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한 카를로바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프라하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호등이 나타난다. 길에는 트램 노선이 깔렸다. 많은 관광객이 오가는 길이지만 하루 종일 트램도 다니다보니 안전을 위해 신호등을 설치한 모양이다. 관광객 대부분은 외국인이어서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무단 횡단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길을 건너면, 프라하 사람들 표현에 따르면, ‘프라하에서 가장 작은 광장’이 나온다. 체코어로는 크르지조브니츠키 광장, 우리말로 번역하면 ‘십자군 광장’이다. 대부분 관광객은 광장을 그냥 휙 지나가버린다. 고작해야 광장 한가운데 선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는 정도다. 그들은 잘 살펴보면 이곳에도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른다.
먼저 광장 이름부터 보자. 왜 광장에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 광장 북쪽 구역에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교회’ 뒤에 ‘빨간 별의 십자군 수도회’가 운영하는 수도원이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수도회를 창건하고 수도원을 건설한 사람은 프라하 여행 첫날 방문했던 ‘아네슈카 수녀원’을 만들었던 성 아네슈카였다. 이 수도회는 전 세계의 많은 수도회 중에서 여성에 의해 창단된 유일한 남성 수도회다. 또 보헤미아에서 창단된 유일한 수도회이기도 하다. 사실 이 수도회나 수도원은 ‘십자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냥 이름을 그렇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카를교가 생기기 전 블타바강에는 12세기에 만든 ‘유디타 다리’가 있었다. 14세기에 발생한 엄청난 홍수 때문에 다리는 무너지고 일부 흔적만 남았다. 십자군 수도원 끝부분 유람선 선착장이 바로 유디타 다리 흔적이다. 다리를 만든 사람은 12세기 국왕 블라디슬라프 2세였다. 그는 왕자일 때 이탈리아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곳곳에 산재한 여러 돌다리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귀국한 그는 프라하에도 돌다리를 놓기로 결심했고 왕이 된 뒤 결심을 실천했다.
크르지조브니츠키 광장에는 카를교를 건설했고 14세기에 ‘보헤미아의 황금시대’를 연 카를 4세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은 보헤미아에 민족주의와 독립의 광풍이 몰아치던 1844~1851년에 제작됐다. 처음에는 카를 4세가 설립한 카를대학교 개교 500주년인 1848년에 동상 제막식을 열 계획이었지만 제작이 늦어지는 바람에 3년 늦춰졌다.
동상을 대충 보면 단순히 옛 황제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카를대학교와 깊은 연관성이 담겨 있다. 그는 손에 카를대학교 헌장을 들었다. 발아래에는 ‘카를 4세, 대학교 창립자’라는 글이 새겨졌다. 기단에는 대학교 창립 당시 4개 학과, 즉 신학, 의학, 법학, 철학을 상징하는 조각이 붙었다.
카를 4세는 프라하 경제를 부흥시키고, 프라하성 등을 포함해 많은 건축물을 건설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프라하에 동유럽 최초의 대학교를 설립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에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21세기 들어 프라하에서 실시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여론조사에서 카를 4세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산을 살펴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광장 앞에는 스타로메슈츠카 모스체츠카 베슈, 즉 구시가지다리탑이 보인다. 이 탑 아래를 지나면 카를교가 곧바로 나타난다. ‘프라하라는 왕관 한가운데에 박힌 보석’이라는 소리를 듣는 카를교는 프라하 여행의 중심지다. 구시가지 쪽에 방을 잡았든, 말라 스트라나 쪽에 숙소를 정했든 걸어서 프라하를 여행하려면 카를교를 최소한 한 번 이상 건너다녀야 한다. 이곳을 둘러보지 않고 프라하 전체를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사실 전날 늦은 밤에 산책을 하다 카를교를 둘러보았다. 숙소 문을 열고 나서자 불이 꺼진 건물들 사이로 울퉁불퉁한 사각형 돌로 포장된 인도가 마중 나와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푸르스름한 빛이 퍼지는 가로등 아래를 10여 분 정도 걸었다.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중세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와는 완전히 다른 신비한 매력이 흐르는 곳이라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늦은 밤인데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밤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카페 앞 회랑에 놓인 테이블에서 밤 커피를 즐겼다. 커피에서 퍼져 나오는 향기 너머로 웅장한 탑이 보이고, 그 뒤로 희미하게 새로운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카를교였다.
늦은 밤에 어둠으로 뒤덮인 다리를 걷는 기분은 아주 묘했다. 다리 건너편은 주광색 불빛으로 환히 빛났다. 마치 지하에서 지상으로 빛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가면 600년 전 중세의 프라하로 빨려 들어가 판타지 영화의 장면처럼 축제를 구경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해질 무렵의 카를교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석양을 배경으로 프라하성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다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숨 막힐 지경이라는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해가 완전히 져서 어두워진 뒤나 안개가 적당히 희미하게 끼었을 때가 다리를 즐길 최고의 시간이다. 다리에 담긴 오랜 역사와 기묘하고 신기한 중세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카를교는 수 세기 동안 블타바강의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프라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자 프라하의 랜드마크다. 유럽 여러 나라에 오래된 돌다리가 수없이 많지만 역사, 아름다움,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카를교에 맞설 수 있는 곳은 없다.
