시가지광장에 남은 카프카의 흔적은 다른 곳에도 남았다. 틴교회 왼쪽에 툭 튀어나온 건물은 골즈-킨스키궁전인데, 카프카는 이곳에 있던 독일어문법학교인 김나지움에 다녔다. 김나지움의 학생 대부분은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이었다. 그가 학교에 처음 들어갔을 때 같은 반에 있던 학생 39명 중 30명이 유대인이었다. 골즈-킨스키 궁전 1층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신사복 등 옷감 장사를 했다.
이곳은 지금은 국립미술관 분관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갤러리를 둘러볼 수 있다. 우리는 갤러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1층 로비에 들어갔다. 그곳에 있는 동판을 보기 위해서였다. 복도 모퉁이 벽에 붙은 동판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소리를 내 내용을 읽었다. “ ‘카프카가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의 아버지가 가게를 운영했다.”
독일어문법학교를 졸업한 카프카는 카를대에 들어갔다. 당시 카를대는 독일어를 쓰는 학생과 체코어를 쓰는 학생이 다니는 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카프카는 당연히 독일어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다닌 학교는 오페라극장인 스타보브스케 디발도 바로 앞에 있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걸어서 2~3분 거리였다.
틴성모마리아교회 오른쪽에는 ‘하얀 유니콘의 집’이 있는데, 과거에는 카프카를 포함해 젊은 유대인 지식인이 즐겨 찾던 카페였다. 카를대학교에서 1년간 교수로 재직했던 아인슈타인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는 여기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유니콘의 집 벽에는 ‘아인슈타인이 이곳에 자주 들렀고 바이올린도 연주했다’는 내용과 함께 아인슈타인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다. 하지만 카프카가 단골손님이었다는 내용의 동판은 없다.
유니콘의 집 옆에는 ‘황새의 집’이 있다. ‘돌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카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카프카는 이 건물에 있던 변호사 리하르트 뢰비의 사무실에서 수습직원으로 일했다. ‘황새의 집’ 벽도 정말 독특한 그림으로 덮였다. 그림 내용은 다양한데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카프카가 태어났던 성미쿨라시교회 오른쪽의 건물은 카프카 부모의 마지막 집이었다. 아들인 카프카가 가업을 물려받지 않으려 하자 두 사람은 가게를 팔고 이 건물을 샀다. 결핵에 걸린 카프카는 오스트리아 빈의 병원으로 옮겨져 죽기 직전에 이곳에 들어가 부모의 간호를 받았다. 이곳은 프라하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인데, 지금은 관광안내소 등이 들어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바라본 구시가지광장 풍경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설명했다.
‘창문에서 오른쪽에는 탑 두 개를 가진 교회의 거대한 탑이 보여. 돔과 다른 아파트 사이로는 페트린언덕이 멀리 보이고 다른 작은 교회도 보여. 왼쪽으로는 시청과 탑을 볼 수 있어.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올라 멋지게 지나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곳이지.’
카프카는 1917년 후두결핵에 걸렸다. 병을 치료했다가 재발하기를 반복하던 그는 1921년 6월 3일 숨을 거뒀다. 목이 너무 아파 말은커녕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직접적인 사인은 아사였다.
카프카가 사랑했던 세 여동생은 20여 년 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삼촌 지그프리드는 독일군에 끌려가기 전날 자살했다. 카프카가 만약 결핵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다면 네 사람과 똑같은 운명을 겪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