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교 레서타운다리탑을 향해 걷다 보면 왼쪽에 숲이 우거진 곳이 보인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 그곳에는 미술관, 식당, 호텔 등은 물론 주택도 많이 보인다. 프라하에서 보기 드물게 도시 공원 역할을 하는 섬인 캄파가 바로 이곳이다.
계단 바로 앞에 아주 특이한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주소는 캄파 514-9번지. 집의 테라스 벽에 그림이 하나 달렸다. 자세히 보니 낡은 성모 마리아 그림이다. 그림 옆에는 긴 원통 같은 게 붙었다. 놀랍게도 세탁기 롤러다. 그뿐만 아니다. 난간에는 불꽃이 피어나는 등도 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일까?
카를교의 여러 조각상과 멀리 보이는 프라하성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이 저택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여유를 갖고 난간에 기대 블타바강을 잠시 구경하다 보면 이곳 발코니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테라스에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등이다.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살던 페트루스카라는 여인이 테라스에 등을 달고 유일한 말벗인 밤하늘의 별에게 “내일 아침에 누구라도 좋으니 문을 두들기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별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여인의 문을 두들긴 것은 다름 아닌 저승사자였다.
이번에는 성모 마리아 그림이다. 18세기 블타바강에 큰 홍수가 일어났다. 이 집에 살던 펠즐은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옆집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성모 마리아 그림을 봤다. 그는 성모 마리아가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져 위험을 무릅쓰고 그림을 구해냈다. 그러자 홍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그림을 집의 테라스에 붙여 놓았다.
마지막은 세탁기 롤러다. 20세기 초 캄파 514-9번지에 혼자 살던 마리아라는 여인은 세탁을 하다 세탁기 롤러에 손이 끼고 말았다. 그녀는 테라스의 성모 마리아 그림을 향해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호소가 끝나자마자 손을 잡았던 롤러가 풀려 버렸다. 마리아는 세탁기 롤러를 꺼내 테라스에 붙여 놓았다.
캄파 514-9번지 저택에는 벌써 수백 년째 등과 그림, 롤러가 붙어 있다. 옛날에 달린 등에는 초나 기름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전기 등으로 교체됐다. ‘등이 꺼지는 걸 목격하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닥친다’는 미신이 있는데, 전기 등이니 불이 꺼질 이유는 없다.
카를교를 지나가는 관광객은 대부분 캄파 514-9번지 테라스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어 보인다. 세 가지 이야기를 믿든 안 믿든 아무런 상관은 없다. 도대체 집주인은 왜 지금도 세 가지 물건을 붙여 놓은 것일까? 이곳은 박물관이나 기념품 가게가 아니라 평범한 가정집이니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주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카를교를 다 건너지 않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캄파 섬에서 체르토브카 운하를 건너 레넌벽을 보고 가기로 했다. 1980년대에 생긴 레넌벽은 아주 오래된 역사 유물은 아니지만 프라하의 현대사를 담은 곳인 데다 아주 특이한 벽이 인상적인 곳이니만큼 안 보고 지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를교에서 계단을 따라 캄파로 내려가면 전날 둘러보았던 너른 광장, 즉 나 캄페가 나온다. 나 캄페 오른쪽에는 블타바강이, 왼쪽에는 작은 운하가 흐른다. 운하는 건물에 가려져 있어 광장에서 바로 보이지는 않는다. 건물 뒤로 돌아가야 마침내 말라 스트라나와 캄파를 갈라놓는 운하가 나타난다.
운하의 이름은 ‘악마의 개울’이라는 뜻인 체르토브카다. 12세기 무렵 캄파를 소유했던 몰타기사단이 건설한 시설로 알려졌다. 캄파는 원래 섬이 아니고 말라 스트라나에 붙은 육지였지만 운하가 생기는 바람에 섬으로 변해 버렸다.
