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닌궁전과 정원에서는 우리나라 관광객을 찾아볼 수 없다. 궁전 맞은편에 있는 로레타수도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도 한국인은 보기 힘들다. 개별 여행을 온 젊은이만 가끔 보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전설과 성스러운 집과 훌륭한 보석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다른 이유를 들 필요 없이 이 한마디면 된다. 이곳에는 예수를 낳은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이 있다. 천사가 와서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고 일러줬고 성모 마리아와 예수가 살았던 집이다. 비록 모방품이기는 하지만 그 가치는 작지 않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이곳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로레타수도원은 흔히 ‘프라하의 로레타’ 또는 그냥 로레타라고 불린다. 수도원 바로 앞의 작은 공터는 로레타광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도원 입구이자 광장 한가운데 배수구는 저승으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전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밤에 혼자 여기를 간다면 배수구 근처를 지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배수구 뚜껑이 열리고 끔찍한 손이 올라와 다리를 잡아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로레타 수도원 정면에는 종탑이 있다. 1694년에 만들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큰 종탑이다. 종은 모두 30개지만 지금 소리를 내는 것은 20개다. 종탑에는 배수구와도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프라하에서 세상을 떠난 유령은 저승에 가기 전 종탑에서 잠시 쉰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은 뒤 배수구를 통해 저승으로 간다는 이야기다.
프라하의 로레타는 수도원 부분만 따지만 그다지 크지 않지만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는 정원까지 더 하면 꽤 넓다. 정원 면적은 체르닌궁전 정원과 비슷하다. 정원을 볼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수도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충분하다.
수도원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내부 정원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대리석 건물을 보게 된다. 이 건물이 바로 성모 마리아 가족의 집, 즉 산타 카사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가운데에 놓인 산타 카사를 각종 성당 건물이 에워싸고 있다.
성모 마리아가 살던 집은 평범한 벽돌집이었다. 한쪽 벽은 바위에 붙었고 나머지 세 쪽에는 벽돌을 쌓았다. 창이 없어서 안은 꽤 어두웠다.
십자군 원정이 끝날 무렵 누군가 산타 카사를 이탈리아의 로레토로 옮겼다.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유럽 곳곳에서 순례자가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아주 초라했던 산타 카사는 정교하게 장식한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화려한 건물로 다시 태어났다.
중세에는 다른 나라로 여행한다는 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산타 카사를 보고 싶었던 사람들은 로레토에 가는 대신 산타 카사 모방 건물을 지었다. 프라하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로브코비츠 가문의 카테리나 백작부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흐라드차니의 땅을 내놓고 산타 카사를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로레토는 체코어로는 로레타다. 그래서 프라하에 새로 지은 산타 카사는 프라하의 로레타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건물은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산타 카사 주변을 벽으로 에워싼 다음 주변에 회랑을 설치한 게 고작이었다.
프라하에 이탈리아의 산타 카사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은 산타 카사가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체코는 물론 인근 나라에서 순례자가 밀려들었다. 나중에는 순례자를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가 돼 공간을 넓혀야 할 처지가 됐다. 결국 교회와 예배당을 차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산타 카사를 다른 건물이 에워싼 구조로 변하고 말았다.
프라하의 로레타 산타 카사 외부는 정말 화려하다.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돌집은 벽돌집이었다는데 이곳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였다. 거기에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 전설을 담은 온갖 장식이 달렸다. 단순히 ‘성모 마리아의 돌집을 모방했다’고만 아는 사람이 본다면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어찌 됐든 프라하 산타 카사는 매우 성스러워 보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물이다.
산타 카사 안에 들어가면 다시 놀라게 된다. 화려한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아주 단출하기 때문이다. 단출한 걸 넘어 벽은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집처럼 붉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고, 아주 낡고 벽에 금이 가서 금세라도 허물어질 것 같다.
산타 카사를 만든 지 너무 오래돼서 이렇게 낡은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일부러 낡은 것처럼 지은 것이다. 그것은 카테리나 백작 부인의 뜻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건축가 지오반니 오르시에게 일을 맡겼는데 모든 것을 일임하되 딱 한 가지만 주문했다. 이탈리아 로레토의 산타 카사와 똑같이 만들라는 것이었다. 새것처럼 만들지 말고 1천 년 이상 돼 낡은 모습 그대로 재현하라는 이야기였다.
산타 카사 내부 벽에는 성모 마리아 벽화가 그려져 있다. 다른 벽에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도 보인다. 이곳을 찾는 순례객은 벽을 붙잡거나 조각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를 드린다. 다행인지, 아쉬운 건지 나는 기독교 신도가 아니라 단순히 벽화와 조각상을 무심하게 구경하고 발길을 돌린다.
산타 카사를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수도원 보물관에서 꼭 봐야 할 게 있다. 다이아몬드 6천222개로 만든 성체 안치기다. 길이는 90㎝, 폭은 70㎝이며 무게는 12㎏에 이른다. 다이아몬드를 점점이 박아 만든 태양이 마치 광배처럼 성모 마리아 조각상 위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프라하의 태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프라하의 태양을 만드는 데 사용한 다이아몬드는 루드밀라 백작부인이 기부한 것이었다. 그녀는 결혼식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에 달려 있던 다이아몬드를 몽땅 내놓았다. 그녀가 바친 다이아몬드는 6천500개였다. 그중에서 프라하의 태양을 만드는 데에는 6천222개를 사용했다. 나머지 278개는 보석 세공사의 임금으로 지불했다.