1402년에 만들어진 카를교는 6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곳이다. 프라하에 있는 다리 중에서는 가장 오래됐고, 체코 전국을 통틀어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다리다. 카를교는 여섯 차례의 100년이 지나는 동안 블타바강에 우뚝 버티고 서서 재앙 같은 홍수에서 전쟁, 혁명, 반란에 이르기까지 많은 역사적 사건을 목격했다.
다리 바닥에는 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수많은 시체는 난간 아래로 내동댕이쳐졌다. 다리 양쪽의 탑에는 처형을 당해 잘린 목이 수시로 내걸리기도 했다. 이처럼 엄청난 죽음의 이야기가 흘러 다니는 곳이다 보니 많은 미신과 전설이 태어났다. 머리를 잘린 유령이 다리 위를 떠돌아다니는 걸 목격했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카를교에는 마차는 물론 트램까지 다녔다. 지금은 보행자 전용구역으로 지정돼 사람만 걸어 건널 수 있다. 차량 통행이 제한돼 있지만 보행자만으로도 다리는 하루 종일 복잡하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프라하를 다 둘러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많은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다리를 건너다닌다.
다리 아래에 강물이 흐른다면 다리 위에는 사람이 흐른다고 할 정도다. 다리의 예술가에게 몸을 맡겨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 각종 조각상을 만지거나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 블타바강을 배경으로 셔터를 누르는 사람, 일행과 함께 그냥 즐겁게 웃으며 천천히 걷는 사람.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은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사실은 모두 밝고 환하다는 점이다.
많은 관광객을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카를교는 단순히 고풍스러운 다리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된다. 조각상 30개가 양쪽으로 줄지어 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반가운 인사말을 건네는 ‘조각상의 골목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야외 조각 갤러리’, 또는 ‘조각 미술관 다리’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리를 한 번이라도 건넌 사람이라면 영원히 잊지 못할 깊고 짙은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카를교가 관광객의 인기를 끄는 것은 이처럼 다리 난간에 세워진 30개의 조각상 덕분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폰테 산탄젤로’나 독일 비르츠부르크의 ‘알테 마인브뤼케’도 조각상으로 유명한 다리다. 그러나 두 다리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카를교를 보자마자 금세 눈치를 챌 수 있다. 색채감과 생동감이라는 측면에서 두 다리는 감히 카를교에 범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카를교의 조각상은 난간을 꾸미기 위해 달아 놓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훌륭한 예술품이다. 카를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조각상 덕분이다.
조각상은 대부분 체코 바로크 양식의 황금시대인 17~18세기에 귀족, 교회, 프라하 시청, 대학교의 기부를 받아 만들었다. 조각상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등 성가족 외에 당대에 가장 숭배를 받던 기독교의 성인이다. 제작비를 기부한 사람이나 단체가 원하는 성인의 조각상을 만들어 다리에 차례로 하나씩 세운 것이다. 성인을 주제로 고른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카를교 조각상의 기능은 단순한 장식에 머물지 않는다. 다리는 물론 프라하를 지켜 달라는 시민의 염원이 담긴 ‘도시의 수호신’인 것이다.
다양한 표정을 짓는 조각상은 다들 카를교 난간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한 명만 서 있는 조각상이 있는가 하면 대여섯 명이 모여 속삭이는 것 같은 조각상도 있다. 다들 근처를 지나는 관광객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인지 입술을 들썩이고 있다.
조각상이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 관광객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조각상을 올려다본다. 오랜 세월의 때가 낀 시커먼 조각상은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부드럽게 웃음을 짓는다.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카를교에 가장 먼저 세워진 조각상은 1683년 북쪽 난간에 만들어진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의 위치는 구시가지다리탑 쪽에서도 여덟 번째, 레서타운다리탑 쪽에서도 여덟 번째다. ‘8’은 매우 신성한 숫자다. 힌두교에서는 부와 풍요를, 불교에서는 신성한 여덟 가지의 길을, 기독교에서는 ‘신의 날’을 상징한다.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은 블타바강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말라 스트라나에 가깝게 보이지만, 다리를 기준으로 하면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레서타운다리탑에서도, 구시가지다리탑에서도 거리는 257m다.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이 만들어지자 다른 조각상을 다리 난간에 세우는 바람이 불었다. 1706~1712년 사이에만 조각상 24개가 만들어졌다. 1714년 프라하 역병 이후에는 비어 있던 나머지 자리에도 조각상이 설치됐다.
지금 카를교에 있는 조각상 대부분은 18세기에 만들어진 원본이 아니다. 상당수는 부식 때문에 19세기에 모작으로 대체됐다. 20세기 들어서는 부식이 더 심해져 모든 원본 조각상을 걷어내 프라하국립박물관 라피다리움과 비셰흐라트 언덕의 고를리체 홀로 옮겼다. 각 조각상은 세월의 때가 잔뜩 묻어 고색창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원본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아무리 모작이더라도 100~2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며, 당대의 최고 조각가가 제작한 것이라는 사실은 잘 기억해야 한다.