운하에 ‘악마의 개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황당하다. 운하 인근에 체르토바라는 소녀가 살았는데 성격이 매우 사납고 난폭했다. 주변 사람에게 너무 나쁜 짓을 많이 저질러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체르토바가 운하 근처에 살았다고 해서 운하에 그녀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체르토바가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운하에 이름이 붙을 정도였던 걸 보면 아마 동네 주민에게 나쁜 짓을 많이 한 지역 유지의 부인이나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 캄파에서 ‘호텔 우 자티슈 누젝’이라는 이름이 적힌 건물 뒤로 돌아가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레넌벽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체르토브카 물레방아 다리’다. 아래로는 운하가 느릿하게 흐르고 있고, 나무로 만든 오래된 물레방아가 설치돼 있다. 물레방아 앞은 고즈넉한 식당이다.
캄파에는 오래전부터 물레방아가 많았다. 물을 이용해 물레방아를 돌려 밀가루를 빻아 판매하는 제분소가 곳곳에 있었다. 물레방아 앞에는 희한하게 생긴 인형이 보인다. 인형 이름은 카르보렉인데, 운하와 블타바강에 사는 요정이다. 전설에 따르면 카르보렉은 술을 좋아하는 요정이어서 밤에 캄파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다가가 술을 얻어 마시곤 한다.
다리 앞의 식당은 ‘벨코프르제보르스케 밀른’이다. 번역하자면 ‘대수도원 풍차’라는 뜻이다. 창쪽 테이블에 앉으면 운하와 카르보렉 인형이 다 보인다. 혹시 기회가 되면 다리 앞의 식당에 앉아 식사를 겸해 술을 마셔도 좋을 성 싶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정말 강에서 요정 카르보렉이 올라와 술을 사 달라고 조를지.
물레방아 다리를 건너가면 곧바로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타난다. 인근에 몰타기사단 지역본부인 대수도원이 있다고 해서 ‘벨코프르제보르스케(대수도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벨코프르제보르스케광장이다.
광장에는 긴 담벼락이 있다. 안쪽 대수도원의 몰타정원과 바깥쪽 광장을 구분하는 시설이다. 담벼락에는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는 비틀즈 멤버였던 가수 존 레넌의 초상화가, 주변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은 1980년대에는 공산정권에 맞서는 저항운동의 상징이었고, ‘철의 장막’이 걷힌 뒤에는 유명한 역사적 관광지가 된 레넌벽이다.
레넌벽은 1980년 12월 영국 록밴드 비틀즈의 멤버였던 존 레넌 사망을 계기로 태어났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일부 젊은이가 버려진 석재 판을 이용해 벽 앞에 가짜 레넌 무덤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젊은이는 벽에 추도 시를 썼다. 다른 사람은 그 위에 십자가를 그렸다.
레넌 무덤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젊은이들이 매일 몰려와 꽃과 양초 그리고 레넌 사진을 가져다놓았다. 이후에는 레넌과 비틀즈의 노래 가사에서 영감을 받은 그라피티가 벽에 그려졌다. 핵무기에 반대하는 글은 물론 정치범 석방, 생활수준 개선 등을 요구하는 글이 적히기도 했다.
위기를 느낀 공산정권은 1981년 4월 제16차 공산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벽을 하얀색, 초록색 페인트로 덮어버렸다. 일부 젊은이는 공산정권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1981년 12월 8일 벽 앞에서 레넌 사망 1주기 기념식을 열었다. 기념식은 이후 해마다 벽 앞에서 거행됐다. 처음에는 소규모로, 즉흥적으로 이뤄졌지만 나중에는 반정부 연설까지 등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회로 변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레넌벽이 붙은 건물과 인근 부지는 원래 소유자였던 몰타 기사단에게 반환됐다. 프라하에 자본주의의 물결이 들어오고 해외 관광객이 늘어나 레넌 벽의 인기가 높아지자 벽에서 레넌 초상화는 사라지고 다른 그림이 그 위를 덮었다. 거의 매일 새로운 그림이 전날 그려진 그림을 덮었다. 명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데에만 급급했던 일부 여행사는 레넌벽에서 스프레이 미술대회를 열었다. 레넌벽이 가진 역사성은 훼손되고 반공산 저항운동의 상징적 장소가 아니라 저속한 돈벌이 행사장으로 전락했다.