프라하의 태양은 성모 마리아를 아주 역동적이고 감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태양의 광선을 나타내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일렬로 배열한 것은 현대적 감각마저 느끼게 한다. 당시로서는 성체 안치기 제작 역사에서 획기적인 걸작이었다. 디자이너의 놀라운 예술적 창의력과 금, 보석 세공사의 탁월한 기술력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이런 설명을 듣거나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일행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프라하의 태양에 시선을 고정하고 눈을 돌릴 줄 몰랐다.
살아 있을 때에는 프라하의 로레타 운영기금을 지원하는 등 도움의 손길을 끊임없이 내밀있고 죽은 뒤에는 프라하의 태양을 기부한 백작부인을 기리기 위해 프라하의 로레타 복도에는 백작부인 초상화가 걸려 있다.
프라하를 잘 아는 외국인 관광객이라도 프라하의 로레타를 둘러보면 곧바로 프라하성으로 걸음을 옮긴다. 수도원 정문에서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프라하성 방향이지만 오른쪽으로 가면 그야말로 ‘신세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체르닌정원 옆 골목의 이름은 체르닌스카 거리다. 신세계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아주 작고 신비스럽고 동화 같은 곳이다. 동네 이름은 ‘노비 스비에트’다. 영어로 번역하면 ‘New World’, 우리말로 풀어쓰면 ‘신세계’ 또는 ‘새 동네’다.
노비 스비에트는 14세기에 처음 만들어졌다. 프라하성 서쪽 지역에서 성벽을 보강하는 공사가 벌어진 게 계기였다. 성벽이 완성되자 궁전에서 일하던 시종, 시녀 들이 왕에게 성문 근처에 마을을 이뤄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프라하 성과 가까워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는 게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너그러운’ 왕은 그들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을이 만들어진 게 700년이 다 됐으니 지금은 ‘옛 동네’이지만 당시에는 ‘새 동네’였기 때문에 노비 스빙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비 스비에트는 헤라드차니의 작은 구역이다. 체르닌 궁전의 정원, 신비한 카푸치노 수도원, 그리고 프라하 성 정원의 벽들이 이곳을 에워싸고 있다. 그래서 미리 알고 가지 않는다면 바깥에서는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를 수도 있다.
체르닌정원 담장 옆 골목은 약간 내리막길이다. 정면으로 나무가 우거진 숲과 그 사이에 숨은 집들이 나타난다. 각 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주 낡았다. 어떤 집은 벽의 칠이 벗겨져 너덜하다. 다른 집은 아주 넓은 벽에 창문이라곤 손바닥만 한 것 3개뿐이다. 이래서야 바람이라도 제대로 통할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제대로 열리지도 않을 것 같은 문이 달린 집도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곳이니 문은 제대로 열린다.
내리막길 골목 끝에는 조그마한 광장이 나타난다.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뒤에는 통나무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 보인다. 이곳은 ‘호텔 우라카’다. 우라카는 ‘가재’라는 뜻이다. 호텔 바로 뒤편에 브루스니체라는 작은 개울이 있는데 이곳에서 옛날 가재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호텔에 가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텔 우라카는 호텔이면서 카페다. 체르닌 궁전, 로레타를 돌아다니느라 피곤하다면 이곳에 앉아 커피를 한 잔 마셔도 된다. 열린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커피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쨍그랑거리는 쟁반 소리와 매력적인 청춘 남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어 흘러나올 것 같다.
티코 브라허도 노비 스비에트에서 한때 거주했다. 루돌프 2세 황제의 초청을 받은 그는 황금 새의 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하지만 집이 너무 작아 과학 장비를 설치할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그에게 쿠르츠의 집을 사주었다. 노비 스비에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헤라드차니의 포호르젤레츠 거리였다.
노비 스비에트에는 19세기부터 많은 예술가가 들어가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고 공산정권 시절에는 더 많은 예술가가 몰려들었다.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예술가적 영감을 얻기에 좋았고, 정권의 감시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던 게 이유였다.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몰렸던지 이곳은 ‘프라하의 몽마르트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하지만 실제로 가보면 파리의 몽마르트르보다 더 조용하고 그림 같으면서 한적한 곳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작은 집들이 이어진 풍경은 마치 중세의 작은 마을처럼 고풍스러운 장면을 연출한다.
노비 스비에트에는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한적하게 커피 한 잔을 즐기려는 프라하 현지인이 많이 몰린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둘러보고 프라하 성으로 걸어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중세 마을 같은 신기한 골목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미리 알고 들어갔든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다 실수로 들어갔든 상관없는 일이다. 골목에 들어가면 열린 카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커피 향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쨍그랑거리는 쟁반 소리와 매력적인 청춘 남녀의 목소리가 뒤를 이어 흘러나온다.
잠시 눈을 감아보자. 그리고 소리와 냄새로만 골목길의 채취를 느껴보자. 잠시 후 다시 눈을 떠보자. 도대체 여기가 어딘지 헷갈릴지도 모른다. 이곳이 프라하가 맞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눈을 감은 사이 ‘앨리스의 토끼 굴’에 빠진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외국 관광객만 그런 게 아니다. 프라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아.”