성 네포무츠키 조각상과 함께 외국인 관광객의 눈길을 가장 많이 잡아끄는 조각상은 ‘예수 수난상’이다. 프라하의 종교 갈등은 물론 유대인 차별의 역사를 담은 조각상이다.
‘예수 수난상’의 역사는 카를교에 맨 처음 설치된 장식품인 나무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카를 4세의 지시로 다리 건설 공사를 시작할 때 하느님에게 무사고를 비는 뜻에서 공사 현장에 세운 십자가였다. 십자가는 카를교가 완공된 뒤에도 철거되지 않고 남아 다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다.
십자가를 쓰러뜨린 것은 놀랍게도 십자가를 성스러운 보물로 모시는 기독교였다.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가이자 민족 운동가였던 얀 후스가 1415년 화형 당하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혀 가톨릭교회와 수도원에 불을 지르고 카를교 십자가는 파괴해버렸다. 훼손당한 십자가는 무려 200여 년 뒤인 1629년 다시 설치됐지만 30년 전쟁 때 다시 파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십자가가 두 번째로 훼손되자 1657년 금속으로 만든 십자가 모양의 새 조각상이 설치됐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카를교에 서 있는 ‘예수의 수난상’이었다. 1627년 독일 조각가 힐거가 만들어 드레스덴에 설치한 것을 거액을 주고 사 와서 다리에 올린 것이었다.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꼭대기 부분에는 황금색 판에 히브리어가 새겨져 있다. ‘거룩하도다, 거룩하도다, 거룩하도다, 만군의 여호와시여’라는 뜻의 유대인 기도문 케두샤다. 17세기에 프라하를 지배하던 예수회가 유대인 지도자 엘리아사 바코펜을 신성모독으로 종교재판에 회부한 뒤 그 처벌로 ‘예수 수난상’ 십자가에 설치하라고 한 게 황금색 히브리어였다. ‘유대인이 죽게 만든 예수에게 유대인 기도문을 바침으로써 속죄하라’는 게 예수회의 생각이었다.
미국 뉴욕의 유명한 랍비인 로날드 브라운이 2000년 프라하를 방문한 길에 카를교를 건너가다 우연히 기도문을 봤다. 그는 유대인 차별이라면서 프라하 시장에게 시정을 요청했지만 황금색 판을 떼어낼 수는 없었다. ‘예수 수난상’이 훼손될지도 몰랐던 것이었다. 프라하 시청은 대신 조각상 아래에 체코어, 영어, 히브리어로 된 동판 안내문을 붙였다.
‘예수 수난상’에 매달린 예수의 얼굴은 매우 슬퍼 보인다. 유럽 여러 교회에서 많은 예수 조각상을 봤지만 이 조각처럼 슬퍼하는 표정은 처음이다. 예수는 조각상에 숨겨진 종교 갈등과 민족 차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일까?
카를교를 건너다 난간에 기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다. 블타바강 곳곳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물막이 시설을 설치하는 공사였다.
카를교는 홍수에 매우 취약했다. 블타바강 흐름이 매우 급하고 거친 데다 기술 부족 때문에 다리에 교각을 너무 많이 설치한 게 이유였다. 교각용 아치를 16개나 만든 탓에 다리 아래에서 강물 흐름에 정체가 생기기 일쑤였다. 홍수 때에는 강 상류에서 뿌리째 뽑힌 나무가 끊임없이 흘러오는데, 이 나무들이 교각에 부딪히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상황은 21세기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2년 홍수 때에는 상류에서 떠내려 온 나무가 충돌하는 바람에 일부 교각이 손상됐다. 프라하시청은 2004년 상류에서 떠내려 오는 각종 쓰레기와 홍수로부터 카를교를 보호하기 위해 다리 인근에 나무 방파제를 설치했다. 하지만 2017년 홍수 때 방파제마저 큰 피해를 입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2019년에 옛 방파제를 걷어내고 새 방파제를 만들어야 했는데 이마저 훼손돼 지금 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 카를교는 건강한 상태가 아니어서 다리를 전면적으로 재보수할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프라하시청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 2007년부터 전면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준공을 앞둔 시점에 공사가 엉터리로 진행됐다는 비난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다리에 어울리지 않는 돌을 사용하는가 하면 돌을 엉뚱한 자리에 갖다 놓거나, 건설업체의 기술력이 모자라 오히려 다리에 손상을 입히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비난 여론에 견디다 못한 프라하시청은 2019년에 다시 20년 장기계획을 세워 카를교를 완벽하게 보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아치, 조각상은 물론 교체 바닥까지 다리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칠 방침이다.
카를교는 600년이라는 세월의 우여곡절과 연이은 홍수를 꿋꿋이 버텼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완전히 붕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기후변화 영향으로 과거보다 더 심각한 홍수가 재발할 경우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사람들은 이 다리가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