벽의 주인이자 관리 책임을 맡은 몰타 기사단은 프라하시청 도움을 받아 레넌벽을 보호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예술가 30명을 초청해 레넌벽이 가진 역사성과 상징성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작품을 그렸다. 시청은 레넌벽이 여행사나 관광객에 의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방지책도 마련했다. 경찰이 정기적으로 레넌 벽을 순찰하기로 했다. 스프레이를 벽에 뿌리는 관광객을 단속하기 위해 CC-TV도 설치했다.
몰타기사단과 프라하시청의 처사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레넌벽은 공산정권 시절에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에게 감정 분출의 무대였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단순히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규제를 강화한다면 레넌 벽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백약이 무효’라는 말이 레넌 벽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허가를 받은 작가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몰래 스프레이를 뿌리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각종 정치 구호는 물론 사랑을 표현하는 글도 벽을 도배했다. 논란도 적지 않았다. 레넌 벽의 정체성이 훼손됐다고 해야 할지, 원래의 자유로운 정신을 찾았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중년여성이 레넌벽의 그림을 배경으로 딸처럼 보이는 어린 소녀 두 명의 사진을 찍어준다. 한곳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는 부분을 찾아 돌아다니며 계속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는 벽 한가운데 레넌의 초상화가 그려진 곳에서 두 팔을 넓게 벌린 아이의 사진을 촬영하며 환하게 웃는다.
이들에게 레넌벽의 역사니 정체성이니 하는 표현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다. 역사의 상징이 넘쳐나는 프라하에서 역사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색적인 벽화 앞에서 독특한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게 그들의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과거에는 벽 안쪽은 폐쇄돼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었다. 벽화를 새로 단장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몰타 기사단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로 하고 벽 안쪽 정원에 있는 건물을 기념품 가게로 탈바꿈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정돈됐는지 궁금해 안으로 들어간다. 몰타정원은 그렇게 넓지 않다. 하지만 과거에 대수도원이 있던 곳이었다는 역사에 걸맞게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밖에서 볼 때는 가지와 잎만 보이던 나무는 놀랄 정도로 굵다. 자료를 찾아보니 수령이 200년을 넘는 단풍나무라고 한다.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지만 단풍나무에도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음악 황제’ 루드비히 판 베토벤은 1796년 프라하를 방문했다. 그가 숙소로 잡은 곳은 말라 스트라나의 레넌벽 근처였다. 레넌벽에서 왼쪽으로 라젠스카 거리를 따라 2~3분 걸어가면 정면에 베토벤 얼굴이 담긴 명판이 붙은 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베토벤이 묵었던 곳이다.
베토벤은 매일 아침 프라하에서 연주회를 갖기에 앞서 인근을 산책했는데 몰타정원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래서 이 나무에는 ‘베토벤의 나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방문했을 때에는 지금처럼 크고 굵은 나무는 아니었을 것이고 적당히 해를 가려주고 등을 기대 쉴 정도였을 것이다. 베토벤은 3년 뒤에는 서거 200주년이 되지만 나무는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있다. 이 정도라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가 아니라 ‘인생은 짧고 자연과 예술은 길다’로 바꿔야하지 않을까?
몰타정원 밖으로 다시 나와 보니 단체관광객 20여 명이 벽 맞은편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여행을 자주 하면서 일부 여행사 가이드는 정말 ‘내용을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이 설명하는 것은 정말 단편적이거나, 아니면 엉터리가 많아 정말 정확하고 재미있는 내용은 빠져 있다. 그렇다고 가이드에게 가서 ‘그건 아니다’라고 정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혼자 다니는 사람이니 필요할 때에만 최소한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